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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7년에 울려퍼진 '진혼곡'..."이제야 와 미안하다"
57년에 울려퍼진 '진혼곡'..."이제야 와 미안하다"
  • 김정민 기자
  • 승인 2005.10.30 14:0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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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행취재] 4.3도민연대, 부산형무소(진주.마산) 수형 희생자 진혼제

2005년 10월 29일과 30일. 4.3이후 57년만에 경상남도 옛 진주.마산 형무소와 부산형무소에서 희생된 4.3영령들을 찾아나섰다.

4.3은 비단 제주만의 문제가 아니다.

정부기록보존소의 수형인명부는 형량 15년으로 된 희생자들이 대구형무소에 수감된 것으로 기록됐다.

그러나 희생자들은 한국전쟁 전후 부산형무소로 이감됐고 또 한국전쟁 발발과 함께 다시 부산형무소에서 마산과 진주 형무소 등으로 이감됐다.

제주4.3 진상규명과 명예회복을 위한 도민연대(공동대표 고상호 고창후 김평담 윤춘광 양동윤)는 '2005 전국 4.3유적지 순례 및 부산형무소 수형 희생자를 위한 진혼제'를 가졌다.

순례에 참가한 50여명은 29일 마산형무소와 진주형무소의 터를 찾아 영령들을 위로했고 30일 부산형무소 터에서 진혼제를 봉행했다.

현재 마산형무소는 주차장으로, 진주형무소와 부산형무소는 대형아파트 단지가 들어서 당시의 흔적은 하나도 찾아볼수 없었다.

진혼제에서 사회를 맡은 양동윤 4.3도민연대 공동대표는  "왜 죽어야 했는지, 어디서 죽었는지, 언제 죽었는지도 모른채 진혼제를 봉행하게 됐다"며 "영문도 모른채 끌려가 대구, 부산, 마산, 진주형무소를 전전하며 삶과 죽음의 길목에서 극적인 삶을 살다가신 영령들을 57년만에 찾아왔다"고 안타까워했다.

이어 양 대표는 "그러나 부산형무소 희생의 진상이 완전히 규명되지 않은 탓에 지금까지 밝혀진 제한된 희생자의 명단만을 모시고 진혼제를 올리게 됐다"며 "모시지 못하는 영령들께 죄송한 마음을 가눌길 없다"고 털어놨다.

주제사에 나선 김평남 4.3도민연대 공동대표는 "정든 고향, 부모형제, 이웃들고 생이별하고 듣도 보지도 못한 낯선 부산 그리고 마산이니 진주니 하는 곳으로 영문도 모른 채 끌려가고 또 끌려왔다"며 영령들의 억울함을 호소했다.

그러면서 김 대표는  "영령들이시여! 님들의 한을 풀고자 하는 후손들의 정성과 그 노력이 지속적으로 진행되고 있으니 섦다 마시고 이제랑 노여움을 푸시옵소서!"라며 영령들을 달랬다.

이번 전국 4.3유적지 순례에는 57년전 불법체포.불법구금.법재판에 의한 온갖 역경을 극복하고 살아남은 고봉원씨와 고윤섭씨가 참석했고 부산형무소에서 사랑하는 형님 양신석씨를 잃은 동생 양승길씨도 어려운 발걸음을 같이 했다.

부산형무소 터에 도착한 고봉원씨는 옛 생각이 돋아나는 듯 "나는 살아있어. 이제야 와서 미안하다"며 눈시울이 붉어졌고 양신석씨는 "형님 덕분에 모두 다 잘지내고 있다"며 눈물을 흘렸다.

한편 이번 진혼제에서는 결의문을 채택해 국회 통과를 앞둔 개정안이 하루빨리 통과될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나가기로 다짐하는 자리가 됐다.

 

<마산형무소 수형인 양신석씨 유족 양승길씨 인터뷰>

"형님! 형님 덕분에 모두 다 잘 지내고 있수다!"                               

9살이었던 양승길씨(남원읍 의귀리)는 부모님과 형 양신석씨와 함께 토벌대를 피해 한라산에서 생활을 하고 있었다.

형은 20대의 젊은 청년이었고 부모님은 이미 고령의 나이에 접어드는 시기였다. 형은 한 집안의 실질적인 가장 노릇을 하고 있었다.

추운 겨울을 한라산에서 보내고나서 그해 1월 살려준다는 삐라(전단)을 보고 양승길씨 가족은 전부 내려오게 된다.

가장이나 다름없던 그의 형은 부모님과 동생을 안전한 곳으로 먼저 보내고 자신은 뒷정리를 하려고 여기저기 뛰어다니고 있었던 것이다.

당시 그의 형에게게는 3살난 아이가 있었다. 그러나 아이는 그해 겨울을 견디지 못하고 결국 죽고 말았다.

"형님에 대한 기억은 그게 전부야."

한라산에서 내려오는 길에 형은 사라져버렸고 그 이후 형에 대한 소식을 접할수 없었다.

그러던중 양승길씨가 혼인신고를 하려고 문서를 작성하다보니 형이 마산형무소에서 죽은 사실을 알게됐다. 그제서야 형님이 죽었다는 사실을 알게된 양승길씨는 너무 마음이 아팠다.

한라산에서 내려와 형이 죽었는지 살았는지도 모른채 생활을 하던중 그의 형수는 그제서야 자신이 임신중이라는 사실을 뒤늦게 알게된것이다.

노심초사 생활을 하면서 무거운 몸을 움직이며 생활하던 그의 형수는 태흥리 주둔군(양승길씨의 증언에 따르면)에 의해 세상 빛을 보지도 못한 아이와 함께 목숨을 잃었다.

29일 마산형무소를 찾은 양승길씨는 다른 증언자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며 형의 어려웠던 생활을 가늠해봤다.

마산형무소는 당시의 모습은 전혀 찾아볼수 없게 변해 있었다. 주차장으로 쓰이고 있는 마산형무소의 터를 둘러보며 양승길씨는 어떻게 생활을 했는지, 밥은 잘 먹었는지, 혹시 묘를 찾을수는 있는지 등등 마산형무소 수형인이었던 고봉원씨에게 물어봤다.

결국 30일 진혼제에서 양승길씨는 당시의 설움을 참지못하고 눈물을 보였다.

"형님! 형님 덕분에 우리 아이 대학까지 잘 보내고 모두들 다 잘 지내고 있수다"

그러면서 양승길씨는 불러도 불러도 대답없는 형을 연신 불러댔다.

"그들을 위해 아무일도 못했어....."

일본에서 생활을 하던 고윤섭씨 가족은 해방이후에 고향인 제주에 돌아왔다. 이후 1947년까지는 아주 행복하고 건강한 생활을 하게된다. 그에게 있어 가장 행복한 짧은 순간이었다

1948년 12월 중산간지역을 소탕하려는 대대적인 작전에 의해 그의 부모는 삼양에서 그의 형제와 친적 등은 봉개동에서 움박을 짓고 따로따로 살게된다.

1949년 1월 중산간작전에 의해 봉개, 용강, 회천 등지에 군경들이 들이닥쳤다. 그때 고 씨는 총에 맞고 쓰러져 오름등지에서 굴러떨어졌다. 그러나 구사일생으로 마을사람들의 도움에 의해 대나오름 굴에서 생활하게 된다.

그러다 하산을 권유하는 꾀에 넘어가 산에서 내려오게 되고 아무런 이유도 모른채 헌병대로 끌려가 조사를 받고 무혐의 처분을 받았다.

그러다 제주경찰서로 이송돼고 유치장생활을 하다 광주지방법원에서 7년형을 선고받는다.

"나는 아무런 죄도 없어. 너무 억울해서 항소까지 했지."

조사를 받을 당시 고씨는 심하게 윽박지르는 군경들때문에 정신을 차리지 못한채 그들의 물음에 대답을 했다고 한다.

그는 처음 대구형무소에 이감된다. 그러나 전쟁이 발발하고  사정이 어려워지자 다시 부산형무소로내려가게 된다. 거기서 그는 또 대구형무소로 진주형무소로 이감되는 고난을 겪는다.

당시 부산형무소의 제주출신 수형인은 255여명으로 전쟁을 거치며 살아남은 그들은 162명이고 마산형무소와 진주형무소 등으로 이감됐다.

그는  1956년에 출소한다.

그는 30일 진혼제에서 "현재 4.3특별법에 의하면 수형인은 전혀 포함이 안된 상황"이라며 "어쩌면 가장 큰 불행을 겪고 있는지도 모르겠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그는 아무런 죄없이 수형인 생활을 하게됐다며 "수형인들을 위한 법률이 하루빨리 제정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출감한 이후 생활이 안정되면서 그는 제주에서 한다하는 자리를 잡고 생활을 하면서 줄곧 정치활동에 열중했다.

그러나 그는 출소이후에도 4.3으로 인해 죽은 사람들을 위해 헌신하지 못했다. 당시 여건상 쉽게 일을 벌이지는 못할 처지였다.

그들을 위해서 아무일도 못했다며 아쉬워하는 그는 어떤 죄책감에 의해 더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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