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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점]4.3당시 제주인 281명 일본 집단 밀입국
[초점]4.3당시 제주인 281명 일본 집단 밀입국
  • 김정민 기자
  • 승인 2005.08.24 12:4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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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트레일리아 문서기록보관소서 발견된 4.3관련 문건서 확인

오스트레일리아 문서기록보관소에 소장돼 있는 제주 4.3 관련 문건이 발견됐다.

특히 이번에 발견된 자료에서는 1948년 당시 일본 에히메현 니시우와군 카와노이시 항구를 통해 제주인 281명이 밀입국했다는 기록이 확인돼 관심을 끌고 있다.

24일 제주4.3연구소(소장 이규배)는 지난 6월 제주도를 방문했던 오스트레일리아 국립대 모리스 스즈(Morris-Suzuki) 교수로부터 최근 이 문서들을 입수했다고 밝혔다.

#4종 4.3관련 문건 입수

이번에 입수된 문건은 총 5건인데, 1948년 10월 25일 영연방점령군 작성 문서, 유엔한국통일부흥위원회오스트레일리아대표가제주도를시찰한뒤1957년8월본국외무성으로보낸문서, 1950년 1월 27일 유엔한국통일부흥위원회 오스트레일리아 대표가 외무성에 보낸 문서, 1948년 7-8월 남조선 과도정부 활동 발췌한 뉴욕 헤럴드 트리뷴지 1948년 4월 29일자 등이다.

#1948년 일본 카와노이시항 밀입국 한국인 중 제주인 281명

이중 영연방점령군 작성 문서에는 당시 일본에 주둔했던 영연방점령군에 의해 일본에 밀입국한 제주도민의 인적사항과 직업, 밀입국 목적 등이 자세하게 기록돼 있다.

영연방점령군은 오스트레일리아, 영국, 인도, 뉴질랜드 등으로 구성된 영연방군으로서, 주일미군이 일본의 군정을 담당한 반면, 영연방점령군은 1946년 2월 21일부터 1952년까지 일본군의 비무장화, 일본 군수산업시설의 해체 등을 감시한 것으로 전해졌다.

자료에 따르면 1948년 6~8월 사이 일본 에히메현 니시우와군 카와노이시 항구를 통한 한국인들의 밀입국 건수는 총 7건의 290명으로, 이들 가운데 다른 지방 출신이거나 출신이 불분명한 경우를 제외한 제주 출신자는 총 281명인 것으로 나타났다.

그 중 남자는 115명, 여자는 75명이고, 20살 미만의 청소년들과 유아들도 68명인 것으로 나타났다. 직업은 농업이 가장 많고, 학생, 노동자, 공무원 등 다양하게 분포한 것으로 나타났다.

지역별로는 한림 196명, 애월 37명, 대정 25명, 안덕 18명, 제주읍 4명, 중문 1명, 기타 9명 등이다.

제주4.3연구소 오승국 사무처장은 "당시 제주 출신 밀입국자 281명이 4·3의 탄압을 피하거나 일자리를 구하기 위해 일본으로 밀입국한 것으로 판단한다"고 말했다.

#미군 모슬봉 레이더기지서 상하이공항까지 감시

이와함께 두번째 문서는 유엔한국통일부흥위원회 오스트레일리아 대표가 제주도를 시찰한 뒤 1957년 8월 본국 외무성으로 보낸 문서는 오스트레일리아 대표를 대리한 Ashwin이 주한 서독 총영사 Richard Hertz와 1957년 7월 16일부터 21일까지 제주도를 방문한 뒤 작성된 문서다.

이 문서에는“혹자는 1950년의 제주도를 제2의 대만화가 되고 있었다고 회상할 수도 있다”, “제주도에서 중요한 것은 제헌의회 선거 기간과 그 이후의 48년과 51~55년의 간헐적인 시기로, 정부가 정치 소요와 반란을 진압하기 위한 수단을 채택하였던 것”, “많은 주민들이 게릴라들을 은닉하거나 지원해준 혐의로 사살되었으며, 도민들은 이를 잊지 않고 있고, 잊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와 같은 내용이 기록돼 있다.

문서에서는 또 육군 180명, 해군 120명, 공군 20명, 미 공군 170명 등 1957년 당시 제주도에 주둔했던 군 병력 규모를 밝히고 있다.

이와함께“상당히 전략적인 관심사항은 제주도가 중국 상하이로부터 270마일(에어 마일)밖에 떨어지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중일전쟁 기간에 중국 대륙 폭격을 위한 일본군 기지로 사용됐으며, 미군은 모슬봉에 레이더기지를 운용하고 있는데, 한반도 해안을 커버한다”, “미군은 이 레이더기지가 상하이 공항까지 감시할 수 있다고 알려주었다”라는 내용이 수록돼 있다.

문서에는 군 병력 규모 외에도 당시 제주도의 실상을 기록하고 있는데, “제주도 가축사육두수 및 어선수가 1957년 현재 소 3만2천마리(한국전쟁 초기에 비해 많이 불어났으나, 1948년 4.3사건 당시 수준에는 여전히 미치지 못한다), 어선 수는 450척(동력선 100척도 안됨)”으로 밝히고 있다.

1950년 1월 27일 유엔한국통일부흥위원회 오스트레일리아 대표가 외무성에 보낸 문서에는 “1951년 1월 19일 현재 피난민 4만4040명, 한국 육군 1만7천명, 한국 해군 800명, 한국 공군 2천명”으로 기록돼 있다.

#"판사들이 재판 두려워한다"

1948년 7-8월 남조선 과도정부 활동 발췌 문서는 이미 발견된 자료인데, 문서에는“한국인 법정관련 - 제주도 폭동 사건 관련 250명이 경찰 유치장에 수감돼 있다. 판사들이 재판을 두려워한다"는 내용이 기록돼 있다.

뉴욕 헤럴드 트리뷴(New-York Herald Tribune) 지 1948년 4월 29일자 문서에는 오스트레일리아 멜보른 출신의 오스틴 스위니 신부와 도네갈 에이레의 패특릭 도우손 신부의 말을 인용해 “경찰의 야만성이 4․3사건의 주요 원인이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들 신부들은 콜롬반 외방선교회 소속으로 제주도에 12~14년 동안 살았으며, 일제에 투옥된 경험을 갖고 있다.

# "경찰 야만성.우익단체 테러가 4.3원인"

스위니 신부는 제주도를 방문한 외신기자에게 “모든 이러한 소요의 유형이 러시아식 유형이지만, 경찰이 좌익을 만들어내고 있다”, “당신이 경찰에게 맞는다면, 당신은 자연히 폭도로 규정된다”고 밝히고 있다. 이들 신부들은 또 다른 지방에서 파견된 경찰이 일제 때 경찰보다 더 나쁘다고 말했다.

기사는 “딘 군정장관과 제6사단장 올랜도 워드 소장이 29일 제주도 하루 일정으로 방문했다. 딘은 외신기자에게 경찰의 야만성과 우익정치단체의 테러가 사실상 4.3의 원인이지만 공산당이 활동하는 부분도 과소평가 되어서는 안된다”는 내용을 밝히고 있다.

기사는 또 “이들 장군은 경비행기를 이용해 경비대가 마을을 포위하고 조사하기 위해 18살 이상의 모든 남성들을 체포하는 무장대들의 산악요새를 시찰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4.3 진상규명에 의미있는 자료"

제주4.3연구소의 오승국 사무처장은 "그동안 제주 4.3과 관련한 국외 자료는 미국립문서기록보존소에서 입수한 것이 사실상 전부였다"며 "때문에 이번 오스트레일리아 문서기록보관소에서 발견된 제주 4.3관련 자료는 큰 의미를 갖고 있다"고 설명했다.

그는 또 "제주 4.3 당시 유엔위원단 일원으로 한국에 왔던 캐나다와 영국 등의 국가 문서보관소에도 이와 유사한 문서들이 소장돼 있을 것으로 판단한다"며 "이번 문서 입수를 계기로 제주 4.3과 관련한 해외 자료의 발굴 등 진상규명 노력이 지속되어야 한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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