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탐라순력도>에 유일하게 등장하는 ‘성창’의 뜻은

[동아리 ‘청춘예찬’ 일기] <10> ‘탐라순력도’에 나오는 화북2 ‘화북성조’ 그림엔 포구 일대에 ‘성창’ 글자 확인 동문과 서문 그려져 있지만 현재는 흔적도 없어

2019-01-04     김형훈 기자

[미디어제주 김형훈 기자] 이형상 목사가 제작한 <탐라순력도>는 당시 제주도가 어떤 모습인지를 잘 알 수 있다. 중학생 학생들에겐 좀 어려울 수도 있지만 그림으로 표현이 돼 있기에 적응하기는 그다지 어렵지 않으리라 본다.

‘화북성조’라는 그림을 잘 들여다보면 포구에 여러 척의 배가 있는 걸 볼 수 있다. <탐라순력도>에 등장하는 배그림은 깃발을 단 경우가 많다. 깃발이라는 건 군사의 상징적 의미가 강하다. 하지만 화북포구에 있는 배엔 단 한 척도 깃발을 달지 않았다. 왜 그런지는 알 수 없다. 아마도 깃발이 없다는 건 군사적 목적으로 쓰는 배가 아니거나, 당시 이형상 목사가 화북을 점검할 때 그 배엔 아무도 없었는지도 모르겠다. 여하튼 배에 깃발이 없다는 건 이상하기만 하다. 전문가에게 자문을 얻는다면 그 이유를 알 수 있지 않을까.

포구에 건물도 한 채 있는데, 그 역시 용도를 모르겠다. 화북진성은 바로 바닷가에 접해 있기에 굳이 포구에 건물을 두고 적이 오는지 볼 이유가 없다. 포구라는 낮은 곳에서 적을 관찰하기보다는 화북진성이 있는 높은 곳에서 적의 동태를 살피는 게 더 낫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포구에 있는 건물은 군사적 목적으로 만들어진 것 같진 않다. 그렇다면 배를 수리하는 용도였을까? 이 역시 궁금하기만 하다.

또다른 궁금증을 불러일으킬 글자가 ‘화북성조’에 보인다. 제주 어른들은 ‘포구’를 ‘성창’이라고도 한다. 요즘 청소년들은 그런 말을 들어봤을지 궁금하긴 하지만 흔히 그렇게 불렀다. 포구는 여러 이름이 있다. ‘개’라고도 하고, 혹은 ‘개창’, ‘돈지’ 등의 이름을 지니고 있다. 포구는 한자인게 확실한데 나머지는 불명확하다.

그렇다면 ‘성창’은? 그림엔 ‘성창(城滄)’이라고 쓰여 있다. 모두 두 곳에 성창이 등장한다. <탐라순력도>에 등장하는 41점의 그림 가운데 ‘성창’이라는 글자가 보이는 건 ‘화북성조’가 유일하다. 화북사람들이 포구 일대를 ‘성창’이라고 불렀던 것인지, 아니면 정말 한자어인지는 알쏭달쏭하다.

정말 한자어인지 알쏭달쏭한 이유는 있다. ‘성창(城滄)’이라는 단어를 찾으려고 <한한대자전>을 뒤져봤지만 그 단어는 등장하지 않기 때문이다. 포구를 제주사람들이 ‘성창’이라고 부르니까 <탐라순력도>에 그렇게 표기를 한 것인지, 바다를 성처럼 둘러싼 포구를 한자로 쓰다 보니 제주사람들이 성창이라고 부른 것인지 정말 궁금하기만 하다.

여하튼 ‘화북성조’엔 궁금증만 남는 그림과 글자가 가득하다. 그렇다고 정말 애매한 것만 있는 건 아니다. 그 그림의 끝엔 ‘연대’가 나타나 있다. 지금은 건물에 가려서 화북진성에서 연대가 바라보이진 않지만 예전이었다면 충분히 화북진성에서 연대가 바라다보였을 것 같다. 만일 왜구가 침입을 했다면 별도연대에서 쏘아올린 연기는 사라봉수로 전해지고, 곧 제주목사에게 전달됐을 것이라 생각하니 아주 신기하지 않나.

그림을 보면 초가인지 기왓집(와가)인지 구분도 된다. 화북진성 안에도 초가가 있고, 기왓집이 있었다. 초가는 죄다 노란색 지붕이다. 기왓집은 지붕에 먹칠이 돼 있고, 선을 그려넣었다. <탐라순력도>를 볼 때 그런 점만 눈여겨보면 초가인지, 와가인지 금세 구분이 가능하다.

화북진성은 몇 개의 문이 있었을까. ‘화북성조’에 담긴 그림이 맞다는 가정하에, 동문과 서문 두 개의 문만 존재했던 모양이다. 그렇다면 지금은? 남겨져 있는 문터는 없다. 동문과 서문이 있었는지 불확실하다. 그와 관련된 기록은 전혀 남아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도 어떤가. 그림을 통해 당시 상황을 엿볼 수 있으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