최종편집 2024-04-20 10:04 (토)
해방, 그리고 4.3
해방, 그리고 4.3
  • 고희범
  • 승인 2012.05.18 10:4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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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희범의 제주이야기] 제주포럼C 제21회 제주탐방 후기

빛 한 점 새어들어오지 않는 동굴 속 칠흑같은 어둠. 눈을 감았다 떠 본다. 눈을 감는 것과 뜨는 것에 아무런 차이가 없다. 어떤 것도 존재하지 않는 공간처럼 느껴진다. 어둠은 나의 존재 자체를 의심하게 한다. 이따금 떨어지는 물방울 소리가 나의 청각이 작동하고 있음을 확인해줄 뿐이다. 손을 더듬거려 옆 사람의 존재를 확인한다.

4.3 당시 안덕면 동광리 큰넓궤에 숨어있던 120명의 주민들은 동굴 속 어둠에서 죽음의 공포를 달랠 수 있었을까.

동광리 큰넓궤의 피난 생활

1948년 11월 15일, 안덕면 동광리에서는 군인들이 마을을 포위하고 주민들을 불러모았다. 마을 유지 10명을 총으로 쏘아 죽였다. 사흘 뒤 마을은 불태워졌다. 중산간마을에 대한 초토화작전이 시작된 것이었다. 목숨을 부지할 수 있는 길이 어디인지 알 수 없었다. 해안마을로 내려가는 것은 죽음을 자초하는 일이었다. 일단 군인들이 없는 산으로 들어가 숨는 길 밖에 없었다.

'어린아이가 춤추는 모양'을 하고 있다는 데서 유래한 '무동(舞童)이왓', 삼을 재배하던 '삼밧구석' 등 안덕면 동광리의 자연마을 사람들은 마을목장 안에 있는 용암동굴 '큰넓궤'에 숨어들었다. 한 사람이 겨우 기어서 들어갈 수 있을 만큼 좁은 동굴 입구는 주변이 나무와 덤불로 덮여 있었다. 주민들 사이에 큰넓궤가 숨을 만하다고 알려지면서 알음 알음으로 찾아온 사람들이 120명이나 됐다.

 

큰넓궤는 입구가 나무와 덤불로 덮이면 발견하기가 쉽지 않아 마을주민들이 피할 만한 곳이었다.

굴 입구를 기어 들어가면 넉넉히 일어설 수 있을 만큼 동굴천정이 높아진다. 5m쯤 안쪽에 절벽이 나타난다. 4m 높이의 절벽을 내려가는 일은 쉽지 않다. 발 디딜 곳을 찾으려면 아래서 최소한 두 사람이 도와줘야 한다. 우리는 사다리를 이용해 아래로 내려갔다. 절벽 아래에는 날카로운 용암석들이 무더기져 있는 넓은 공간이 나온다.

 

 
사다리로 절벽을 내려가(위) 4.3연구소 김은희 연구원(아래사진 오른쪽)의 해설을 듣고 있다.

이곳에 피해있던 주민들은 나름대로 내부 수칙을 정해 질서있게 피난생활을 했다. 절벽 아래 제법 넓은 공간의 양쪽 벽 아래에는 깨진 항아리 조각들이 널려있었다. 간장, 된장, 식수 등을 담았던 항아리들을 이곳에 놓아두었다고 한다. 이 공간의 한쪽 구석 외진 곳은 화장실로 사용했다. 공간 안쪽에는 1m 높이의 돌담을 쌓아 놓았다. 방호벽이다. 이 방호벽을 지나야 깊은 굴 안으로 들어갈 수 있다.

 

깨진 항아리 조각들이 60여년의 세월을 거슬러 당시의 피난생활을 증언하고 있다.
한사람이 통과할 수 있는 틈을 사이에 두고 양쪽으로 돌담이 보인다.

사람들이 모여 잠을 자거나 피신해있던 공간은 굴의 깊은 안쪽에 있다. 바위 천장이 낮아 30여m를 기어가야 한다. 바닥과 천장 사이가 1m 정도되는 곳은 장갑 낀 손으로 바닥을 짚고 다리를 편 채 기어갈 수 있었지만 낮은 곳은 50~60cm에 불과해 낮은 포복을 해야 했다.

힘들여 기어가는 동안 동굴 천정이 조금만 내려앉아도 그대로 깔리거나 갇힐 수 있다는 생각이 얼핏 들기도 했다. 날카로운 바닥에 무릎이 닿지 않도록 하려면 손바닥과 발 끝으로 기어가야 했다. 몇 m 가지 못해 무릎으로 기기 시작했다. 숨이 턱에 차올랐다. 중간지점에서 한참이나 숨을 돌리고서야 넓은 공간으로 빠져 나갈 수 있었다.

 

바짝 엎드려 낮은 포복을 해야 하는 지점이 10여m쯤 된다. 숨이 턱에 찬다.
30여m를 기어나온 뒤 뒤따라오는 사람들에게 불을 비쳐주면서 숨을 돌리고 있다.

굴 안쪽에는 폭과 길이가 10m~30m쯤 되는 넓은 공간이 있었다. 큰 굴곡이나 경사는 없었지만 날카로운 용암석이 울퉁불퉁하게 바닥을 이루고 있어서 두꺼운 이불을 깔았다고 하더라도 반듯이 드러누울 수는 없는 곳이었다. 바닥 형태에 몸을 맞춰 웅크린 자세로 밖에는 견딜 수 없었을 것 같다. 굴 안에는 오른쪽으로 1.5m 높이에 또다른 굴이 뚫려 있어 2층 구조를 하고 있었다. 당시 큰넓궤에 먼저 들어온 주민들은 1층에, 나중에 들어온 사람은 2층에 자리를 잡았다고 한다.

 

주민들이 피신해 있던 굴 안쪽에는 오른쪽으로 2층에 해당하는 굴이 또 하나 나 있었다.

주민들은 200여m 떨어진 도너리오름에 보초를 세워 군인들의 움직임을 확인하고, 물을 길어오거나 식량을 준비하는 등의 역할을 분담했다. 그렇게 120명이 이곳에서 50일을 지낼 수 있었다. 그러나 가을철 수확도, 소 닭 돼지 등 기르던 가축도 포기한 채 오로지 산 목숨 지키는 것만이 최대의 목적이던 주민들에게 큰넓궤는 더 이상 피난처가 되지 못했다.

굴에서 나와 마을로 내려갔던 사람이 토벌대에 붙잡히면서 큰넓궤의 위치가 알려지고 만 것이다. 토벌대의 앞장을 서 큰넓궤로 향하던 이 사람이 토벌대를 따돌리고 달아나 굴 안으로 들어왔다. 주민들은 굴 안에서 이불을 모아 고춧가루와 함께 불을 지폈다. 굴 밖으로 매운 연기가 나가자 굴 가까이 접근하지 못한 토벌대는 총만 난사하다가 날이 어두워지자 철수했다. 지혜와 용기로 죽음을 모면한 주민들은 날이 밝기 전 굴을 빠져 나와 더 깊은 산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뿔뿔이 흩어져 눈 덮인 한라산을 헤메던 주민들은 하나둘씩 토벌대에 붙잡혔다. 영실 근처의 볼레오름에 숨어있던 주민들은 이듬해 1월께 대부분 토벌대에 붙잡혔다. 동광리 주민들은 산으로 피했던 다른 마을 주민들과 함께 서귀포의 단추공장 건물에 갇혀있다가 정방폭포 위에서 집단학살을 당했다.

4.3이 끝난 뒤 천행으로 살아남은 유족들은 시신이라도 수습하려고 수소문 끝에 학살현장을 찾았으나 시신을 찾을 수 없었다. 바다로 떠내려갔거나 정방폭포 위 학살터에는 5평 넓이의 구덩이에 유골들이 뒤엉켜있어 수습할 방법이 없었다. 유족들은 죽은 이들의 혼을 불러 헛 봉분을 쌓고 묘를 만들었다. 동광리 육거리 근처 밭에 있는 '헛묘'는 임문숙씨가 어머니와 아내, 4촌 형 부부, 제수 등 9명의 묘를 조성한 것이다.

 

시신마저 수습하지 못하자 원혼을 불러다 안장한 헛묘. 7기에 9명의 원혼이 잠들어있다.

해방공간의 제주도

해방과 함께 자주독립국가 건설을 위한 '건국준비위원회'(건준)가 전국적으로 조직되자 제주에서는 해방직후인 1945년 9월 6일 대정면을 시작으로 제주도 전역에 건준이 결성됐다. 이후 건준이 인민위원회로 개편돼 각 면과 마을 행정을 주도했다. 미 군정에 의해 행정이 실시됐지만 인민위원장이 마을 이장이 됐고, 마을 향사는 인민위원회 사무실로 사용됐다.

인민위원회 간부들은 항일운동으로 옥고를 치른 사람들이 많았다. 제주도의 항일운동은 사회주의 성향이 두드러져 인민위원회는 좌익 성향의 인물들이 주도했지만 일제강점기 면장을 지낸 이들도 간부로 포용하는 등 좌우연합적 성격을 띠고 있었다. 자치적으로 마을마다 초등학교, 면 단위로는 중등학교 설립운동이 전개돼 해방 이후 2년 동안 초등 44개교, 중등 10개교가 신설됐다.

제주도에 조선경비대 9연대가 창설되고 경찰병력이 증강되는 등 미 군정이 물리력을 갖추게 되면서 1946년 말부터 인민위원회에 대한 탄압이 가해지기 시작했다. 여기에 더해 일본 등 외지에 나가있던 6만여명의 귀환, 귀환인구의 실직난, 생필품 부족, 콜레라로 인한 수백명의 희생, 일제경찰의 미군정 경찰 변신, 군정관리의 모리행위 등이 사회문제로 부각되고 있었다.

이런 분위기 속에 1947년 삼일절 발포사건이 일어나고 이에 항의하는 민관합동 총파업이 벌어졌다. 미 군정은 '경찰 발포' 보다 '남로당의 선동'에 비중을 둔 강공정책으로 박경훈 도지사를 비롯한 군정 수뇌부를 전원 외지인으로 교체하고 육지 응원경찰과 서청단원들에 의한 파업 주모자 검거작전을 폈다. 1년 동안 2500명이 구금되고 테러와 고문이 잇따라 1948년 3월에는 3건의 고문치사 사건이 발생했다.

조직 노출로 위기상황을 맞은 남로당 제주도당은 군정당국에 등을 돌린 민심을 이용해 조직을 수호하는 한편 단선, 단정을 반대하는 무장투쟁을 결정했다. 1948년 4월 3일 새벽, 무장대가 도내 11개 경찰지서를 습격하는 것으로 시작된 4.3은 한국 현대사 최대의 비극으로 전개됐다.

동광리 돌다리

동광리 내창에는 돔 형식으로 만들어진 천연 돌다리가 있다. 폭 2m, 길이 20m쯤 되는 이 다리는 바위들이 서로 엇갈리면서 묘하게 공중에 떠 있을 수 있도록 만들어져 있다. 1960년대만 해도 큰 비가 내려 길이 끊기면 이 돌다리를 이용했지만 지금은 이 동네 주민들도 이 돌다리의 위치를 잘 모른다.

 

바위들이 뒤엉켜 만들어진 돌다리는 또다른 자연의 신비를 보여주고 있다.

큰넓궤와 헛묘는 4.3 당시 국가공권력이 무고한 양민들에게 저지른 잔혹한 범죄행위를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었다. 동광리 주민들이 겪었던 죽음의 공포와 극한상황에서도 질서정연하게 유지한 공동체생활, 총탄에 맞서 잠시동안이나마 저항했던 주민들의 지혜와 용기, 그러나 끝내 죽음에 이를 수밖에 없었던 혹한기의 피신, 가족의 시신마저 찾지 못한 유족들의 한이 아프게 그려졌다.

그 비극의 현장 가까이에서 긴 세월을 버텨온 돌다리는 역사의 굴곡을 이겨내고 살아온 제주인의 끈기 처럼 여전히 그렇게 서 있다. 무거웠던 마음은 돌다리에서 만난 찬란한 봄 햇살과 함께 어느 새 한결 가벼워져 있었다.
 

 

<프로필>
제주포럼C 공동대표
전 한겨레신문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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