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을 지키는 보존 윤리는 ‘미래’를 포함시켜야”

[미디어 窓] 제주 환경을 생각하는 도의원들에게 드리는 글 “다른 생물 이해한 만큼 우리 자신에게 가치 부여하게 돼” 화북 하수처리시설로 멸종위기종 ‘기수갈고둥’ 위기 맞아

2021-08-24     김형훈 기자

[미디어제주 김형훈 기자] 인간의 삶은 환경이다. 환경이라는 단어를 떼고 인간을 상상할 수 없다. 수백만 년 전 인류의 조상이 살던 곳은 숲이었다. 줄곧 인간은 숲과 인연을 맺으며 살았다. 그런 인연을 우리가 끊은 지는 얼마 되지 않는다. 산업혁명이라는 네 글자 이후, 인간의 삶은 달라졌다. 이제 눈에 보이는 환경은 ‘자연환경’이 아니라 ‘인공환경’이다. 인공환경에 익숙해진 인간은 자연환경을 늘 무시한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자연을 보존하려는, 자연을 지키려는 윤리에 대한 저항이다.

저항은 곳곳에서 일어난다. 무차별적이면서 무법적 형태로도 나타난다. 왜 우리는 자연을 지키려는 윤리에 저항을 하며 자연을 파괴하고 있을까. 부동산 가치 때문인가? 제주도는 자연환경이 뛰어난 섬이며, 그걸 지키자고 하면서도 우리는 실행을 하고 있을까? “그렇다”고 답을 해줄 이들은 얼마나 될까. 가까이는 서귀포시에서 벌어지는 도시우회도로 공사가 있다. 어떤 이는 도로를 뚫지 말고 생태가 숨 쉬는 땅으로 만들자고 하는 반면, 어떤 이는 개발이 우선이라고 한다. 개발을 내거는 이들의 속내가 이해되지 않는 건 아니지만 그들의 행위는 ‘보존 윤리’에 대한 저항에 다름 아니다.

그렇다면 ‘보존 윤리’에서 ‘윤리’는 뭘까. <모래 군의 열두 달>을 쓴 생태학자 알도 레오폴드가 규정한 윤리가 있다. 그는 “최종적인 결론을 예상할 수 없는 미래의 한 지점까지의 주변 반응에 일련의 규칙을 맞추기 위해 창안된 일련의 규칙”이라고 정의를 내렸다. 레오폴드의 말이 좀 어렵게 들릴 수 있으나 쉽게 설명한다면 ‘윤리’라는 단어가 이름값을 하려면 ‘미래’를 반드시 포함시켜야 된다는 말이다. 레오폴드가 말한 ‘미래의 한 지점’을 제대로 바라보는 일이 곧 ‘보존 윤리’에 해당된다.

현재 지구에 살고 있는 이들이 지구를 다 써버린다면 어떻게 될까. 미래는 없다. 산업혁명 이후 우리는 아주 짧은 기간에 지구를 바꿔놓았다. 지질을 공부할 때 홍적세, 충적세 등이 있듯 ‘인류세(anthropocene)’라고 부르는 인간이 만든 지질층은 지구를 망치는 파괴의 단면을 말한다. ‘인류세’는 다른 종의 멸종을 동반한다. 현재의 멸종 속도는 지질학 역사 중 가장 빠르다고 한다. 인간의 파괴성은 1억 년 만에 한 번씩 지구에 충돌해 지구의 생명체를 멸종시키는 거대한 운석과 닮았다. <바이오필리아>를 쓴 에드워드 윌슨의 말을 들어보자.

“끊임없는 확장 또는 개인적인 자유를 향한 충동은 인간 정신의 기본이다. 그러나 이것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생물 세계의 성실한 관리자가 되어야 한다. 확장과 관리는 처음에는 서로 모순되는 목표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그렇지 않다. 보존 윤리의 깊이는 확장과 관리 중 하나가 자연에 접근하는 방법이 다른 하나를 재형성하고 강화하는 데 쓰이는 정도에 따라 가늠될 것이다.”

우리 주변에 보이는 자연. 그 자연에서 살아가는 다양한 생명체. 그런 생물세계를 성실하게 관리를 할 때라야 인간의 개인적인 자유와 인간 정신의 기본이 지켜진다고 윌슨은 봤다. 윌슨은 20세기는 물론, 지금 우리가 사는 시대를 대표하는 과학 지성으로 손꼽힌다. ‘내 것’이라고 함부로 자연을 대하기에 앞서, ‘내 것’이니 자연은 소중하다는 생각이 더 중요하다.

화북천에

제주도 자연 곳곳은 ‘보존 윤리’와 ‘저항’이 상존한다. 최근엔 화북 하수처리시설을 놓고 논란이 부각되고 있다. 여기엔 아주 작은 생명체이지만 기수갈고둥이 있다. 멸종위기 야생생물인 기수갈고둥이 화북천에서 살고 있지만 보호대책은 없다. 이곳에 하수처리시설 공사가 진행되면, 가수갈고둥의 존재는 보지 못할 수도 있다. 이는 곧 ‘종의 절멸’이다. 윌슨은 “우리는 다른 생물들을 이해한 정도만큼 그 생물들과 우리 자신에 더 큰 가치를 부여하게 된다.”고 말했다. 과연 우리는 다른 생물들을 얼마만큼 이해하고 있을까.

‘보존 윤리’는 미래를 향한 우리들의 몸짓이다. 그 행위는 후손들을 위한 것일 수도 있지만 ‘보존 윤리’는 그런 의지를 드러내는 자신을 위한 일이기도 하다. 아울러 화북 하수처리시설과 관련해서 도민의 대표격인 도의원들도 관심을 기울였으면 한다. 도의원들의 ‘보존 윤리’를 한번 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