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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선을 헤매이던 동지들 모습 눈에 선하고..."
"사선을 헤매이던 동지들 모습 눈에 선하고..."
  • 김병욱 기자
  • 승인 2005.01.25 13:3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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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평양 전쟁 참가자 이공석씨의 '아물지 않는 상처'
태평양 전쟁은 1941년 12월 8일 일본의 해군 기동부대가 하와이 진주만의 미 해군 기지를 기습 공격함으로써 시작됐다.

개전 후 반 년 동안 일본은 동남아시아의 대부분을 점령하였으나, 1942년 미드웨이해전을 계기로 전쟁의 사기는 역전되고, 1944년 이후 미 공군의 일본본토 공습이 본격화됨으로써 일본은 패전의 길로 접어든다.

“태평양전쟁 한국인 희생자 보상을 최종 거부한 일본과의 싸움은 이제부터 시작이다. 내가 안 되면 우리 자녀들, 또 그 후손들이 일본의 사죄와 보상을 받아내야 합니다.”

제주지역 ‘태평양전쟁 희생자 유족회’ 회원 이공석씨(구좌읍 하도리.84세)는 이렇게 말문을 열었다.

“일본이 가혹한 고통을 당한게 한데 대한 다시 말해서 하루에도 목숨이 몇백개가 있어도 모자라는 오늘의 이 고통에 대한 대가는 그 무엇으로써 어떻게 보상을 해줄 것인가? 당연히 피해자의 요구대로 이에 상응하는 최대한의 보상이 있어야만 마땅할 것이 아닌가? 만일 이에 대한 이의가 있다면 우리와의 입장을 바꿔 생각해보라”

“사람의 생명은 똑같은데 일본인이 지금의 우리와는 정 반대의 입장에서 우리나라의 과욕으로 저지른 일로 인하여 일본의 지금의 우리와 같은 처지에 놓여 엄청난 고통을 받았다면 지금의 일본인이 우리에 대한 태도와 같이 적당히 넘어갈 수가 있겠느냐”며 “생명의 존엄성에도 일본인과 타 민족과의 차별이 있을 수 있다 말인갚라며 현 상황에 대해 불만을 토로했다.

19일 구좌읍 하도리 자택에서 만난 이공석씨는 “죽음이 오가는 마샬군도내 웟제도(島)에서 3년 6개월을 보냈다”며 “일본이 아니면 누가 보상을 해주냐”며 불만을 터뜨렸다.

일제가 한국인(당시 조선인)들에게 군인, 군속, 탄광, 노무자란 이름하에 강제징집을 실시함에 따라 군속(현재 군무원)으로 가는 시험을 보게됐다.

이공석씨는“1942년 (당시 21세)에 일본은 희망자에 한해서만 모집한다고 했으나 징병제도가 실시되는 것은 뻔한 일이었고, 어차피 가야 되는 거라면 앉아서 당하느니 차라리 군속으로 가는 것이 나을 것 같아 응모를 하게 됐다”며 그때의 일을 떠올렸다.

당시 이공석씨는 3대독자로 태평양전쟁 참가는 가족들에게 청천벽력 같은 일이었다고 한다.

가족들에 강한 반발이 있었지만, 이공익씨는 군속시험에 합격을 하게 된다.

군속시험을 통과한 제주도민은 58명이었고, 1945년 해방이 되면서 살아서 돌아온 사람은 절반도 안되는 26명이었다.

이공석씨는 일본 요코스카 제4해군사령부 군속으로 배정받았고, 1942년 6월 7일 부산항에서 수송선인 취방환호를 타고 남양군도로 떠났다.
남양군도는 당시 일본이 자랑하는 소위 불침의 항공모함이라 불리는 곳이었다.

이공석씨는 “부산을 떠난 지 10여일 후 남양군도내 도락도크에서는 한국인 여성들이 ‘빵빵가루’라는 천한 호칭으로 인간 이하의 천대를 받아가면서 지내고 있다는 실정을 들었을 때는 주권없는 민족의 설움이 통탄을 금할 수없었다”며 눈시울을 붉혔다.

일본군은 최종목적지인 마샬군도 웟제도(島)에 징집돼온 한국인(당시 조선인)600여명을 데리고 왔다.

현지에 도착한 한국인들은 마샬군도에서 1차적으로 수조탱크공사에 착수했다.

이공석씨는 “공사에 앞서 대략 지역별로 가까운 거리에 있는 사람들끼리 편성이 돼 고향사람들이 많았다”며 “우리반에 반장님은 지금은 고인이 된 종달리의 양원종씨였다”며 그날의 일을 회고했다.

공사를 하는 1년 동안은 일본이 전쟁에서 큰 패배가 없었서 식생활이 종았지만, 1년 이 지난 후부터는 음식이 없어 ‘풀죽’으로 끼니를 때웠다고 한다.

이공석씨는 “1944년 풀죽을 끊이기 위해 토끼귀풀을 찾아 나섰다가 미군의 공습에 의해 목숨을 잃어 버릴 뻔 했다”며 “처음 숨으려고 선택했던 군 방공호는 군인들이 있어 들어가지 않고 산병호에 들어갔는데 군 방공호가 폭탄에 맞아 폭파당했으니 사람의 예감이란 이상한 것이다”며 당시의 아찔한 순간을 말했다.

산병호란 적전(敵前)에 흩어져 있는 병사들이 전투 시에 이용하기 위해 만든호를 말한다.

일본은 당시 군속에 대해서는 월급(당시 한화 1원 미만)도 준다고 하여 군속들을 모았다고 한다.

이에 이공석씨는 “월급은 한번도 받아 본적 없었다”고 말했다.
3년6개월을 복무한 후 일본의 패망으로 인해 이공석씨는 고국으로 다시 돌아올 수 있었다.

그러나 해방이 되고 시간이 흘러갔지만, 강제 동원되었던 이공석씨와 많은 피해자들은 아직까지 피해보상을 받지 못하고 있다.

한편 정부는 1975년부터 1977년까지 전국에 있는 태평양전쟁 희생자 8552명의 유족에게 1인당 30만원씩 총 25억6560만원을 보상했으나, 당시 제주도에는 유족회가 설립되지 않아 제주도내 상당수의 희생자 유족들은 보상을 받지 못한 것으로 나타났다.

그후 2001년에는 ‘역사의 뒤안길에서’라는 책을 집필했다.

이공석씨가 지은 ‘역사의 뒤안길에서(마샬군도 웟제섬에서의 구사일생.열림문학)’는 강제 동원되었던 한국인(당시 조선인)동지들과 3년6개월 동안 지냈던 일들을 상세히 기록하고 있다.

이공석씨는 “책을 쓰게 된 것은 유족회서 당시의 상황을 알고 싶다고 해서 있는 사실을 그대로 적어놨다”며 “우리 후손들에게 이런 일이 있었다는 것을 남겨주려고 집필했다”고 강조했다.

또한 “현지에서 사선을 해매이던 여러 동지들에 모습이 선하고, 운명을 하신 동지들에 명복을 빈다”는 말로 끝을 맺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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