빗창의 항쟁, 잠녀의 숨비소리
빗창의 항쟁, 잠녀의 숨비소리
  • 고희범
  • 승인 2012.01.30 17: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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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희범의 제주이야기] 제주포럼C 제18회 제주탐방 후기

"우리들의 요구에 칼로써 대응하면 우리는 죽음으로써 대응한다!"
지금으로부터 80년 전인 1932년 1월 12일. 제주도 구좌면 세화리에서 잠녀('해녀'는 일본식 표현)들의 함성이 터져나왔다. 신임 순시차 세화리를 통과하는 제주도사(島司) 겸 제주도해녀어업조합장인 다구치 일행을 향해 제주 동부지역인 구좌면 하도리, 종달리, 세화리, 연평리, 정의면 시흥리, 오조리 잠녀 1천여명이 호미와 빗창(전복을 따는 도구)을 들고 만세를 외치며 시위를 벌였다.

일제는 잠녀들의 요구에 굴복했으나

잠녀들은 세화리 연두막 동산에 집결한 뒤 세화 오일장으로 행진을 벌인 뒤 집회를 열고 각 리의 잠녀 대표들의 연설에 이어 도사에게 요구조건을 제시했다. 도사는 잠녀들의 시위에 굴복해 5일 이내에 요구조건을 해결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일제 경찰은 목포에 있는 응원 경찰까지 파견하면서 구좌 정의 일대에서 관련자들의 검거에 나섰다. 잠녀들은 검거에 나선 경찰에 맞서 호송차를 습격하기도 했고, 우도에서는 청년들을 검거하려는 경찰의 배를 둘러싸고 저지 투쟁을 벌이기도 했다.

 

시위를 벌이기 위해 잠녀들이 집결했던 연두막동산에는 기념탑과 기념관이 세워졌다. 기념탑에는 투쟁의 주역인 3인방의 조각이 서 있고, 기념탑 오른쪽에는 배후인물로 검거된 우도 출신 항일운동가 강관순이 감옥에서 작사한 '해녀 노래'비가 서 있다.

1931년 6월 하도리 잠녀들이 자신들을 착취하는 해녀조합을 상대로 투쟁을 결의한 이래 이듬해 3월까지 계속된 항일투쟁에는 연인원 1만7천여명이 참여했고, 크고 작은 집회와 시위가 238회에 이르는 등 대규모의 항일운동이 벌어졌다. 이 투쟁 이후 잠녀들의 요구사항은 대부분 받아들여졌고, 해녀조합 외에 각종 관제 조합이 폐지되거나 횡포가 줄어들었다.

이 사건은 잠녀들의 생존권을 지키기 위한 투쟁이 아니라 일제의 식민지 수탈정책에 적극적으로 저항했던 항일민족해방운동으로 평가받고 있다. 이는 이 운동을 주도했던 부춘화 김옥련 부덕량 등 잠녀 지도부가 하도강습소(하도보통학교 야간부) 제1회 졸업생으로 문무현 김태륜 부대현 등 청년 지식인 교사들로부터 민족교육을 받았던 데서도 드러난다. 이들은 <농민독본> <노동독본> 등의 계몽서를 배우고 한글과 한문 뿐만 아니라 저울 눈금 읽는 법까지 교육받았다.

 

잠녀투쟁 주역들이 다녔던 하도강습소 제1회 졸업기념 사진. 부춘화(뒷줄 가운데) 김옥련(둘째줄 두번째) 부덕량(네번째) 앞줄 왼쪽부터 문무현 부대현 김남석 강00 김태윤 등 교사

이 투쟁으로 1백여명의 잠녀와 청년들이 붙잡혔다. 잠녀투쟁의 주역 3인방은 6개월간 구금됐다 풀려났으나 청년 30여명은 조선공산당 재건운동 조직의 혐의로 투옥됐다. 1930년대 중반 이후 가혹한 일제의 탄압으로 전국의 항일운동 세력이 국외로 망명하거나 지하로 잠적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제주에서는 항일운동을 하던 청년들이 잠녀투쟁을 계기로 대거 검거돼 항일운동의 맥이 끊기는 결과가 되기도 했다.

제주 잠녀 수난사

빗창을 들고 일어선 잠녀들의 항일투쟁은 그 이전 제주의 잠녀들이 겪은 수난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조선시대 잠녀들은 미역을 따 정기적으로 진상하거나 관아에 바쳐야 했다. 원래 전복 채취는 남자인 '포작'(鮑作, 보재기)의 몫이었다. 그러나 이들이 진상해야 하는 전복의 양이 너무 많아 이를 견디지 못하고 섬을 떠나 도망가기에 이르렀다. 오죽하면 출륙금지령을 다 내렸을까.

 

바위에 붙어있는 전복을 딸 때 사용하는 빗창. 해녀박물관에 전시돼 있다.

조선 후기에 이르면서 포작의 수가 절대적으로 줄어들게 되자 전복 진상의 의무는 잠녀들에게 넘어왔다. 이 뿐 아니라 남자들이 맡고 있던 군역(軍役)까지 여자들에게 안겨졌다. 제주에 어사로 왔던 김상헌은 "만약 사변을 만나 성을 지키게 되면 민가의 튼튼한 여자를 골라 살받이터 어구에 세웠다"고 기록하고 있다. 제주의 여성들이 겪어야 했던 착취는 도를 넘어서고 있었다.
이날 우리를 항일투쟁의 현장으로 안내한 박찬식 박사는 "제주 여성의 기질이 원래 강인한 게 아니라 수난의 역사 속에서 길러진 것"이라고 설명했다.

갑오개혁을 거치면서 잠녀들은 비로소 진상이나 공물의 고역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관에서 전복과 미역을 사들이는 방식으로 바뀐 것이다. 그러나 1876년 개항 이후 일본 어민들이 제주 바다로 진출하게 됨에 따라 제주어장이 황폐해져갔다. 잠녀들이 생존권을 위협받게 되자 다른 지역으로 나가는 '출가'가 시작됐다. 1887년 부산의 영도로 간 것이 출가의 시초였다.

 

무명적삼 수준의 잠녀옷을 입고 깊은 바다로 나가는 잠녀들. 해녀박물관 동영상의 한 장면이다.

일제강점기에는 한반도 남부지역 뿐 아니라 북부지역과 일본, 중국의 따롄, 칭다오, 블라디보스톡까지 진출하게 된다. 출가 잠녀 수가 1910년대 2500여명이던 것이 1930년대에는 4천여명에 이르렀다. 잠녀들은 4월이 오면 출가해 9월까지 일을 하고 추석이 되면 고향으로 돌아와 겨울을 난 뒤 이듬해 봄 다시 나가는 것이다.

출가 잠녀들의 생활은 비참했다. 이들은 그 지방 어민들과 분쟁으로 시달렸다. 잠녀들은 채취물을 객주에게 팔았는데 채취량과 가격을 속이는 일이 허다했다. 일본 상인들은 객주에게 자금을 대면서 객주와 결탁해 헐값에 채취물을 사들여 일본인 회사에 넘겼다.

잠녀들의 비참한 생활상을 알게 된 조천면장 김태호 등 제주의 유지들은 잠녀들을 보호하기 위해 1920년 제주도해녀어업조합을 창립했다. 제주도 전역에서 조합원 8200여명이 가입한 이 조합은 잠녀들의 권익을 보호하기 위한 다양한 노력을 기울였다.

그러나 몇년 뒤 일본인 제주도사(島司)가 조합장을 겸임하면서 몇몇 상인과 결탁해 잠녀들의 자유 판매를 금지하고 지정가격을 매기는 방법으로 잠녀들을 수탈했다. 잠녀들의 고조되는 불만은 해녀조합에 대한 반발로 이어졌고 결국 1932년 잠녀투쟁이 일어나게 된 것이다.

제주의 상징, 잠녀

잠녀, 또는 해녀는 전 세계에 우리나라와 일본 밖에는 없는 직업이다. 우리나라의 잠녀들은 모두 제주에서 출가한 뒤 그 지역에 정착하면서 전국으로 퍼져나가게 됐다. 제주도에서는 예로부터 동부지역에 잠녀가 많았다. 제주의 동부는 땅이 척박해 농사를 짓기에는 적당하지 않았으나 해조류는 질도 좋고 풍성했다. 해조류를 먹고 사는 전복과 소라도 풍성했으니 이 지역이 잠녀들의 고향이 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현역 제주잠녀 중 최고령인 울릉도의 김화순 잠녀. 올해 91살인 김 할머니는 한림읍 귀덕리 출신이다.

감태는 일제 강점기 화장품과 화약의 원료가 되기도 하고 양갱을 만드는 데도 필요해 비싼 값에 팔리던 해조류였다. 우도에서는 바람이 불고난 다음날이면 감태가 바닷가에 널려있을 정도로 풍성했고, 우뭇가사리도 질이 좋았다고 한다. 지금도 구좌 성산지역에는 잠녀들이 많다.

왕조시대 제주가 당해야 했던 수탈은 제주가 가진 천혜의 가치만큼이나 컸다. 민족 수난기에 약자인 여성들이 겪은 어려움은 남성보다 훨씬 컸다. 그러나 수난은 제주의 여성들을 강인하게 단련시켰다. 섬을 떠나 달아났던 남성들과는 달리 고난을 온몸으로 받아 안으며 섬을 지켰다. 그리고 마침내 제주 특유의 공동체 정서를 바탕으로 청년사회운동 세력과 결합하면서 역사에 빛나는 항일투쟁에 나설 수 있었다.

 

철새와 지미봉

우리는 발길을 옮겨 겨울철새가 찾아드는 구좌읍 하도리 철새도래지로 향했다. 하도리는 동쪽으로 농경지와 지미봉이 있고, 북쪽에는 둑 너머 바다가, 남쪽에는 갈대밭이 펼쳐져 있어 철새들이 서식하기에 적절한 환경을 갖추고 있었다. 바닷물과 민물이 섞이는 습지가 20여만평에 이르러 철새의 먹이도 풍부할 것이었다.

겨울이 되면 30여종, 3천~5천 마리의 철새가 찾아든다고 한다. 희귀종인 저어새, 천연기념무인 노랑부리저어새와 고니를 비롯해 황조롱이, 참매, 물수리 등의 맹금류와 홍머리오리, 흰뺨검둥오리, 댕기흰죽지 등 오리류, 물떼새류와 도요새류, 논병아리류 등의 철새들이 모여드는 것으로 기록돼 있다.

 

 
하도리 철새도래지. 다양한 겨울 철새들이 한적하게 습지에 떠 있다. 기대 보다는 많지 않았다.

우리의 기대와는 달리 습지는 한가로왔다. 멀리 다양한 종이 물에 떠있는 모습이 보이기는 했으나 습지를 가득 채우고 새까맣게 군무를 추는 모습은 볼 수 없었다. 2주 전에 이곳에 왔었다는 일행은 "그 때만 해도 철새가 가득이었다"고 했지만 실망감을 감출 수 없었다. 그 사이 어떤 변화가 있었을까. 우리는 갈대밭 사잇길을 걸으며 갈대밭 근처에 있다가 습지 한가운데를 향해 자리를 옮기는 녀석들을 멀리서 바라보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인근 지미봉은 160m의 그리 높지 않은 오름이었지만 동부지역의 상당부분을 조망할 수 있었다. 구좌와 성산 일대의 농경지, 우도와 성산 일출봉을 포함한 동쪽 해안, 남서쪽으로 한라산까지 눈 앞에 펼쳐 놓고 있었다. 마치 이 일대에서 가장 높은 봉우리인 것 처럼. 지미봉에서는 매년 1월 1일 새해맞이 행사가 열린다. 일출봉 다음으로 가장 동쪽에 있는 오름이기 때문이다.

 

 
 
지미봉 정상에서 내려다 본 우도(맨 위), 성산 일출봉(가운데), 구좌읍 일대(아래 사진).

우리는 미리 준비한 샴페인으로 새해 첫 탐방을 축하하기로 했다. 지미봉 정상에 옹기종기 둘러선 우리는 다소 늦은 새해 염원을 샴페인 종이컵에 담아 마셨다.

"새해에는 제주가 평화와 풍요를 누릴 수 있기를! 새해에는 제주의 어떤 작은 마을이나 소수그룹도 무시당하거나 소외되는 일이 없기를!"
 

 

<프로필>
제주포럼C 공동대표
전 한겨레신문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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