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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정부로부터 파직을 당했으나 그림만은 가져가리라”
“조선정부로부터 파직을 당했으나 그림만은 가져가리라”
  • 김형훈 기자
  • 승인 2011.10.08 09: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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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역사 30選] ⑥ 18세기 제주사회를 담은 이형상 제주목사의 「탐라순력도」

18세기 조선은 변화의 시작을 알리는 시기다. 그 변화는 내부에서 시작됐다. 외세의 침략은 사라지고, 당쟁을 거치며 국내적으로도 성숙도를 찾아가는 시기이기 때문이다. 조선은 이러한 18세기를 거쳐 영·정조의 전성기를 누리게 된다.

이형상 목사의 초상.
그 변화의 시작점에 작은 섬 제주를 찾은 이가 있다. 제주목사로 내려온 이형상(1653~1733)이다. 이형상은 효령대군 10대손으로, 제주를 배경으로 한 역작을 남겼다. 바로 「탐라순력도」다. 「탐라순력도」는 이형상이 직접 그린 건 아니지만 화공의 손을 거친 그림에 그의 글이 더해져 기록집으로 탄생하게 된다.

1702년(숙종 28년) 제주목사로 내려온 그는 그 해 제주를 두루 다닌다. 「탐라순력도」의 이름에 보이는 ‘순력(巡歷)’을 행한 것이다. ‘순력’은 원래 관찰사가 해야 하는 업무다. 하지만 섬이었던 제주도에서의 ‘순력’은 전라도관찰사를 대신해 병마수군절제사의 역할을 겸했던 제주목사의 몫이었다. ‘순력’은 봄과 가을 두 차례 이뤄지며, 군사 방어시설을 점검하고 백성들의 삶을 진지하게 살피는 게 목적이었다.

이형상도 「탐라순력도」의 서문에 ‘순력’의 의미를 이렇게 적고 있으며, 순력에 동행한 이들이 ‘이번 행차는 기록할 만한 일이다’는 점도 기술하고 있다.

“매번 봄·가을로 절제사가 직접 방어의 실태와 군민의 풍속을 살피는데 이를 순력이라 한다. 나도 전례에 따라 10월 그믐날 출발해 한달만에 돌아왔다.(每當春秋 節制使親審防禦形正及軍民風俗 謂之巡歷 余遵舊例裝行於十月晦日 閱一朔)”

이형상 목사가 1702년 순력을 하며 가장 먼저 들른 화북진성.
이처럼 ‘순력’은 그 지방의 행정 최고 책임자라면 누구나 해야 하는 업무였다. 그럼에도 「탐라순력도」는 단순한 ‘순력’이 아니다. 조선정부에 보고를 하는 ‘순력’을 그림으로 남긴 건 「탐라순력도」가 유일하기 때문이다. 이런 가치 덕분에 「탐라순력도」는 보물 제652-6호로 지정돼 있다.

「탐라순력도」는 모두 41면으로 된 기록화다. ‘순력’ 장면과 더불어 제주의 사회상을 알 수 있는 지도를 비롯해 일상의 모습도 담았다. 41면 가운데 ‘순력’과 관련이 있는 그림은 28점이며, 평상시의 모습을 담은 그림 11점, 제주도와 주변 도서를 그린 지도인 ‘한라장촉’과 ‘호연금서’라는 그림 각각 1점 등이다.

이형상의 순력은 1702년 가을이던 10월 29일(음력) 시작해 11월 19일까지 21일동안 계속됐다. 그의 발길이 지나간 흔적을 통해 당시 제주도의 방어실태가 어떠했는지를 그림으로 가늠할 수 있으니 그게 바로 「탐라순력도」가 지닌 매력이다.

‘순력’은 당시 제주 행정을 책임진 목사의 자격으로보다는 절제사의 자격으로 나섰다. 절제사는 문관이 아닌 무관으로, 군사의 수장이다. 군사의 수장은 외출을 할 때 붉은 색의 관모를 쓴다. 「탐라순력도」의 ‘순력’ 장면을 잘 들여다보면 이형상 목사의 관모가 붉은 색임을 확인할 수 있다.

'탐라순력도' 중 '제주사회'의 한 장면. 원내가 이형상 목사다.
위 그림을 확대한 장면. 이형상 목사가 붉은 색 관모를 쓰고 있다.

「탐라순력도」와 함께 담겨 있는 지도인 ‘한라장촉’도 큰 의미를 지닌다. ‘한라장촉’은 「탐라순력도」에 포함돼 있기는 하지만 조선반도에 속한 제주도가 아닌, 제주도 단독으로 그려진 첫 지도라는 점이다.

이런 매력을 지닌 「탐라순력도」를 그린 이는 김남길이다. 이형상은 「탐라순력도」의 서문에 ‘김남길’이라는 이름을 뚜렷이 새겨뒀다. 지방에서 그려진 그림에 화공의 이름이 등장하는 것은 이례적이다.

“임금의 은혜는 깊고, 서로 서약하기를 마을 경계에 있는 사당들과 불상을 모두 불태웠다. 그래서 지금은 무당이라는 두 글자는 없어졌다. 한가한 날에 화공 김남길을 불러 40도를 그리게 했다. 비단으로 장식해 만들어 「탐라순력도」라 이름 붙인다.(聖澤互相約誓闔境淫祠竝與佛像而燒燼 今無巫覡二字是尤不可以無言也 卽於暇日畵工金南吉爲四十圖 粧纊爲一帖謂之耽羅巡歷圖)”<탐라순력도 서문 중 일부>

기록화를 그리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다. 조선 중앙정부엔 당연히 전문적인 화공이 있었지만 제주와 같은 지방에도 전문적인 화공을 두었을까? 일부에서는 김남길을 두고 제주인이 아닐 가능성이 많다고 한다. 당시 상황을 살펴보면 제주목 자체에 그런 인재를 두고 있을 리가 만무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탐라순력도」는 ‘순력’의 기록과 함께 다른 기록도 포함돼 있다. ‘한라장촉’인 경우 1702년 4월의 작품이다. 그렇다면 김남길은 8개월동안 이형상을 쫓아다니며 그림을 그린 셈인데, 사람의 이동이 제한된 그 시절에 육지부에 있던 화공을 데려왔을 리는 없다. 그렇다면 김남길은 제주출신일 가능성이 높아진다.

'탐라순력도' 서문에 그림을 그린 화공의 이름이 나온다. 붉은색 테두리에 김남길로 돼 있다.

이쯤에서 풀리지 않는 의문이 있다. 왜 그림으로 남겼고, 왜 이형상은 파직을 당한 뒤에야 화첩의 형태로 「탐라순력도」를 만들었느냐는 점이다.

왜 그림일까? 여기엔 이형상의 욕심이 작용했을 수 있다. ‘한라장촉’은 앞서 설명했듯이 1702년 4월 작품이다. ‘한라장촉’을 포함해 「탐라순력도」에 포함된 그림 가운데 ‘순력’을 펼치기 이전의 그림이 8점이나 된다. 이형상은 화북포구로 제주에 들어오면서부터 제주의 풍광에 푹 빠졌음이 분명하다. 그래서 그는 제주목사로 내려온 시점부터 화공 김남길을 불러 제주의 모습을 그림으로 남기고 있었으며, 자신의 가을 ‘순력’에도 김남길을 동행시켰음을 충분히 유추하게 된다.

그러던 중 그는 파직을 당한다. 제주에 유배를 온 오시복을 돌봐준 혐의였다. 「조선왕조실록」 ‘숙종실록 38권’에 그 이유가 나와 있다. 오시복은 1701년 희빈 장씨(장희빈)가 인현왕후를 저주한 일과 관련된 인물이다. 그런 인물을 이형상이 돌봐줬으니 숙종이 가만 놔 둘리 없다. 숙종이 이형상의 제주목사직을 파직하라고 명을 내린 때가 1703년 3월 5일이다.

그런데 「탐라순력도」는 1703년 죽취일(竹醉日·5월 13일)에 만들었다고 돼 있다. 중종이 이형상을 파직하라고 했는데 2개월 후에 「탐라순력도」를 만들었다니 언뜻 이해가 되지 않는다. 아마도 이형상은 자신이 파직됐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고, 후임자가 내려오는 시간을 이용해 화첩 형태의 「탐라순력도」를 만든 것으로 보인다. 이런 유추가 가능한 이유는 「탐라순력도」 원본은 조선정부도, 제주목도 아닌 이형상의 후손이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형상은 제주의 풍광에 푹 빠져들어 그걸 그림으로 남겼고, 후손들에게 ‘내가 이런 곳에서 관직을 했다’고 보여주려고 했던 것은 아닐까. 현재 제주도가 가지고 있는 「탐라순력도」 원본은 지난 1998년 이형상의 후손으로부터 3억원에 사들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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