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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뻥 뚫린 '도로'가 아니라, '길'을 물었습니다"
"뻥 뚫린 '도로'가 아니라, '길'을 물었습니다"
  • 조승원 기자
  • 승인 2010.01.23 01:48
  •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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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영복 교수 초청 강연회 '숲으로 가는 이야기'

20년을 감옥에서 보냈던 한 남자가 있다. 감옥에서 했던 사색을 바탕으로 책도 썼다. 성공회대학교에서 후학을 양성하기도 했다.

'시대의 선생'이라 불리우는 신영복(69) 성공회대 석좌교수는 이 시대의 사람들에게 이정표가 되어 주고있다.

그가 22일 제주의 시민단체가 주관한 신영복 초청 강연회 '신영복에게 길을 묻다'에서 제주도민의 '네비게이터'를 자청하고 나섰다.

이날 오후 7시 제주벤처마루 10층 백록담홀.

강연회 장소인 10층을 향한 엘리베이터는 신영복 교수의 강연회를 찾은 사람들로 붐볐다. 차라리 계단이 낫겠다며 걸어 오르는 사람들도 있었다.

강연회장 안에는 계단을 오르느라 지치고 풀려버린 다리를 쉴 공간도 넉넉치 않았다. 강연회장의 좌석은 이미 꽉 차 아예 통로에 자리를 잡은 사람들도 눈에 띄었다. 그마저도 차지하지 못한 사람들은 곳곳에 선 채 강연에 귀를 기울여야만 했다.

그들은 도대체 무엇 때문에 두 다리 아픈 고생을 참아가면서까지 제주에서 찾아보기 힘든 '유료 강연회' 자리를 지켰을까.

그 답은 신영복 교수의 '사람의 머리로부터 가슴을 지나 발까지 가는 먼 여행에 관한 이야기' 속에 있었다.

#신영복 교수 "생각은 머리가 아니라 가슴이 하는 것"

신영복 교수는 "흔히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게 무엇인가"라고 물은 후 "대개 돈이라고 생각을 한다"라고 스스로 답하며 이야기 보따리를 풀어나갔다.

신 교수는 "나라에서도 경제성장을 중요시하고 있는 지금, 질문을 한발만 더 들어가보면, '경제성장은 왜 필요한가? 왜 성장해야 하나?'라는 문제에 봉착하게 된다"며 "경제는 바로 사람들의 삶을, 물질적 삶의 토대를 보다 풍부하기 위해 필요한 것이다"고 말했다.

즉 그의 의견에 따르면 근본적인 가치는 경제, 돈이 아니라 삶, 사람이라는 뜻이다.

그런데 삶과 사람은 같은 말이란다.

이유인즉, '사람' 두 글자를 위 아래로 적어놓고 아래에 있는 '람'의 'ㅏ'자를 지우면 '삶'이 된다는 것.

사람인지 삶인지 애매한 글자를 칠판에 적어놓은 그는 본격적으로 '사람의 머리로부터 가슴을 지나 발까지 가는 먼 여행에 관한 이야기'를 풀어놓기 시작했다.

그는 머리에서 가슴까지의 여행이 일생동안 하는 여행중 가장 먼 여행이라고 했다.

그는 "우리가 머리로 알고 있는 것들, 특히 최근 정보화시대에 살고 있는 나나 여러분들은 많은 것들을 알고 있다. 그런데 그 아는 것이 과연 자기가 깨달은 것인가. 아니다"라고 했다.

나라는 존재가 누군가에게 호명되는 것처럼 내 머리로 생각하는 것은 내가 아는 것이 아니라 주입된 것이고 주체적이지 않다는 얘기다.

그는 이어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는 '문맥'에 갇혀있다고 했다.

"콜럼버스가 아메리카에 도착한 이후 지금에 이르기까지 장구한 세월동안 만들어져 온 우리들의 의식구조에 우리가 그대로 주입당하고 있다."

이와 같은 우리가 갇혀 있는 문맥을 깨달아야 머리로부터 가슴까지 가는 길이 열린단다.

그는 이 길을 열기 위해서는 '이해'와 '공감'이 필요하다고 했다.

우리가 흔히 하는 말로 '가슴에 두 손을 얹고 생각해보라'고 한다.

그는 이 말이 '머리-가슴'의 길을 열어준다고 했다. 생각은 머리가 하는 것이 아니라 가슴이 한다는 것.

하지만 우리가 갇혀있는 '문맥'에서 우리는 생각없이 살고 있다고 했다.

그는 "엄마가 집 떠난 아들을 생각하는 것의 '생각'은 전형적인 생각일 뿐이다. 엄마의 삶 속에 포함되어 있는 아들이 진정한 생각"이라고 말했다.

머리로부터 가슴으로 가는 길이 조금씩 열리고 있었다.

#"최고의 덕목은 관용이 아니라 인정과 승인"

시민운동에 있어서도 '변화'를 주문했다. 시민운동도 이제 변화된 시민의 눈높이에 맞게 변화를 해야 한다는 것이다. 웹2.0시대의 젊은이들은 이미 그들 각각이 중심부로서의 기능을 하고 있다고 했다.

지난해 촛불문화제 때 촛불을 들고 모인 수많은 시민들, 그들 각각은 '중심부'로서의 행동을 보인 것이다. 그것을 이해하지 못하고, 시민단체의 조직적 역량을 강화하는 차원에서 그 대중을 바라보는 것은 잘못된 이해라는 것이 신 교수의 지적이다.

변화의 중심부에 있어서는 마이너리티(Minoity, 소수자)가 새로운 것, 역사의 진보를 일구는 중심부로 나서야 한다는 인식을 제시했다. 물론 마이너리티가 중심부로 나서기 위해서는 전제조건이 있다. 바라 '콤플렉스'다. 이 콤플렉스로부터 벗어나 자유로울 때 높은 주변을 만들 수 있고, 이를 통해 중심부로서의 기능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는 "근대 사회에서는 머리에서 가슴까지를 최고의 덕목으로 여긴다"고 말하며 자유와 다양성을 인정하고 승인하는 것이 최고의 덕목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관용이 최고의 덕목일까?

그의 대답은 '노 No'였다.

그는 2008년 베이징올림픽 100m경기에서 신기록을 세우며 우승한 뒤 세레모니를 선보였던 육상선수 우사인 볼트를 예로 들었다.

우사인 볼트가 우승의 감격에 빠져 세레모니를 하자 IOC 위원장은 "동료선수들에게 지나친 모멸감을 주는 세레모니는 삼가하는 게 좋겠다"고 말했다.

IOC 위원장의 말이 의아해 우사인볼트의 세레모니를 다시 찾아본 신영복 교수는 모멸감을 느끼는 동료선수를 찾아볼 수 없었다.

이때 신 교수는 '올림픽은 유럽, 백인을 중심으로 한 축제'라는 데에 생각이 미쳐 관용도 진정한 공감과 애정이 아님을 깨달았다고 했다.

그는 또 "동정을 받는 그 순간에는 감사해 하지만 나중에는 내가 역시 동정을 받아야 하는 처지에 있는 사람이구나 하고 느끼게 된다"며 "이것도 굉장히 아프고 곤혹스러운 것"이라고 말했다.

그래서인지 그에게 있어 '가슴-발' 코스를 잇는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인간관계다.

그는 "자기 혼자서 변화하려 하면 안 된다"며 "다른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 변화해야 한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그 곳이 바로 숲"이라고 했다.

그의 '네비게이션'에 따르면, 내 자신의 관념성을 탈피해 근대 문맥에서 벗어나면 그 곳이 바로 숲이다.

"숲을 만드는 방법은 우선 자기가 갇힌 근대 문맥에서 벗어나 다른 사람을 이해할 수 있는 애정을 가져야 하고 자기를 변화시키는 것이다."

#신영복 교수가 제안하는 '머리-가슴-발' 코스 공략법

신영복 교수는 '머리-가슴-발' 코스 공략법을 세 가지로 압축해 설명했다.

첫째로 그 먼 길의 여정을 가는데 있어서의 방법, 그것은 도로가 아니어야 한다고 했다.

신 교수는 "직선일수록, 고속도로일수록 좋은 도로라고 여겨진다. 이와 같이 도로는 인간적인 논리가 아닌 속도, 효율성을 개념으로 한 것"이라며 "도로가 아니라 길이어야 한다"고 말했다.

"길처럼 앞 사람의 발자국을 보기도 하고, 길을 지나는 사람들과 얘기도 나누고, 길가의 꽃을 보는 것과 같이 길을 걷는 그 자체로부터 동력을 이끌어 낼 수 있는 보람있고 즐거운 마음으로 살아야 한다."

그가 제시하는 두번째 공략법의 키워드는 '자부심'이다.

그는 감옥에서 만난 한 신입 수감자를 예로 들었다.

"20대 초반의 묵묵한 녀석이었는데 도와주려고 내복도 주고 치약도 줬는데 번번히 거절당했다. 우리의 호의가 기분 나쁠 수도 있겠거니 하고 생각했는데 2주쯤 지났을까, 나에게 다가오더니 그 치약 아직도 있냐고 물었다. 그는 감옥에서까지 남들에게 '꿀리고' 싶지 않았던 것이었다."

물질적인 조건의 개선이 역경을 견디는데 힘이 되긴 하지만 자기 스스로의 떳떳함이 훨씬 더 큰 힘이 된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그는 "자기가 하는 일에 있어서 남에게 흔들리지 않는 자부심이 있어야 '머리-가슴-발' 그 먼 길을 견딜 수 있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네덜란드의 외과의사이자 동화작가인 반 에덴의 산문시를 인용하며 세번째 공략법을 제시했다.

한 아버지가 어린 아들과 산책을 하다가 길 옆에 나 있는 버섯 중 하나를 지팡이로 가리키며 "아들아, 이것은 독버섯이란다"고 했다.

그 말을 들은 독버섯이 충격으로 정신을 잃자 옆에 있던 버섯 친구가 "너는 독버섯이 아니야"라며 위로했다.

하지만 그 어떤 위로의 말에도 위안이 되지 않던 독버섯에게 버섯 친구는 "네가 들은 말은 사람들이 하는 말이야. 너는 버섯의 말을 들어야지"라고 말했다.

사람들의 이야기는 버섯의 이야기가 아니라 식탁의 논리라는 것.

그는 "근대 문맥에 갇혀 있는 우리가 식탁의 논리로 세상을 바라보고 있지는 않은가"라고 물으며 근대 문맥에서 탈피할 것을 강연회 참가자들에게 요구했다.

신 교수가 이날 강연의 주제로 삼은 '숲'은 자연 속 나무가 우거진 숲이 아니라, 우리들 생활 속의 모든 것, 바로 그것을 말한 것이었다.

# 성공회대 F4, 김제동과 함께 한 질의응답

강연회에 이어 '더 숲트리오'의 노래 공연이 있었다.

김창남, 박경태, 김진업 3명의 성공회대 교수로 이뤄진 더 숲트리오는 '광야에서', '뭉게구름', '먼지가 되어' 등의 노래를 부르며 관객들과 함께 호흡했다.

준비해 온 노래가 모두 끝나자 관객들로부터 "이쯤에서 앵콜 외쳐주셔야 되는데.."라며 '앵콜'을 재치있게 유도해 웃음을 자아냈다.

더 숲트리오의 노래 공연이 끝난 후 많은 사람들이 문자메시지를 이용해 신영복 교수에게 '길'을 물었다.

질문은 방송인 김제동의 재치있는 입담을 통해 신 교수와 더 숲트리오의 교수 3명에게 전달됐다.

다양한 질문들은 신 교수와 더 숲트리오를 포함한 자칭 '성공회대 F4'가 번갈아가며 맡아 답했다.

'열등감 탈출법'을 물은 질문에 신 교수는 "자기보다 더 못난 사람을 자기 밑에 두는 것이 아니라 열등감 자체를 인정하고 그 속에서 자신감을 찾아내서 키워야 한다"는 답변을 전했다.

또 자식을 가져야 할지 말지 모르겠다는 한 신혼부부의 질문에는 "태어난 자식이 고생할까봐...라는 식의 걱정은 하지 말고 태어난 자체를 축복해줘야 한다"며 "부모들의 사회적 가치로 걱정을 앞세우지 말고 자식을 독립적인 아이로 키우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한다"고 답했다.

질의응답 시간 후 신영복 교수의 책 사인회가 열려 많은 사람들이 신 교수의 저서를 들고와 친필사인을 받고 돌아갔다.

강연회가 끝나고 각자의 길을 간 사람들은 신 교수가 제시한 그 '길'을 걸어 갔을까? <미디어제주>

 

신영복 선생, 그는...

1941년 밀양 출신이다. 1963년 서울대학교 경제학과를 졸업하고, 숙명여자대학교와 육군사관학교에서 경제학 강사로 있다가 1968년 통일혁명당 사건으로 구속되어 무기징역을 선고 받았다.

20년 동안 무기수로 감옥에서 생활하다, 1988년에 특별가석방으로 출소했다. 수감중 지인들에게 보낸 서신을 후에 한 권의 책으로 묶어 세상에 내놓았는데, 이것이 바로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이다.

출소 후, 성공회대학교 사회과학부 교수를 역임하였고 2006년말에 정년 퇴임했다. 저서로는 <처음처럼>, <강의(나의 동양고전독법)>, <더불어 숲>, <신영복의 엽서>, <신영복 서화달력> 등이 있다.

현재는 성공회대학교 석좌교수로 재직하며 '신영복 함께 읽기'라는 수업을 통해 학생들과 나눔과 소통을 하고 있다.

<조승원 기자 / 저작권자 ⓒ 미디어제주 무단전재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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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 길에서 2010-01-25 23:17:29
기사도 잘썼네요. 강연에서 들었던 내용들이 새록새록 합니다.
조 기자님의 명쾌한 정리에 감복하였사옵니다.^^

제주인 2010-01-23 10:52:07
설렘속에서 강의를 들었습니다.
조승원 기자님의 기사를 읽고 다시 한번
가슴 뭉클하네요.
건필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