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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파도와 마라도 사이의 항해는 추천하지 않아요”
“가파도와 마라도 사이의 항해는 추천하지 않아요”
  • 김형훈 기자
  • 승인 2011.10.22 1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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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역사 30選] <7>우도에 20여일 머물면서 그려낸 에드워드 벨처의 ‘조선남해안도’

  에드워드 벨처
섬 속의 섬우도에 사람이 정착해서 살기 시작한 건 오래지 않다. 우도에 목장이 설치돼 말을 관리하는 사람이 있긴 했지만 조선 정부의 승인아래 우도에 사람이 들어가 농사를 지으며 살기 시작한 건 헌종 8(1842)이었다. 이유는 우도 개간이었다.

그런데 당시 조선은 세계사의 소용돌이 한 가운데 자리한 때였다. 서양 제국주의의 물결이 조선을 가만히 놔두지 않았다. 이 때부터 이양선(異樣船)’이라는 단어가 조선왕조실록에 자주 등장한다. 헌종실록엔 모두 13건의 이양선 기록이 있으며, 이후 사관들은 이양선이라는 글자를 실록에 새기기에 바빴다. 고종실록엔 무려 130건에 달하는 이양선 기록이 있다.

그렇다면 수많은 외국의 배들 가운데 제주에 대한 기록을 남긴 이들은 없을까. 책이나 지도를 통해 당시의 제주 상황을 전해준 이들은 물론 있다. 그 가운데 영국의 해군장교였던 에드워드 벨처(1799~1877)가 지도를 통해 제주의 모습을 자세히 그려냈다. 벨처는 15세 때 영국 장교 후보생이 돼 배를 탄다. 그는 이후 세계 곳곳을 돌아다니며 해안선을 측량했다. 1841년엔 사마랑호의 지휘자가 돼 홍콩에 영국 깃발을 처음으로 꽂는다. 홍콩의 영국 지배의 시작을 알린 역사적인 인물이 바로 에드워드 벨처다.

  에드워드 벨처의 '조선남해안도'. 그는 '한국군도'라고 표기하고 있다.
'조선남해안도'중 제주도 부분.
벨처는 제주도를 비롯한 남해안 일대도 샅샅이 훑고 다녔다. 그는 18455월부터 8월까지 남해안을 두루 다녔으며, 제주엔 6(음력) 우도에 기지를 두고 20여일간 이 일대를 측정해 지도로 남겼다. 이 지도에선 하멜 표류기에서 그렇듯 제주도는 여전히 켈파트이며, 거문도는 해밀턴항이라는 이름으로 표기돼 있다. 그가 남긴 이 지도엔 한국군도(Korean archiperago)’라는 이름이 붙어 있으며, 한국 역사학계에서는 조선남해안도라고 통용된다.

이 쯤에서 이양선의 등장에 대한 조선정부의 반응은 어땠을지 궁금해진다. 헌종실록을 들여다보자.

이양선이 바다 한 가운데 출몰해 스스로 대영국의 배라고 하면서 물을 재는 줄로 바다의 깊이를 재곤 한다.”<헌종실록 12, 헌종 11(1845) 629>

헌종실록에 나오는 대영국의 배가 바로 에드워드 벨처가 이끄는 사마랑호였다. 사마랑호는 제주도와 남해안을 두루 다니며 헌종실록에서처럼 바다의 깊이를 쟀다. ‘조선남해안도곳곳에 나오는 숫자는 바로 바다의 수심을 나타낸다. 제주도 연안 바다는 50~60피트로 표기돼 있다.

에드워드 벨처가 쓴 '사마랑호 항해기'. 당시 정의현감을 표지로 삼았다.
에드워드 벨처와 관련된 기록은 실록에만 등장하는 건 아니다. 벨처는 사마랑호와의 항해가 끝난 뒤 영국으로 돌아가 사마랑호 항해기라는 책을 남겼다. 이 책에 켈파트 섬(제주도)에 머물게 된 과정이 설명돼 있다.

돛을 펼치고 켈파트 섬으로 나갔다. 우리 함선은 바람을 비껴 받으며 항해를 계속했다. 마침내 우리 쪽으로 부는 바람을 맞으며 켈파트 섬 북쪽에 있는 섬에 닿았다. 6시경에 이 섬 남쪽 만()에서 닻을 내렸는데, 이 곳 만은 큰 섬(제주 본토)과 약 3의 해협을 이루고 있다. 조류는 남쪽으로 세차게 흐르고 있었다.”<사마랑호 항해기중 일부>

사마랑호 항해기에 나온 섬은 우도다. 사마랑호 항해기에 나온 만()은 우도 천진항 인근으로 보이며, 우도 천진항에서 성산포까지의 거리가 3인 걸 감안하면 벨처가 말한 켈파트 북쪽의 섬은 바로 우도임이 분명하다. 벨처는 우도를 기점으로 돌아다녀서인지 우도에 대한 기록은 매우 정확하게 남겼다. 이 지도엔 우도를 영문으로 ‘U To’라고 표기하고 있다.

사마랑호가 오랜기간 우도에 머문 사건은 조선정부로 하여금 고민을 던지게도 했다. 사마랑호가 등장하기 5년전인 1840(헌종 6) 영국 함선이 가파도에 상륙해 흑우를 약탈해 간 일이 있었기 때문이다.

에드워드 벨처와 관련된 보다 더 자세한 기록은 일성록(日省錄)에 나와 있다. 일성록은 국왕의 동정을 자세하게 기술한 자료로, 일기 형식으로 갖춰져 있다.

섬 곳곳을 돌아다니다가 도원포에 상륙해 나무 세 그루를 묶어 그 위에 거울을 올려놓고 제를 지냈다.(중략) 611일에 통사(通事·조선시대 통역 임무를 담당한 역관)가 우도에 가서 산천을 그리는 것은 국법에 위배된다고 타이르자 3가지 물품을 남겨두고 떠났다.”<일성록, 헌종 1174>

벨처 일행이 통사에게 주고 간 건 여러나라를 그린 지도와 종려나무로 만든 부채 2자루였다. 조선정부는 그들이 남기고 간 물건을 버리지 않고 보관했다. 나중에 문제를 우려해 증거물로 삼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그들이 남기고 간 물건 가운데 지도는 어떤 것이었는지 궁금하다. ‘조선남해안도를 들여다보면 벨처 일행이 두고 간 지도는 매우 정확한 지도였을 게 분명하기 때문이다. ‘조선남해안도는 현재의 지도를 보는 듯하다. 동쪽으로는 대한해협과 일본 쓰시마가 그려져 있고, 다도해 일대를 비롯한 남해안이 아주 정확하다. 제주도와 추자군도, 제주도의 부속섬들이 하나도 빠짐없이 새겨져 있다.

이 지도는 매우 정확하다. 제주 해안에서 한라산의 높이를 재 6558피트(1998m)라고 표기했다. 현재 1950m인 한라산 높이와 큰 차이는 없다.
에드워드 벨처는 한라산도 표기를 해두고 있다. 그는 한라산을 오클랜드산으로 표기했으며 높이는 6558피트(1998m)로 새겨뒀다. 군데군데 오름도 보인다. 서귀포 앞바다를 장식한 섬이 있고, 최남단 마라도는 지파드라는 이름을, 가파도는 발로우라는 이름을 지어줬다. 특히 이 지도엔 유의사항을 써놓은 점이 눈에 띈다. ‘가파도와 마라도사이의 항해는 추천하지 않는다’(The passage between Barlow and Giffard is not recommended.)는 글귀다. 아무래도 이 곳의 조류가 무척 세기 때문에 주의를 달아놓은 것으로 보인다.

벨처는 죽기 5년전인 72세의 나이에 해군제독이 된다. 그의 이름은 세계 곳곳에 있다. 홍콩엔 벨처거리와 벨처만()을 남겼고, 캐나다 허드슨만의 벨처제도도 그의 이름을 딴 것이다.

벨처가 역사적인 인물이기에 다소 엉뚱한 상상을 해본다. 만약, 조선과 영국이 청나라처럼 아편전쟁을 벌였다면 어떻게 됐을까. 청나라는 아편전쟁에서 패해 홍콩을 내줬기에, 조선이 영국과의 전쟁에서 졌다면 제주도를 100년정도 쓰라고 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왜냐하면 제주도는 조선남해안도에서 보듯 매우 중요한 요충지이기 때문이다.

<김형훈 기자 / 저작권자 미디어제주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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