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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서향 향기 그윽한 무릉 곶자왈 가다
백서향 향기 그윽한 무릉 곶자왈 가다
  • 고희범
  • 승인 2012.04.02 14:5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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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희범의 제주이야기] 제주포럼C 제20회 제주탐방 후기

곶자왈은 제주의 오름에서 화산이 폭발하면서 죽처럼 흘러나온 용암이 지표면을 덮어 이루어진 지역이다. 넓고 길게 흘러가던 용암이 여러가지 이유로 쪼개지면서 바위덩이들이 불규칙하게 쌓여있는 모양이어서 불모지로 남아있었다. 그러나 현대식 장비는 곶자왈 정도야 메꾸거나 다지는 데 아무런 어려움이 없다. 골프장이나 관광유락시설, 신화역사공원 등이 들어서기도 한다.

곶자왈의 면적은 3천4백여만평으로 제주도 전체면적의 6%에 이른다. 제주의 동부와 서부지역에 분포하는 곶자왈은 조천-함덕 곶자왈, 구좌-성산 곶자왈, 한경-안덕 곶자왈, 애월곶자왈 등 크게 4개 지역으로 구분된다. 이번 탐방에서는 곶자왈을 지질학적으로 살펴보기로 했다. 대상지역은 마침 백서향이 한창 꽃을 피울 때여서 백서향이 많이 분포된 한경-안덕 곶자왈의 무릉곶자왈을 택했다.

'파호이호이', '아아' 등 낯선 표현들은 곶자왈에 대한 지질학적 접근을 더욱 어렵게 한다. 사실은 별로 어려울 게 없다. 하와이 원주민들이 용암지대의 특징을 묘사할 때 사용하는 하와이말이다. 우리가 '빌레', '자왈'이라고 부르는 것과 다르지 않다. 아직도 화산활동이 활발한 하와이에서 쓰는 말을 지질학자들이 책에 소개하면서 전세계적으로 사용하게 된 것이다.

무릉리 일대의 곶자왈이 올레코스에 포함되면서 사람들이 걸어다니기 쉬운 곳을 따라 만든 길은 '파호이호이'로 이루어진 곳이다. 용암의 표면이 밋밋하고 작고 완만한 언덕들이 잘 발달한 지형으로 표면에 밧줄 모양의 무늬가 있는 용암이 '파호이호이'다. 반면 용암층의 위 아래 표면이 까칠까칠하고 날카로운 용암은 '아아'라고 한다.

 

'파호이호이' 용암. 큰 판형 같은 모양을 하고 표면이 미끈해 마치 도로 포장을 해놓은 듯하다.

용암의 온도, 가스 함량, 용암이 흘러가는 지표면의 경사, 용암 분출량과 지속시간 등에 따라 그 형태가 달라지는 것이다. 짧은 시간에 많은 양이 분수처럼 뿜어져 나온 용암은 가스가 많이 빠져나가 가스함유량이 적다. 이 용암이 경사가 급한 곳을 흘러갈 때 흔히 아아가 형성된다. 반대로 적은 양이지만 오랜 시간에 걸쳐 꾸준히 화구를 흘러넘치는 경우 용암은 상대적으로 가스를 많이 함유하게 되고 완만한 지형을 천천히 흘러가게 되면 파호이호이를 형성하게 된다.

같은 화구에서 흘러나온 용암에서도 파호이호이와 아아가 함께 나타나기도 한다. 화산 폭발로 터져나온 마그마가 짧은 시간에 많은 양이 흘러가면서 넓은 지역에 아아를 형성한다. 이후 용암의 분출량은 줄었지만 지속적으로 용암이 흘러나오면서 이미 굳은 용암 아래로 흐른다. 이 용암은 먼저 터져나와 굳은 용암을 지붕 삼아 공기와 직접 맞닿지 않은 채 멀리까지 흘러갈 수 있게 된다.

어떤 지점은 굳은 용암 아래를 지나간 용암 때문에 공간이 생기면서 튜브같은 모양이 되기도 한다. 이것이 오랜 세월을 두고 곳곳이 무너져 내려 2~3m 깊이의 함몰지역이 생긴다. 용암이 흘러내린 방향으로 길쭉한 모양을 만든다. 이런 함몰지역에는 활엽수들이 자라고 있다. 불행하게도 우리를 안내한 안웅산 박사는 전공이 지질학이어서 활엽수들이 왜 이런 곳을 좋아하는지는 밝혀주지 못했다.

 

곶자왈 곳곳에서 함몰지역이 발견된다. 용암 아래 공간 때문에 주저앉은 것이다.

함몰지역에 물이 고여 작은 연못을 이룬 곳도 간간이 눈에 띈다. 지하의 암반층이 물이 새는 것을 막아주는 곳이어서 그렇다고 한다. 겨울철 추위를 피해 지하의 따뜻한 공기가 새어나오는 곶자왈 지대에 들어왔던 마소가 목을 축이기에 충분했을 것이다.

 

바위 틈 사이에 만들어진 물 웅덩이. 바닥이 암반으로 돼 있는 함몰지역에 물이 고인 것이다.

안덕면 동광리의 도너리오름에서 터져나온 용암은 폭발 초반 짧은 시간에 많은 양이 분출되면서 상류에서 아아 형태를 보이던 것이 한경면 무릉리까지 12.5km나 흘러가면서 하류에서는 파호이호이로 나타난다. 이렇게 흐르던 용암은 위에 굳어있던 용암지붕을 깨뜨리고 다시 흘러나온다. 공기에 노출되면서 굳은 용암이 깨지면서 크고 작은 바위덩이가 무더기를 이루기도 한다.

이 때문에 한경-안덕 곶자왈의 하류에 해당하는 무릉 곶자왈이 파호이호이로 이루어져 평탄한 탐방로를 만들어냈지만 그나마 곶자왈 끝자락에 이르면서 돌무더기를 만나게 되는 이유다.

 

무릉곶자왈의 끝 부분에 만들어진 돌 무더기. 분출된 용암의 흐름이 끝나기 직전 모습을 보여준다.

화구에서 흘러나온 용암은 하류로 올수록 그 양이 적어지게 돼 자연히 폭이 좁아진다. 상류의 폭은 넓은 곳이 6km에 이르기도 하지만 하류에서는 폭이 500m 남짓이다. 그 뿐아니라 용암의 두께도 얇아져 판 모양의 암석들이 만들어진다.

하류이거나 곶자왈 가장자리에 해당하는 한경면 산양리, 대정읍 구억리, 신평리 일대에 옹기가마가 많았던 이유 중의 하나는 이런 암석이 이 지역에 많았기 때문이다. 옹기를 구울 때 필요한 땔감이 곶자왈지대에 풍부하기도 했지만 옹기가마를 만들 때 아치형의 천장구조를 만들 수 있는 판자형 돌이 곶자왈 가장자리에 널려있는 탓일 것이다. 이 일대 마을의 돌담도 대부분 판 모양의 돌로 쌓여있는 것이 특징적이다.

 

 
대정읍 구억리의 돌가마 '검은 굴'. 이 지역에 흔한 판형의 현무암은 돌가마를 만드는 데 유용했다. 돌가마의 화구(위)와 돌가마 뒷쪽 연기구멍(아래). 1860년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우리가 지질학 연구에 몰두해 있는 한시간 반 내내 은은한 향기가 떠나지 않았다. 잠결에 향기를 따라갔더니 이 꽃이 피어있었다고 해서 수향(睡香)이라고 불리다 상서로운 향기라는 뜻으로 서향(瑞香)으로 바꿔 부르게 됐다는 백서향(白瑞香)의 향기였다. 그 향기가 천리를 간다고 해서 '천리향'이라고도 불리는 이 꽃은 제주도기념물 제18호인 제주의 야생화다.

 

작고 흰 꽃이 무리져 핀 백서향은 잠든 이를 깨울 만큼 멀리까지 은은한 향기를 풍기고 있었다.

울창한 곶자왈 숲지대 곳곳에서 향기를 내뿜고 있는 백서향은 작은 키에 흰 꽃잎을 달고 있는 소박한 모습과는 달리 그 이름값을 톡톡히 하고 있었다. 곶자왈 지대를 벗어나면서 사라진 꽃향기를 뒤로 하고 우리는 안덕면 동광리 원물오름으로 이동했다.

멀리서 보면 오름의 정상이 넓은 들판 처럼 보일 정도로 두 오름이 길게 드러누운 모양을 하고 있다. 말굽형 화구가 길게 서쪽으로 뻗어 있어 이런 모양이 된 것이다. 원물오름 북쪽으로 당오름(안덕면 동광리)과 정물오름(한림읍 금악리), 금악오름(금악리)이 한 방향으로 서 있다. 원물오름에서는 이들 세 오름이 하나로 겹쳐 보이게 돼 있어 원물오름을 '삼첩(三疊)명당'이라고 한다.

 

높이 100m 정도인 원물오름은 정상이 편평해 들판처럼 보이지만 오르는 길은 다소 가파르다.

원물오름이라는 이름은 '원(院)물'이 있다는 데서 유래했다고 한다. 대정현에서 제주목으로 가려면 산길을 통과해야 한다. 마실 물이 있는 중간지점에 잠시 쉬어갈 수 있도록 '원'(院)을 두는데 이 오름 남쪽에 샘이 있어 이곳을 '원'으로 삼았다는 것이다. 또 다른 설은 몽골의 원(元)나라가 이 곳에 설치한 목장에서 이 물을 사용해 '원(元)물오름'이라 부르게 됐다는 얘기도 있다. 고려 때 '元물오름'이라 불리다 조선시대에 '院물오름'으로 바뀌었을 수도 있겠다.

 

원물오름의 이름이 연유한 오름 남쪽의 샘. 예전에는 식수로 사용했으나 지금은 마소가 마신다.

원물오름의 정상에 부는 바람은 모자가 날아갈 만큼 거셌다. 정상 남쪽의 바위 아래는 햇볕이 잘 드는 데다 바람마저 피할 수 있었다. 잠시 숨을 돌리는 사이 용암의 흐름에 대해 미처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탐방 참가자들의 질문이 이어졌다. 안웅산 박사와 참가자들의 학구열은 원물오름 정상에서도 식을 줄 몰랐다.

 

 

<프로필>
제주포럼C 공동대표
전 한겨레신문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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