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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마 말 못하고, 한평생 묻고 살아온 통곡의 세월'
'차마 말 못하고, 한평생 묻고 살아온 통곡의 세월'
  • 문상식 기자
  • 승인 2006.03.29 15:4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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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일 제주4.3연구소 주최 '4.3증언 본풀이 마당' 개최
4.3당시 모진 고초 현광하 할아버지 등 4명 4.3 증언

'항쟁의 역사...통곡의 세월'

4.3을 겪어보지 못하고 들어보지 못한 이후 세대들은 당시 4월 3일로 되돌아 가보고, 세월을 함께한 우리의 어른들은 당시의 기억을 되짚어 본다.

"4.3사건 때 산에 있다가 내려오지 않았습니다. 그 후에 재검속이 있었구요. 우리동네에도 5~6명이 재검속을 당했는데 1949년 21세에 저는 재검속 되었습니다. 하나하나씩 부르면서 취조를 받았는데 다듬이 방망이로 때리기 시작하면 공식이 20번 이었습니다. 매를 맞다가 실신을 하면 물을 뿌려서 깨어나게 하고 전기 취조도 이어졌구요."

4.3당시 입산 후 귀순을 하고 재검속 되어 죽을 고비를 어려번 넘겼다는 현광하 할아버지(79. 당시 제주시 아라동 거주)는 이렇게 당시를 회상했다.

(사)제주4.3연구소(이사장 고희범, 소장 이규배) 주최로 29일 오후 2시 제주도문예회관 소극장에서 김영훈 제주시장 및 이규배 4.3연구소 소장, 김두연 제주도4.3유족회장, 시민 1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4.3증언 본풀이 마당 다섯번째-항쟁의 역사...통곡의 세월'주제로 4.3항쟁 58주년 기념행사가 열렸다.

이날 4.3증언에는 현 할아버지를 비롯해 4.3초기 남편을 희생한 김순동 할머니(78. 당시 북제주군 조천읍 거주), 마을이 불탄 후 해안마을 피신 중 토벌대에 붙잡혀, 함덕 대대본부의 실상을 목격한 홍난선 할머니(78. 당시 북제주군 조천읍 대흘리 거주), 도피 입산 후 귀순, 귀순공작을 펼친 양달후 할아버지(81. 당시 북제주군 조천읍 대흘리 거주) 등 4명이 증언을 했다.

양금석 제주4.3연구소 이사는 개회사를 통해 "올해는 반세기 넘어 꼭꼭 묻어 두었던 설움과 한을 안고 살아가기가 이제는 버거운 분들, 다시는 이땅에서 야만의 역사가 되살아나지 않기를 바라는 분들을 이 자리에 모셨다"며 "4.3당시 고문의 참상, 가족들의 희생, 죽음을 또 죽임을 온몸으로 겪어야만 했던 참혹한 이야기와 4.3을 겪은 후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는 기억의 고통을 함께 들어보는 시간이 되었으면 한다"고 말했다.

이어 "다시 그런 세상이 온다는 건 상상초자 하기 싫은 분들의 한결같은 소망은 인권과 평화가 넘실대는 땅을 자자손손 물려주는 것"이라며 "오늘 모신 분들의 이야기는 그저 한풀이가 아니라, 어우러져 오순도순 살아가는 평화로운 삶의 밑거름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한편 이날 행사는 최상돈 민중가수의 4.3노래 공연을 시작으로 4.3증언에 이어 제주4.3 영상보고서 상영이 있었다.

4.3사건 때 산에 있다가 내려오지 않았다. 그 후에 재검속이 있었다. 우리 동네에도 5~6명이 재검속을 당했는데 1949년 21세에 재검속 됐다. 시에서 무슨 청년 훈련이 있었는데 그 훈련을 받고 올라오는 도중 삼성혈 부근에서 쉬고 있는데 위에서 트럭이 내려와서 보니 군인들과 동네 사람들이 타고 있었다.

안아무개라는 사람이 나를 지적하더니 나도 차에 타라고 했다. 우리 형님도 타고 있었는데 관덕정 어느 여관으로 데려가더니 취조를 했다. 하나하나씩 부르면서 취조를 받았는데 다듬이 하는 방망이로 때리기 시작하면 공식이 20번이다. 45도 각도로 굽게 해서 20대 때리기 였다.

매를 맞다가 실신을 하면 물을 뿌려서 깨어나게 하고 전기 취조도 받았다. 성기에 전기고문도 했다. 여기서 하루 동안 취조를 받고 동척회사로 옮겼다.

거기서도 결박당한 상태에서 무릎을 끓은 자세로 하루를 살았다. 조사도 한번 받고 오후 5시경 사람들을 호명하면서 "이 사람은 대석방이다"하고 하면서 차에 싣고 갔다. 그때 나간 사람은 시체도 찾지 못하고 어디서 죽였는지 알지를 못한다.

거기에 형님도 계셨다. 방안에는 70~80여명이 있었는데 그 중 40~50여명이 불려나갔다.

박성내 학살... 소개 전이다. 오등교라는 다리라고 거기가 박성내인데 북쪽 내창 위에 엉덕이라고 층전층하가 있는데 그곳에 세워 놓고 총을 쏘아버렸다. 시체를 그냥 놔둘수는 없으니까 마을에 나이 많은 사람들이 가서 시체를 꺼내서 밭으로 놔서 흙을 지치고 해주었다. 피가 내를 넘칠 정도로 되었다.

그게 한두 번이 아니었다. 의사 있었으면 살아날 사람도 있었다. "살려달라, 살려달라"하는 소리도 들렸다. 마을 사람들이 옆 밭에 시체들을 쭉 갔다 놔서 시신을 찾아주기 좋게 해주었다. 소문 들으면서 가족들이 와서 나중 시신을 다 찾아갔다.

"4.3초기 남편 희생, 자수사건으로 부친.외삼촌 희생"

아버지가 함덕으로 자수하러 간 날, 어떤 예편이 "하이구 당신네 이름이 지서에 올랐더라고. 어서 자수하러 가라고 자수하면은 살려준다"고 "우리 한것이 없는데 뭐하러 가냐"고 "그래도 자수해서 자수증만 주면은 자유스럽다. 가라고"

그러니까 우리 어머니는 깜짝 놀라서 "얼른 지서에 가라고. 자수해라. 네 아버지도 자수하러 가는데, 너희들도 지서에 가서 자수해라"하니까 조천지서에 갔는데, 1구서로 잡아갔다.

이렇게 들어갈려니까 감방이 없어요. 꽉 들어차서. 사람위에 사람이 않아 있고 너무 좁으니까 움직거리다 보면 약한 사람은 이렇게 다른 사람 어깨위에 올라가서 앉아 있었다.

옆에서 흠씬 맞아서 죽는 소리가 이만저만이 아니여. 하루면 수십명씩... 빨래를 감아서 때리는 홍두깨로 막 때려. 홍두깨로. 그러면 몇번 안맞고 죽어버리지...

너희 남편은 어디 갔느냐. 산에 무슨 심부름을 했느냐. 그 사람은 죽은 사람이라고. 결혼해서 얼마 안되서 당신네들 쏘는 것에 죽었는데, 어떻게 살았다고 말할 수 있냐고. 그러면 남편이 산에 갔는데 거짓말 하는 것 아니냐고.

"마을 불탄 후 해안마을 피신 중에 토벌대에 붙잡혀, 함덕 대대본부의 실상 목격"

대흘에 군인들이 불 붙였다. 남편은 그냥 나가서 없고. 나만 어느 구석에 앉아 그날 저녁 군인들 갈 동안 애기 안고 있었다. 친정어머니도 따로, 12살 난 우리 동생도 따로 자기만씩 도망갔다.

뒷날 아침엔 어머니도 죽었는지 살았는지 모르고...이제는 돌아가서 봐야지 해서 갔는데, 우리 어머니도 동생도 살아 있어서. 오히려 내가 그 불타는 집에 깔려 죽은 줄 알고 남편이랑 시아주버니랑 불타서 무너져 내린 집을 뒤지고 있었다.

산에 사람들은 남편 없이 아래 내려가면 죽여버린다 하고, 남편도 내려가자고 하면 사람들이 못가게하고. 5~6일 정도 불타버린 집 근체에서 흩어진 곡식들 주워 먹으면서 지냈다.

군인들이 온다하면 도망가는데 젊은 사람은 금방 달아나지만 애기 업은 나는 그 사람들하고 같이 도망 갈 수가 없었다. 한번은 남편을  만나니까 "도저히 난 이런 식으로 살 수가 없으니까 남편 안 데리고 왔다고 죽여도 해변에 내려가겠다고. 어떻하냐고..." 남편은 이제 내려가면 죽는다고만 하면서 안 내려가고. 이젠 할 수 없이 친정어머니네는 조천으로 동생들 데려서 내려가고 나는 시어머니하고 시누이하고 동네 친구네 식구하고 아홉식구가 신촌으로 내려갔다.

그러나 내려오는 길 군인들을 만났다. 군인들이 "저년들 산에 폭도들한테 가서 연락해서 오는 년들이니까 일로 와". 난 그냥 애기 안아서 갔으니까 이제 애기만 울리면 다 쏘아버리겠다고. 애기 울리지 말라고. 그렇게 해서 이제 "어두워지면 가라고 하겠지".

시간이 지나도 아무런 말도 없고. 그날 밤새 그냥 꿇어앉은 채 아홉식구가 밤새 있었다. 군인들이 이제 함덕으로 가자고. 함덕을 가자고 하니까 그냥 걸어서 함덕까지 군인들을 따라서 갔다. 따라서 가보니까 함덕 중학교에 막사가 있는데 90명정도 담고 80명도 담도 했느데, 여러개 있었다. 선인동 사람, 와산 사람, 선흘 사람, 아는 사람들도 다 와 있었다.

"미국이 문제. 좌익이 뭔지 우익이 뭔지 촌놈들은 몰라도 죽여버리고..."

개인감정이고 뭐고 간에 정작 문제는 미국이다. 왜냐하면 4.3나기 전에 3월 1일 날. 3.1운동 기념대회를 북국민학교에서 가졌었다. 제주도 청년들이 몇 천명 모여 있었다. 선언문이 끝나고 북국민학교를 나왔는데 우리는 제일 뒤에 있었다.

우리가 북국민학교 정문을 나오기 전에 총소리가 나니까 완전 난장판이 됐다. 수천 명 모였다가 목숨은 살려고 동서로 막 흩어져 도망쳤다. 누가 죽었는지는 모르지만 총 맞아서 사람이 죽었다고 했다. 이제 국민들도 그 때문에 악이 나게 됐다.

왜, 당당히 3.1운동 기념식을 가지는데 좌익인지 우익인지, 보통 청년들도 다 뭔지 모르는데... 미국놈들 명령 하에서 그땐 말을 탄 기마병이 수십명이 다니고, 군인.경찰 할 것없이 관덕정 마당에 모두 모여 있었다. 뭐라고 해도 미국의 군대가 와서 4.3운동을 만든 것이다.

도피생활 및 귀순... 산에 폭도가 뭔지 주동자가 무엇인지 모르고 우린 목숨 하나 의지해서 살자고. 올라가지도 못하고 내려오지도 못하고. 이러니 항상 부락 부근 몇km 사이에서만 돌아다니고 있었다.

굴 같은데도 임시로 숨어 있다가 피하고. 음식 먹을때는 굴 속에서 해먹고...

3월에, 봄에 내려와서 조천지서에서 시키는 대로 산에 남아 있는 사람들 귀순 시키는 일을 했다. 그런데 귀순 시킨 사람들도 여러 사람 죽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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