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년전 다랑쉬굴 발굴 당시 국가권력이 조직적 은폐” 충격
“20년전 다랑쉬굴 발굴 당시 국가권력이 조직적 은폐” 충격
  • 홍석준 기자
  • 승인 2012.03.29 15: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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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희범 제주포럼C 대표, “당시 유족대표 자처한 이 위임받았다는 것 거짓이었다”

1991년 다랑쉬굴이 처음 발견됐을 때 동굴 내 모습을 담은 사진. 김기삼 작 '1991 다랑쉬'.

20년 전 4.3의 아픈 역사를 전국적으로 알려내는 계기가 됐던 다랑쉬굴에서 발견된 4.3 유해 발굴 작업이 국가 권력에 의해 조직적인 은폐가 이뤄진 정황이 드러났다. 

29일 다랑쉬굴 4.3 유해 발굴 20주년을 기념해 ‘평화와 인권을 향한 기억’ 이란 주제로 열린 전국학술대회에서 당시 제주4.3연구소 이사였던 고희범 제주포럼C 대표는 “당시 유족 대표를 자처해 맡은 사람이 피해자의 5촌 조카라면서 울산에 있는 아들에게 위임받았다고 했지만 거짓이었다”고 폭로했다.

특히 고희범 대표는 당시 유족 대표를 자처해 맡은 이 사람에 대해 “부친이 항일운동가 출신으로 북송선을 타고 북으로 간 사람이었다”며 “그 사람이 정보기관으로부터 어떤 압력과 회유를 받았을 것인지는 능히 상상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법적으로 유족으로 인정받으려면 직계가족이어야 하는데, 당시 ‘울산에 있는 아들에게 위임받았다’고 한 얘기가 거짓말이었다는 것이다.

고 대표는 더 나아가 “당시 경찰과 안기부 등 정보 기관은 진실 은폐 외압의 주범이었고 제주도는 종범이었다”며 “그들은 다랑쉬굴 유해 발굴의 진실을 왜곡하는 데 급급했고, 서둘러 덮어버리려고 안간힘이었다”고 주장했다.

1992년 4월 2일 다랑쉬굴에서 11구의 유해가 발굴됐다는 사실이 공식 발표된 당일 현장을 확인한 경찰이 처음 내놓은 공식 입장은 “토벌대에 발각되자 집단 자살한 것으로 추정된다”는 것이었다.

이어 “굴 입구에 불을 놓아 질식시켰다”는 민보단의 증언이 나오자 경찰은 다시 다랑쉬굴에 대해 “남로당 유격대의 비밀 아지트였다”고 발표하기도 했다.

발굴된 시신 처리가 제주도로 넘겨지게 되자 당시 구좌읍에서는 굴 입구를 시멘트로 봉쇄하고 철조망을 쳐 출입을 금지시킨다. 이어 유족들을 수소문해 유족회의가 열린 것이 4월 12일이었다. 이날 유족회의에서는 합동묘역을 조성해 안장하기로 의견이 모아졌으나 이 때부터 파행이 빚어지기 시작했다.

경찰과 안기부, 제주도가 유족들을 설득해 화장을 유도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특히 고 대표는 “당시 4.3연구소 직원들이 유족들을 설득할까 봐 유족들의 주변을 지키기까지도 했다”고 전했다.

제주포럼C 고희범 대표
고 대표는 당시 상황에 대해 “발표되면 훼손될 것이 불보듯 뻔한데 현장 보존이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해서 발표를 끝까지 반대했었다”며 “결과적으로 4.3 대량학살의 상징적인 사건으로 공개되면서 4.3에 대해 전국적인 관심이 쏟아지게 된 계기가 됐지만, 40여년 동안 어두운 굴 속에 버려진 채 처참하게 누워계시던 분들이 화장돼서 바다에 뿌려짐으로써 두 번이나 모욕과 죽음을 당하게 한 것이 부끄럽고 죄송할 따름”이라고 애써 담담하게 소회를 피력했다.

결국 5월 15일에 굴 입구의 시멘트가 파헤쳐지고 시신을 꺼내면서 장례식이 시작됐다.

고 대표는 “당시 유족과 언론에서 도착하기도 전에 삽시간에 장례식이 진행됐다. 운구차는 한 시간이나 빨리 화장장으로 출발했고, 당시 화장터의 장례상에 놓인 것은 과일 8개와 종이컵 술잔 11개 뿐이었다”고 전했다.

고 대표는 이어 “어느 유족이 자기 아버지와 어머니 시신을 화장해서 바다에 뿌리고 싶어하겠는가?”라고 반문한 뒤 “다랑쉬굴 진실 은폐의 주범들을 고발한다. 경찰과 안기부, 화장하고 바다에 뿌려지도록 독려하고 방관한 당시 제주도지사, 유골 처리와 장례를 서둘러 주도한 북제주군수와 구좌읍장, 담당 공무원이 그들”이라고 주장했다.

결국 화장된 유골은 김녕 앞바다에 뿌려졌고, 28일 4.3증언본풀이 마당에서 생생하게 4.3에 대한 기억을 끄집어낸 고광치씨는 당시 “유골의 10분의1만이라도 달라”면서 심한 다툼을 벌였지만 그것조차도 받아들여지지 않았다고 고 대표는 전했다.

당시 4.3연구소 소장이었던 제주대 고창훈 교수도 “정부는 다랑쉬굴이 4.3의 성지(聖地)가 될 것으로 판단해 바로 부셔버렸다”며 “공권력에 의해 바로 부셔졌지만 2012년 ‘지금 그리고 여기’에서 4.3의 인권 존중의 상징으로 우리에게 살아있는 ‘思․삶’을 말하고 있다”고 의미를 부여했다.

한편 다랑쉬굴은 지난 1991년 4.3연구소 김동만 연구원 등이 구좌읍 채록 활동 중 굴을 찾아 시신 11구를 발견했고, 이듬해인 1992년 4월 2일 제민일보와 제주MBC 보도를 통해 처음 세상에 알려졌다.

특히 시신들 중에서는 어린 아이의 시신도 확인돼 명백히 비무장 상태로 피신해 있던 가족들이 몰살된 4.3의 대표적인 피해 유적지로 꼽히지만 발굴 당시 무참하게 입구를 훼손해버리고 지금도 돌로 입구가 막혀 있는 상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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