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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억울하게 희생된 분들을 모독하지 마세요!"
"억울하게 희생된 분들을 모독하지 마세요!"
  • 김두영 기자
  • 승인 2009.04.06 09:2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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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피플] 고윤섭 할아버지의 '끝나지 않은 4.3'

한국 근현대사의 가장 비극적인 사건으로 불리우는 4.3. 2003년 4.3에 대한 정부 진상조사보고서가 발간되고, 이어 국가공권력의 잘못을 인정하는 대통령의 사과가 있었다.

반세기가 지나서야 4.3은 역사의 양지로 나왔으나, 아직도 4.3은 끝나지 않았다. 역사적 평가를 되돌리려는 보수우익단체의 끊임없는 책동. 또 진상조사의 미완성.

이런 흐름 속에서, 당시 4.3의 소용돌이 속에서 죽을 고비에서 살아났던 수형생존인에게 있어 4.3은 끝나지 않은, 지금도 시간의 연속선상에 놓여있다. 그들에게 4.3은 아직도 무엇 하나 속시원히 풀리지 않은 미완의 과제다.

4.3당시 제주시 봉개동에 살았던 고윤섭 할아버지(83). 그는 4.3 당시 부상을 입어 혼자서는 거동조차 하기 힘든 불편한 몸으로 지금까지 힘겨운 나날을 보내고 있다. 최근에는 호흡에 까지 이상이 생겨 산소호흡기를 하지 않으면 숨쉬기 조차 힘든 실정이다.

그나마 의지했던 휠체어도, 최근 그의 집 앞을 움푹 파놓은 도로공사로 인해 바깥출입을 도와주지는 못하고 있다.

4.3 당시 죽을 뻔한 고비를 넘겼지만 그 때 입은 상처로 인해 평생을 힘들게 살아오고 있는 고 할아버지. 그에게 4.3은 무엇이었을까. 지난 2005년 제주4.3연구소의 '4.3증언'에서 그는 어렵게 입을 열었다.

#"아직 덜 죽은 사람은 확인 사살하라"

제주시 봉개동에 거주하며 농사를 하며 살던중 4.3사건을 겪었다. 1948년 음력 10월20일 봉개리가 소개되면서 모든 집이 불타 버렸다. 부모님은 해안마을로 피난갔지만 대다수 젊은이들과 많은 주민들은 불타버린 집을 의지해 움막을 짓고 하루하루 살고 있었다.

하루가 멀다하고 토벌대는 마을로 들이닥쳤고, 그때마다 죽기살기로 도망다니는 험한 생활의 연속이었다. 이 와중에 동생 고윤병은 1948년 12월 토벌대에 쪽기다 토벌대의 총에 즉사했다.

1949년 음력 1월7일, 이른바 '동부8리 작전'이 있던 날이다. 이날 오전 7시39분쯤 사방에서 총소리가 나고 동네사람들이 "빨리 도망가라. 군인들이 올라오고 있다. 여기 있다간 생죽음을 당한다"며 피난을 가고 있었다. 그와 큰형도 무조건 도망갔다. 현재 산업도로 쪽에 '연못'이라는 곳까지 함께 도망가다 사람들이 뿔뿔이 흩어지는데 그는 이왕이면 사람이 많은 쪽으로 뛰었다.

그런데 형님은 칠오름 쪽으로 도망가다 현장에서 즉사했다. 그는 '소낭굴' 쪽으로 뛰었는데 100여명 정도가 같이 도망을 갔다. 그런데 그곳에 매복해 있던 군인 50여명이 일제 사격을 가해 그 현장에서 70~80명이 사살됐다. 사망자 대부분이 여자들이었다. 그는 다리와 허벅지에 총상을 입고 언덕 아래로 굴렀는데 산소를 둘러싼 산소 모퉁이에 처박혔다.

10분쯤 후에 "아직 덜 죽은 사람은 확인 사살하라"는 군인들의 소리가 들리면서 총소리가 났다. 피가 계속 나고 추운날씨에도 저녁까지 참고 기다리다가 조용해지니까 근처 움막으로 몸을 피했다.

#"10여일간 모진 고문 당하다가, 총상 입은 몸으로 수형생활을..."

부상당한 몸으로 몇 달간 '대나오름' 인근 동굴에서 피난생활을 하던 중 군인에게 발각됐다. 당시는 귀순공

작이 한창일때라 헌병대에서 조사를 받았지만 별다른 혐의가 없었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감찰청으로 이송돼 10여일간 모진 고문을 당했는데, 그렇게 1년정도를 유치장에 수감됐다가 광주지방법원에서 1950년 2월에 재판을 받아 7년형을 언도받았다.

"경찰에 끌려가 고문도 많이 받았지 그리고 나서 재판을 받기 위해 광주로 가서 7년형을 선고받았고, 그 후 억울한 마음에 항소도 했지만 또 한국전쟁이 발발하면서 재판도 못받고 대구, 부산 등지로 이리저리 옮겨다니다 1956년 7월에 형을 다 채우고 출소 했어."

총상을 입은 상태로 수형생활을 해야 했기에 그의 괴로움은 더욱 컸다. 고 할아버지는 당시 입은 총상을 보여주었다. 그의 다리에는 정강이 한 가운데에는 흉칙한 총상이 자리잡고 있었다.

출소를 한 후에도 그의 삶은 그리 순탄치 않았다. 출소를 했으니 일을 해서 먹고 살아야 했지만 4.3 당시 입은 부상으로 인해 걸을 수 조차 없었던 그는 변변한 일자리 조차 구할 수 없었다.

"출소 후에는 일을 해보려고 해도 몸이 움직여야 일을 하지 결국 아내가 일해오는 품삯과 부모님이 남겨주신 재산으로 근근히 버텨왔지만 살기 힘든 건 어쩔 수 없더라고."

#"연좌제라는 것이 있어서 자식들에게도 많은 피해를 줬지"

그의 집은 4.3 사건 전만해도 봉개지역에서 제법 재력이 있던 집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고 할아버지가 그렇게 부상을 당하고 일을 하지 못해 지금은 작은 집 안에서 당시는 상당히 추운날씨였는데도 불구하고 난방을 하지 않고 작은 전기담요 하나로 그와 그의 부인이 추위를 이겨내고 있었다.

자녀들과 함께 생활하는 과정에서는 '연좌제'라는 사슬이 항상 그의 가족을 동여매고 있었다.

"내가 4.3 당시 경찰에 끌려가고 유죄판결을 받아서 자식들한테도 피해를 많이 줬지. 연좌제라는 것이 있어서 우리 자식들에게도 감시를 붙였더라고. 그리고 내가 일을 못하니까 집안에 돈이 있나 뭐가 있나 결국 자식들한테 공부도 제대로 못시키고 말이야. 결국 4.3 때문에 입은 피해가 지금도 계속 되고 있는 거야."

고 할아버지는 "4.3의 고통이 자신 뿐만이 아니라 자식들에게 까지 대물림되는 것 같다"며 "자식들에게는 그저 미안할 따름"이라고 말하며 눈시울을 적셨다.

그래도 지금은 지난해보다 조금 나아진 상황이라고 했다. 제주시에서 올해 고 할아버지를 기초생활수급자로 분류해 현재 시에서 생활보조금이 나오고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야말로 조금 나아졌을 뿐 크게 바뀐 것은 없다고 말했다.

#"정말 억울하게 죽은 사람들이야. 그들을 모독해서는 안돼요"

'폭도'라는 말이 아직도 나오고, 4.3희생자 결정을 부정하려는 시도, 4.3위원회 폐지 등 최근 일련의 상황과 관련해서도 그는 울분을 감추지 못했다.

"4.3은 아직도 끝나지 않은 사건이고 이로 인해 죽은 사람이 너무 많아서 세기도 힘든데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 있어요? 4.3때 죽은 사람들 대부분이 정말 억울하게 죽은 사람들이야."

4.3희생자들을 모독하는 일은 절대 안된다고 목소리를 높이던 고 할아버지는, 너무 흥분한 나머지 호흡이 힘들어 숨을 몰아쉬고 기침을 해댔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 말을 이어갔다.

"4.3 희생자의 모독은 절대 있어선 안돼고 실상을 빨리 파악하고 4.3에 대한 진상을 밝혀야 합니다."

4.3이 어느덧 반세기를 지나, 지난 3일 61주년 위령제가 봉행됐지만, 고 할아버지에게 있어 4.3은 '끝나지 않은 세월'이다. <미디어제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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