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편집 2024-03-29 00:04 (금)
4.3유적지 복원. 집단매장지 유해발굴 '탄력'
4.3유적지 복원. 집단매장지 유해발굴 '탄력'
  • 윤철수 기자
  • 승인 2005.09.01 17:05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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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창일 의원, "정부 내년 예산에 사업비 30억원 반영"

4.3 유적지 복원 및 집단 매장지 발굴사업에 대한 정부예산이 반영되면서 이의 사업이 탄력을 받을 전망이다.

강창일(열린우리당, 제주시.북제주군갑) 국회의원은 1일 행정자치부 및 기획예산처와의 예산협의를 통해 ‘제주4.3사건 유적지 복원 및 집단매장지 유해발굴 사업비’ 30억원을 내년도 정부예산안에 반영키로 했다고 밝혔다.

현재 이 사업은 올해부터 2009년까지 국비 161억4000만원과 도비 7억1000만원 등 총 168억5000만원을 투입해 주요 4.3유적 18개소에 대한 복원 및 집단매장지를 발굴할 계획으로 추진되고 있다.

유적지별로는 북제주군 조천읍 낙선동성 복원정비에 11억 5천만원, 남제주군 섯알오름 학살터 복원정비에 3억 5천만원, 희생터인 북제주군 북촌 너분숭이 복원정비에 5억원, 제주시 별도봉 진지동굴을 비롯한 4.3 집단매장지 5개소 유해발굴에 10억원 등 총 30억원이 투입된다.

특히 이 사업은 강창일의원이 올해 제57주기 4.3위령제에 참석한 이해찬 국무총리에게 직접 국비 지원을 건의하자 흔쾌히 받아들여 성사되기에 이르렀다.

향후 이 사업이 완료되면 4.3유적지에 대한 보존과 진상규명사업이 더욱 더 활기를 띠고, 4.3의 역사성, 진실성 확보와 후세대에 대한 역사 및 인권교육장으로서 역할을 할 것으로 기대된다.

 

 

‘제주4.3사건 유적지 복원 및 집단매장지 유해발굴 사업’ 내용

1. 4.3집단매장지 5개소 유해발굴

  1) 별도봉 진지동굴
   - 제주시 화북 1동 일대
   - 일제시대 만들어진 진지동굴이 4․3 당시 집단학살 장소로 이용됐음
   - 이 굴의 경우 세칭 ‘9연대 숙청사건’의 학살장소로, 9연대 출신 2-30여명이 집단 총살돼 매장돼 있는 것으로 추정됨
   - 당시 총살 현장에서 살아남은 생존자와 지역 주민의 증언을 통해 일치하는 지점을 확보한 상태. 다른 지역보다 매장상태가 양호한 것으로 판단됨

  2) 가릿당 동산
   - 제주시 화북 1동 일대
   - 4.3 당시 군인들에 의해 수 십 여명이 집단 총살돼, 암매장된 곳
   - 당시 목격자들이 지적한 지점에 다소 차이가 있지만, 그 범위가 5-10m 반경에 지나지 않아, 매장된 시신이 있을 것으로 추정
  
  3) 별도봉 냇가밭
   - 제주시 화북 1동 일대
   - 4.3 당시 총살된 시신을 이 곳 별도천 인근의 밭에 암매장
   - 지역 주민들은 약 4-5의 묘가 있었던 것으로 증언함
   - 최근, 하천 복개 공사로 인해, 암매장된 지역 위로 약 1.5-2m 정도가 퇴적    

  4) 동제원 입구
   - 제주시 화북 1동 4658-2번지
   - 1948년 12월 제 1차 군법회의에서 사형 집행받은 39명의 총살 현장으로 추정되고 있음. 일부는 시신을 수습하였지만, 아직도 현장에는 매장된 시신이 상당수 있는 것으로 추정.
   - 당시 시체 수습을 했던 유족을 동행하여 현장조사한 상태. 그러나, 지역 주민들은 암매장 여부에 대해 의문 제기. 현재, 39명의 유가족들로부터 시체 수습 여부 확인 중.

  5) 고우니모루 저수지
   - 4.3 당시 화북리 주민들이 몇 차례 걸쳐 집단 학살된 곳.
   - 증언에 따르면, 이곳 저수지에 상당히 많은 사람들이 희생되어 그 시체를 건질 때는 기다란 장대에 갈쿠리를 달아 저수지 바닥을 휘저으면서 시체를 꺼냈다고 함
   - 현재, 저수지는 그대로 남아 있는 상태.

2. 조천읍 낙선동성 복원정비

가. 소재지
북제주군 조천읍 선흘리 2734번지 일대

나. 개요
1948년 11월 20일 선흘리가 초토화작전으로 불타버리자 마을 주민들은 인근 선흘곶의 자연동굴이나 들판에 움막을 짓고 살았다. 그러나 은신했던 굴이 잇따라 발각되면서 많은 희생을 치르게 된다. 미리 해변마을로 소개 내려간 주민이나 나중에 야산에 은신했다가 붙들려 온 주민들 중에도 도피자가족 등의 갖은 이유로 희생을 당한다. 그런 세월을 딛고 살아남은 주민들이 1949년 봄이 되자 낙선동에 성을 쌓고 집단 거주했다. 
성의 규모는 대략 가로 150m, 세로 100m, 높이 3m, 폭 1m로 총 500여m의 직사각형 모형이었다. 성밖으로 너비 2m, 깊이 2m 정도의 도랑을 파서 가시덤불을 놓아 폭도의 침입을 막으려했다
1949년 4월 성이 완공되자 선흘리 주민들은 겨우 들어가 잠만 잘 수 있는 함바집을 짓고 집단적으로 살았다. 일종의 수용소나 마찬가지였다. 성밖 출입도 통행증을 받아야 가능했고 밤에는 통행금지였다. 이 당시 마을 주민 중 젊은 남자들은 무장대 동조세력이나 도피자가족으로 몰려 이미 많은 희생을 치른 상태였다. 그나마 살아남은 청년들은 1950년 발발한 6․25 때 대부분 자원입대 했기 때문에 성을 지키는 보초는 16살 이상의 여성과 노약자의 몫이었다. 그들은 낮엔 밭에서 일하고 밤엔 성을 지키는 고단한 생활을 이어갔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경찰파견소 주둔 경찰의 먹을거리를 마련하느라 고초를 겪었다.
선흘리 주민들은 1956년 통행 제한이 풀리면서 비로소 원래 마을이 있었던 자리에 집을 지어 살았고, 일부는 그냥 성안에 정착해 오늘날의 낙선동을 이루고 있다.

다. 현황
당시 제주 지역 마을마다 쌓은 석성은 대부분 밭담이나 산담을 이용했기 때문에 통행제한이 풀린 1954년을 기점으로 대부분 원상회복 되거나, 이후 개발의 과정 속에 사라졌다. 그러나 낙선동 성터는 주변 감귤원의 방풍림 역할을 해 지금까지 잘 보존돼 있는 것이다.
지금도 과수원의 진입로를 만들기 위해 일부를 헐어버리는 등 언제까지 원형이 남아있을지 장담하지 못하는 상황이다.

    - 4.3성 중 대표적인 곳으로 성곽이 가장 잘 남아있음.
    - 현황 : 성 내부 4,500여 평
               외부 5,500여 평 등 1만여 평은 과수원
               가옥 20여 채
    복원방향 - 성곽 원형 복구
             - 소개 후 마을 재건 당시 축성의 고통과 생활의 어려움 재현
             - 당시 학교건물이었던 초가는 복원하여 기념공간으로 활용
             - 기타 부대시설(주차장 및 편의시설)

3. 섯알오름 학살터 복원정비

가. 소재지
남제주군 대정읍 상모리 1592-2, 1597-2번지 일대

나. 개요
섯알오름 폭탄고터는 섯알오름에 대규모의 굴을 파고 일제시대 일본해군소속 항공대의 비행기폭탄을 저장했던 곳이다. 일제가 패망하면서 폭탄고를 폭파했고, 굴이 패였던 곳은 웅덩이가 되었다.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이 발발한 후 전국적으로 보도연맹원들을 학살할 때, 모슬포를 중심한 제주도 서부지역의 예비검속자 195명을 학살한 장소이다.
당시 정부는 북한군이 6월 28일 서울을 점령한 후 수도를 대전을 거쳐 대구로 그리고 8월 18일에는 부산으로 옮기는 등 계속 수세에 몰려 있었다. 이런 와중에서 육군본부 정보국 제4과(CIC) 김창룡(당시 대령) 과장은 예비검속자 중 C, D급에 해당되는 검거자를 처형하도록 지시했다. 당시 모슬포경찰서 관내에서는 347명이 구금되어 있었다. 그 중 60명은 1950년 7월 16일 군에 인계되어 집단학살됐고(장소 미상, 경찰 자료), 또한 동년 8월 20일(음 7월 7일) 새벽 2시에는 63명(한림어업창고 및 무릉지서 구금자)이, 그리고 새벽 5시경에는 132명(모슬포 절간고구마창고 구금자)이 계엄사령부의 지시에 따라 모슬포 주둔 해병 제3대대(대대장 김윤근 소령)에 의해 송악산 섯알오름 자락의 옛 일본군 폭탄고터에서 집단학살됐다.
이 때 희생된 사람들은 당시 모슬포 경찰서 관내(현재 한림읍, 대정읍, 한경면, 안덕면)에 거주하던 농민, 마을유지, 교육자, 공무원, 우익단체장, 학생들이었다.

다. 현황
현재 이곳은 2001년 2월, 유족들이 희생자 시신과 유물들을 재발굴하면서 그 전에 일부 메워졌던 현장을 모두 파헤쳐 놓아 큰 구덩이가 형성되어 있다.

          - 195명이 집단학살된 학살현장.
          - 학살 이후 시신방치와 발굴과정 등에 나타난 고난의 상징성
          - 일제시대 폭탄고터의 역사성
          - 백조일손지지 등 관련 유적과의 연관성.
          - 규모 : 섯알오름 내부 500여 평.
                            인근 토지 2,000여 평
            * 현 국방부(공군) 소유 토지

4 . 희생터 북촌 너분숭이 복원정비

가. 소재지
북제주군 조천읍 북촌리 1179-1번지 일대

나. 개요
1949년 1월 17일 함덕주둔 2연대 3대대 군인들에 의해 북촌국민학교 운동장에 집결한 북촌리민들은 50˜100여명 단위로 끌려나갔다. 먼저 학교 동쪽 당팟쪽에서 총소리가 났다. 그리고 서쪽 너분숭이 일대로 주민들을 끌고온 군인들은 탯질, 개수왓 등지에서 주민들을 집단총살했다. 그 일대는 마치 무를 뽑아 널어놓은 것 같이 시체들이 널브러져 있었다. 학살에서 살아남은 부녀자 등 일부 주민들이 시신을 수습하기에도 오랜 시간이 필요했다. 어른들의 시신은 임시매장했다가 사태가 안정된 후 안장되기도 했으나 당시 어린아이와 무연고자 등은 임시 매장한 상태로 지금까지 그대로 남아있다. 그곳이 지금의 너분숭이 소공원이다. 
북촌 주민들이 밭일을 하다가 돌아올 때 쉬어가던 넓은 팡이 있어서 ‘너분숭이’라 불리는 이곳에는 애기무덤 20여기가 군락을 형성해 있어 4.3 당시 참혹했던 북촌대학살을 증언하고 있다.

다. 현황
이곳은 4.3 이전부터도 어린아기가 병에 걸려 죽으면 묻던 곳이라 한다. 지금까지  소나무와 가시덤불이 무성하여 무덤이 드러나지 않았다가 2001년 북제주군 소공원 조성사업으로 부지가 정리되면서 드러나게 된 것이다. 지금 현재 이곳에는 20여기의 애기무덤이 모여있고 그 옆 밭과 길 건너에도 몇 기의 애기무덤이 있다. 그중 적어도 3기 이상은 북촌대학살 당시 희생된 어린아이의 무덤이다.
이 곳의 모든 무덤들이 4․3 희생자의 무덤은 아니지만 당시 상태로 보존되어 있다. 또한 잔디나 변변한 장식도 없이 초라하게 자리하고 있어서 당시의 참혹하고 무모한 학살을 알려주기에는 더 없이 소중한 공간이다. 따라서 어설프게 무덤을 치장하거나 양지로 이장하는 성역화보다는 지금 현재의 상태로 과거의 아픈 역사를 반추하는 역사교육의 장으로 활용할 방도를 찾아야 할 것이다.

          - 4.3 당시 가장 인명피해가 컸던 마을
          - 소설 ‘순이삼촌’ 등으로 많이 알려짐
          - 북촌리 주민들의 위령 및 기념공원 건설 추진 의지
          - 규  모 : 너분숭이 주변 대상토지 3,000여 평 매입
          - 기념 공간 조성

<자료제공=강창일 국회의원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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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나다라 2005-09-02 00:39:44
오늘부터 정기국회 시작됐으니까, 내년 예산 얘기 많이 나올겁니다.
반영된겁니까, 반영시키려고 노력할겁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