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편집 2024-04-23 18:27 (화)
겨울, 유배의 길, 집념의 삶을 찾아
겨울, 유배의 길, 집념의 삶을 찾아
  • 고희범
  • 승인 2012.01.13 13:1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고희범의 제주이야기] 제주포럼C 제17회 제주탐방 후기

제주인의 범위는 어디까지일까? 제주에서 태어나 제주에서 살고 있는 사람, 제주에서 태어나 육지에서 사는 사람, 육지에서 태어나 제주에 들어와 사는 사람, 육지에서 나서 육지에 살고 있지만 제주를 사랑하는 사람. 보기에 따라 그 한계를 정하는 데는 차이가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제주의 문화는 그 범주가 어디까지일까? 제주의 역사와 환경, 제주인의 정신세계가 만들어낸 자생문화, 자의 또는 타의로 제주에 이주한 외부인들에 의해 형성된 피난민 문화 또는 유배문화. 이것 또한 사람에 따라 제주의 문화로 포함시킬 수도, 그렇지 않을 수도 있을 것이다.

이런 질문을 뒤로 하고 우리는 유배인들의 삶과 그들이 제주에 미친 영향을 따라가 보기로 했다. 거리 상의 제약 때문에 탐방 대상을 추사 김정희와 정난주로 제한해야 하는 한계가 있었다. 우리를 유배의 역사 속으로 안내한 제주대 양진건 교수는 제주의 유배문화를 스토리텔링과 테마여행의 주제로 삼고자 애쓰고 있는 전문가다.

만신창이 몸으로 유배길을 떠나다

추사 김정희는 1840년 쉰다섯의 나이에 서울로 압송돼 여섯 차례 고문을 당하고 36대의 곤장을 맞은 뒤 제주로 유배된다. 안동 김씨 세력과의 권력싸움에서 밀려난 탓이었다. 만신창이가 된 몸으로 말을 타고 전주 남원 나주 해남을 거쳐 완도까지 이른다. 추사는 유배길에 전주에서 서예가 이삼만을 만나고, 해남에서는 친구 초의선사를 만나기 위해 대흥사를 찾았다.

이삼만은 추사를 위해 ‘지금은 꽃이 아니어도 좋아라. 장차는 영원한 삶을 누릴지니’라는 내용의 시를 써주었다. '영원한 삶'이라는 표현 ‘무량수(無量壽)’가 인상적이었던지 추사는 대흥사에서 초의선사에게 ‘대웅보전(大雄寶殿)’이라고 적힌 현판을 떼어내게 하고 ‘무량수각(無量壽閣)’ 현판을 써 주었다.

 

유배길에 친구 초의선사를 만나 써준 대웅전 현판 '무량수각'.

이들 두 사람을 만난 것 외에는 완도까지 이르는 동안 특별한 대접을 받지는 못한 것으로 보인다. 원래 유배형이라는 것이 종신형이지만 정치적 이해대립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유배된 많은 양반관료들은 몇년 안에 사면되는 경우가 많았다. 귀양을 가는 고관대작들이 이후 정세 변화에 따라 다시 권력을 쥘 수 있는 것으로 판단되면 지방관들이 보험을 들어놓듯 후하게 대접을 하지만, 그럴 가능성이 없어 보이면 대접이 시원치 않았다.

당시 남인계의 몰락하는 집안인 추사의 경우는 후자에 해당했던 모양이다. 제주로 유배를 온 최익현의 경우 삼남 대로를 거쳐 이진까지 가마를 탔다는 것이고, 윤선도는 유배지까지 가는 동안 지나는 고을마다 지방관의 환대를 받았다는 것이다. 추사는 이들과는 다른 대접을 받았다.

유배인들은 주로 제주도의 관문이던 조천포구로 들어와 인근 연북정(戀北亭)에 올라 북쪽의 임금을 향해 절을 하고 제주목관아로 가 신고를 하게 된다. 죄인을 호송해온 압송관이 제주의 지방관에게 그 신병관리를 넘기는 것이다. 지방관은 유배인의 관리를 담당할 '보수주인'(保授主人)을 지정해 그 집에서 숙식을 제공하도록 한다.

유배지에서는 유배인을 관리감독하는 것과 함께 그 생계도 책임져야 하기 때문에 감독관청이 있어야 하고, 먹여 살릴 수 있는 능력이 있어야 한다. 세가 약한 섬 지방이나 서북 변경의 고을에서는 유배인의 생계를 해결해주는 일이 부담스러웠다. 제주도가 유배지로 적절했던 것은 이런 조건들을 갖추고 있었기 때문으로, 조선시대 제주로 유배온 사람은 2백여명에 이른다.

화북포구로 들어온 추사는 제주목관아를 들른 뒤 무수천을 거쳐 대정으로 보내진다. 대정현의 포교 송계순이 추사의 보수주인이었으나 2년 뒤 이 지역의 거부였던 강도순의 집으로 옮긴다. 강도순은 4만평의 땅을 소유한 대지주였다. 강도순의 집은 안거리, 밖거리, 모커리에 쇠막과 말방아까지 갖추고 있는 '저택'이었다.

 

대정 부자 강도순의 집. 밖거리와 모커리(가운데 초가), 쇠막(오른쪽 초가)가 보인다.
말방아는 마을에 하나쯤 있는 시설이다. 부잣집이 아니면 개인이 말방아를 갖추는 경우는 없다.

부잣집에서 기거했으니 민초들이 먹는 것 처럼 거친 음식을 먹지는 않았을 것이다. 조천 김응빈의 집에서 지냈던 한말의 지식인 김윤식은 유배기간 동안 서울에서 살던 것보다 훨씬 호사스럽게 살았다고 한다. 아무리 그렇더라도 가족 친지들과도 떨어져 살아야 하는 유배생활이 외로움으로 가득했을 것은 물론이다.

뼈를 깎는 외로움

유배형의 종류는 자신의 거처를 정하도록 해 격리하는 부처(付處)와 죄인의 고향으로 보내는 본향안치(本鄕安置), 외딴 섬에 격리하는 절도안치(絶島安置), 적거지 담장을 가시나무로 둘러 격리하는 위리안치(圍離安置) 등이 있다. 제주도 유배는 절도안치에 위리안치를 겸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실제로는 유배인에 대한 감시 책임은 관내 수령에게 있었기 때문에 수령의 성격이나 재량에 따라 위리안치는 형식에 그치는 경우가 많았다.

 

위리안치는 유배인들이 바깥출입을 하지 못하도록 집 주위에 탱자나무를 심어 놓는다.담 아래 수선화. 추사는 제주인들이 수선화를 보리밭에서 뽑아버리는 것을 안타까와 했다.

유배인들에게는 가족 동반이 허용됐지만 위리안치의 경우에는 가족을 동반할 수 없게 돼 있었다. 이 때문에 유배인들은 제주 여인들과 혼인을 해 제주에 다양한 성씨가 생겨나는 이유가 되기도 했다. 광해군이 어머니 인목대비를 폐위시킨 데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제주에 유배된 간옹 이익은 헌마공신 김만일의 딸을 맞아 경주 이씨 국당공파의 제주 입도조가 됐다. 조선 태조가 고려의 유신을 위무할 때 “충신은 두 임금을 섬길 수 없다”고 신정권을 끝까지 반대하다 유배 온 김만희는 김해 김씨 좌정승공파, 한천은 청주 한씨의 입도조가 된다.

추사의 경우는 어떠했을까. 추사의 여성과 관련한 기록이 없고 한양에 있던 부인에 대한 사랑이 지극해 제주의 여성과 관계를 맺지 않은 것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추사는 유배지에서 부인의 사망 소식을, 그것도 한달 뒤에야 듣고 제문과 함께 자신의 심정을 드러내는 글을 보낸다. 추사의 참담한 심정을 엿볼 수 있다. 그 내용은 이렇다.

"어떻게라도 저승의 월하노인에게 빌어
다음 생에는 그대가 남편되고 내가 아내되어
나는 고향집에서 죽고 그대 천리 밖에서 소식 듣고
그대 이 내 비통한 심정을 알게 하리라."

 

추사 적거지에 세워진 추사관. 추사의 작품과 함께 유배생활에 대한 기록이 전시돼 있다.

제자인 화가 소치 허련과 역관이던 이상적, 친구인 초의선사가 제주를 찾아오기도 했지만 오로지 글을 쓰거나 책을 읽는 것 외에 다른 낙이 없었다. 이상적은 중국에서 책을 구해 자주 보내주었다. 제자의 갸륵한 정성에 대한 답례로 그려준 그림이 '세한도'였다. 세한도는 예술적인 가치 보다는 세한도에 얽힌 사연 때문에 주목을 받는다.

"태사공은 ‘권세와 이득을 바라고 만난 사람은 그것이 다하면 교제 또한 성글어진다’고 했다…그대는 어찌하여 겨울에도 시들지 않고 소나무 잣나무처럼 변함이 없는가? 태사공의 말이 틀린 것인가?”

제자의 변하지 않는 정을 치하하는 글이 담긴 세한도를 전해 받고 이상적은 감격했다. 그는 이 세한도를 청나라 연경으로 갖고 가 추사의 지인들에게 그림을 보여주고 16명한테서 글을 받아 그림 옆에 이어 붙였다. 세한도는 1930년대 일본인 추사연구가에게 넘어가 1944년 일본으로 건너갔다가 세한도의 가치를 아는 서예가 손재형에 의해 한국으로 돌아왔다.

제주 주민들에게는 어떤 영향을 미쳤을까

양진건 교수는 '한문 지식인'인 유배인들의 귀족적이고 고답적인 태도 때문에 현지의 지식인들이나 기득권층과만 교류하는 한계가 있었을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당대 최고의 지식인들인 유배인들이 그들의 학문과 문화를 불모지에 전수한 효과는 적지 않다고 평가한다.

간옹 이익은 김진용, 고홍진, 문영준과 같은 걸출한 인물들을 문하에 배출했다. 이 가운데 김진용은 제주 유림의 거물로 제자들이 명도암이라는 호를 바치고 그 호를 딴 마을이 생겨날 만큼 대학자였다. 이후 김진용은 제주 고등교육의 온상인 귤림서원을 설립하게 된다. 한말 지식인 김윤식은 당시 제주에 유배돼 있던 인물들과 제주의 토호세력들을 모아 '귤원'이라는 시회를 조직하고 제주도의 이른 바 '문화운동'을 이끌었다.

추사는 친구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곳 사람들이 우둔하고 무지하나 스승이 없으므로 이를 불쌍히 여긴다"고 밝힌 대로 제주 인재들의 스승이 되기를 자청했다. 소치 허련이나 강위, 민규호 처럼 육지에서 가르침을 받기 위해 제주를 찾아온 제자들도 있었으나 제주의 중인계급에 속하는 인재들을 제자로 삼았다.

조천 사람 이한우는 23살 때 대정으로 찾아가 가르침을 청했다. 유배기간 내내 추사의 가르침을 받은 이한우는 이후 안달삼 김희정 이계징 고영흔 등의 제자를 길렀다. 추사가 한양의 아들에게 보내 함께 학문 연마를 권하기도 했던 이시형, 추사의 도장 180개를 모아 <완당인보>를 펴낸 박계첨, 추사의 서울 심부름을 하기도 했던 보수주인 강도순의 동생 강도휘 등 시(詩), 서(書), 화(畵) 분야에서 수많은 제자를 배출했다.

70 평생 동안 벼루 10개의 밑창을 뚫고, 1천자루의 붓을 닳게 한 그의 열정은 제주에서 보낸 혹독한 고독과 고난의 시절을 통해 추사체를 완성할 수 있었다. 제주의 수선화와 맨드라미, 영산홍을 좋아해 시와 그림으로 그 아름다움을 노래하기도 했다. 64세에 유배에서 풀려 제주를 떠나기 까지 8년 3개월의 세월은 그에게도, 제주인에게도 중요한 의미가 있었음이 분명하다.

'서울 할머니' 정난주 마리아

추사에 앞서 대정에 유배온 정난주는 종교적인 이유로 대역죄인이 됐던 인물이다. 정약현의 딸로 당대 최고의 실학자 정약전, 약종, 약용의 조카이기도 한 정난주는 1801년 남편 황사영의 백서 사건을 체포됐다. 황사영 백서는 길이 62cm, 너비 38cm의 명주천에 천주교도들이 박해받는 실상과 순교자들에 대한 기록, 포교에 필요한 방안 등을 상세히 기록한 것으로 베이징에 있는 구베아 주교에게 발송되기 직전 발각됐다.

황사영은 서소문 밖에서 능지처참의 극형을 당하고 정난주는 두살 난 아들 황경한과 함께 제주도로 유배됐다. 정난주는 37년을 이곳에서 관노의 신분으로 살았으나 교양과 학식이 풍부해 주민들의 존경을 받으면서 '서울 할머니'로 불렸다. 66살에 병환으로 숨지자 이웃 주민들이 대정읍 동일리에 장사지내고 이후에도 벌초를 하며 묘소를 돌봐왔다.

 

정난주의 유배형은 그야말로 종신형이었다. 지금은 성지로 잘 단장된 정난주 마리아의 묘.

천주교 제주교구는 제주선교 100주년 기념사업의 하나로 이곳을 성역화하고 성지로 다듬어놓았다. 천주교 신자들은 정난주 마리아가 한국의 순교자 103위에 포함되지는 않지만 성인으로 불러도 손색이 없다고 보고 있다. 제주시 외도동 성당은 '정난주성당'으로 이름 붙였다.

정난주는 제주로 오는 길에 아들의 옷에 이름과 생년월일을 적고 추자도 예초리 바닷가 바위에 내려놓았는데 울음소리를 들은 어부 오씨가 발견해 키웠다고 한다. 어머니와 생이별한 황경한은 추자도에서 결혼해 아들 둘을 낳고 살다가 예초리 산자락에 묻혔다. 추자도에는 아직도 그 후손들이 살고 있다.

절해고도로 조선시대 최고의 유배지였던 제주. 유배인들은 북쪽을 바라보며 형이 풀릴 날만 기다리던 섬. 당시 이곳에 살던 제주인들은 당대의 석학이거나 고관대작이던 대역죄인들을 어떤 시선으로 바라봤을까. 유배인들은 '복역'하는 동안 자신들의 생활을 책임지고 잔심부름까지 해주던 제주도민들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갖고 있었을까.

추사와 정난주의 유배생활을 따라가면서 제주인과 유배인의 관계에서 느껴지는 아이러니는 제주인이나 제주문화의 범주를 정하는 것 만큼이나 미묘한 것이었다.
 

 

<프로필>
제주포럼C 공동대표
전 한겨레신문사장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딥페이크등(영상‧음향‧이미지)을 이용한 선거운동 및 후보자 등에 대한 허위사실공표‧비방은 공직선거법에 위반되므로 유의하시기 바랍니다.(삭제 또는 고발될 수 있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