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편집 2024-03-29 17:33 (금)
"믿음이 있다면 언젠간 진실은 밝혀집니다"
"믿음이 있다면 언젠간 진실은 밝혀집니다"
  • 박소정 기자
  • 승인 2008.07.05 09:29
  • 댓글 2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뉴스&피플] '조작간첩' 무죄 강희철씨의 못다한 이야기

갔다오지 않았다는 이유로 일본에 갈수 없게 됐다.

어린시절 가족과 오랫동안 떨어져 있던 그는 가족에 대한 그리움과 외로움에 일본에 꼭 가야만했다. 그 방법으로 그는 일본 밀항을 통해 가족과 다시 만나게 됐다.

"어린시절, 가족과 오랫동안 떨어져 있어 항상 가족에 대한 그리움과 외로움이 마음 속에 자리잡고 있었어요. 제주도에 남았던 형과 동생들도 부모님이 있는 일본으로 가면 저 혼자 남아있어야 하기 때문에 무슨 방법을 동원해서라도 부모님 곁에 가야겠다는 생각에 밀항을 선택을 했죠!"

한국에서 중학교를 졸업한 그는 고등학교에 입학하려했지만 영주권이 없었기 때문에 학교다니기가 어려웠다. 당시 조총련 계열인 대판조선고급학교에서 교사로 있던 큰 아버지의 도움으로 학교에 다니게 됐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에 들어가려 했으나, 역시 영주권이 없어 입학을 하지 못했다.

그래서 그는 대학을 포기하고 아버지가 운영하는 신발공장에서 일을 돕기 시작했다.

#"갑자기 자전거 타이어가 펑크났는데, 일본 경찰이 다가오더라구요"

1981년 어느 주말 밤이었다. 부모로부터 독립해 집을 구해 살고 있던 그는 부모님 집에서 저녁을 먹고 그의 집으로 자전거를 타고 돌아오던 중, 갑자기 자전거 앞 바퀴 타이어가 터져 다시 부모님 집으로 돌아가 어머니의 자전거를 타고 다시 집으로 향하던 길이었다.

그는 어디선가 자신을 부르는 소리가 들렀다고 했다. 바로 일본 경찰 2명이 그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점점 가까이 다가온 경찰은 그에게 다가와 '고향이 어디냐'고 물어봤다.

제주도 사람은 일본 말을 할 때, 오키나와 지역 억양과 비슷하기 때문에 오사카 출신이라고 하면 들통이 날꺼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오키나와에서 오사카로 이사를 왔다고 경찰에게 대답했다.

그는 경찰이 두렵거나 무섭지 않았다. 왜냐하면 경찰에게 걸리면 영주권을 받을 수 있다는 부모님의 말을 믿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경찰은 계속 신분증을 확인해야겠다고 했고 그러다가 불법 입국 사실이 적발돼 다시 한국으로 강제 소환당했다.

#"이 세상에 태어나서 그때가 가장 행복했어요"

"한국에 다시 돌아오면 조총련 학교 나왔다는 이유로 고초를 겪는다는 걸 어느정도 예상은 했어요. 시대가 시대인 만큼 동네사람들이 일본에 갔다오면 간첩으로 오해받는 경우가 많았어요. 큰아버지가 조총련 교사였고 저도 관련 학교를 다녔으니 뻔한 일이죠"

한국에 도착한 후, 그는 바로 부산보안대 전경내무반 지하실에 수용됐다. 3일 동안 전기고문, 구타 등을 당한 그. 다행히 무혐의 처리가 내려져 고향인 제주로 내려왔고 홀가분한 마음으로 직장생활을 하게 됐다.

직장생활을 하다, 첫 번째 부인을 만나 결혼을 하게 됐다. 당시에 서로 벌어놓은 돈이 없었고 부모들도 사정이 어려웠기 때문에 일단 혼인신고부터 하기로 했다. 결혼식은 나중에 같이 돈을 벌어서 올리기로 하고 사진관에 가서 사진 한장을 찍고 결혼생활을 시작했다.

"이 세상에 태어나서 그때가 가장 행복했습니다..."

행복했다. 외로운 그에게 가족이 생겼다는 그 자체만으로 그는 행복했다. 결혼생활 7개월 이 지나고 아내의 출산일이 15일 정도 남아있을 무렵, 어느 누구도 부럽지 않은 이 가정에 불행이 닥쳐왔다.

#"조사 도중 경찰로부터 아들이 태어났다는 얘기 들었어요"

1986년 4월 28일. 그는 그날을 잊을 수 없다. 부인과 아침을 먹으려고 하는데 갑자기 경찰 2명이 집 안으로 들어왔다. 경찰관이 나를 밖으로 유인하려고 하자, 만삭인 부인이 이를 막았다. 혹시나 만삭인 부인이 잘못될까봐 그는 아내를 설득해 잠깐 이야기 하고 오겠다고 안심시킨 후, 경찰과 함께 밖으로 나갔다.

그의 집 앞 긴 골목길을 300m정도 걷다보니 경찰이 타고 온 포니승용차 한 대가 있었다. 경찰은 승용차를 타고 호텔에 가서 이야기를 하자고 했고 그는 의심스러웠지만 따라갈 수밖에 없었다.

결국 도착해 보니 호텔이 아닌 제주도경 대공분실이었다.

"집에서 나올 때, 추리닝하고 슬리퍼 차림으로 나왔어요. 호텔에 간다는데 이 차림으로는 못가겠다고 집에 가서 옷을 가라입고 오겠다고 하자, 괜찮다며 그냥 데리고 갔어요. 의심스러웠고 이상했죠. 결국 도착해보니 조사실이었죠. 다른 건 걱정이 안됐는데 만삭인 아내가 충격을 받을까봐 그게 걱정이 됐어요. 충격 안 받게 아버지 일로 조사받고 금방 가겠다고 안심을 시켰죠"

그렇게 그는 105일 동안 집에 들어가지 못했다. 고문을 받으면서도 그의 머리속에는 오직 아내와 아이 생각뿐이었다. 고문을 받던 도중, 경찰관으로부터 아들이 태어났다는 소식을 듣게 됐다. 그는 아내와 아들이 건강하다는 소식을 듣고 안도의 한숨과 옆에 있어주지 못한 미안한 마음만이 감돌았다.

"태어난 아이가 너무 보고 싶었어요. 결국 경찰이 고문상처가 없을 때 아이 얼굴을 보게 해줬어요. 애기구덕에 누워있는 아이를 보니 감정이 복받쳐서 눈물이...빨리 나가려고 했어요. 얼굴 보는 게 더 괴로우니깐..."

그는 105일 동안 아이의 얼굴을 2번밖에 보지 못했다. 어렵게 아이의 얼굴을 본 그는 눈물을 퍼부었고 아이와 아내의 얼굴을 보면 볼 수록 미안한 마음이 더욱 커져만 갔다.

#"빰을 어찌나 때리던지, 입안이 다 찢어졌어요"

경찰은 조작된 조서를 쓰게 하기 위한 혹독한 고문을 시작했다. 잠도 재우지 않고 밥도 주지 않았다. 물고문은 물론 머리부터 발끝까지 맞지 않은 데가 없었고 뺨을 어찌나  때리던지 그는 얼굴이 돌덩이가 된 기분이었다고 했다.

입안이 다 찢어져 밥도 제대로 먹지 못했지만 살기 위해 꾹 참고 먹었다. 그에게는 그를 기다리던 가족이 있었기 때문이다. 고문을 받는 내내 그의 머릿속에는 여전히 아내와 아이 걱정 뿐이었다. 밥은 잘 먹고 있는지, 아이는 건강하게 자라고 있는지 등의 걱정을 혹독한 고문을 받는 그 순간까지도 그는 생각했다.

숨이 끊어질 듯한 고문 끝에 결국 그는 거짓 조서를 쓰게 된다. 그는 견디다 못해 자신이 간첩이라고 자백했다. 누런종이에다 조서를 쓰는데 그는 볼펜 16자루나 썼다. 다리를 펴지도 못하고 앉아있는 그 자체만으로도 고문이었다. 그는 13년간 억울한 옥살이를 해야 했다.

"제가 겪었던 고문 상상할 수 있겠어요? 고문이 얼마나 심했으면 속옷에 살이 붙어 떨어지지 않겠습니까! 숨이 끊어질 듯한 고문 속에서 무슨말을 못해요. 그런 상태에선 물이 돌이라면 돌이라고 하지...정말 온갖 방법을 동원해 조서를 쓰게 하더라구요!"

#"아이 업고 온 아내에게 '더 이상 면회오지 말라'고 했어요"

결국 1987년 9월. 대법원은 강희철씨에게 무기징역형을 확정했다. 무기징역을 받은 후 13년 동안의 수감생활을 하게 됐다. 그의 수감생활은 분노로 가득찼다. 고문했던 사람들이 자꾸만 떠올라 그들에 대한 분노심이 하루하루를 힘들게 견딜 수 밖에 없었다.

수감생활 중 아내가 아이를 등에 업고 면회를 왔다. 면회도 어려워 돌아가는 일이 허다했다. 그래서 가족과 면회했던 것은 딱 3번. 면회시간은 3분. 시간도 너무 짧고 가족을 보는 내내 그는 가슴이 찢어질 듯한 고통을 받았다고 했다. 그래서 그는 가족에게 '면회오지 말라'고 냉정하게 말하기도 했다.

"교도소에는 이야기 나눌 사람도 없었어요. 가족이 찾아오면 마음이 아프고... 더운 여름이여서 가족들이 고생할까봐 걱정하지 말라고 면회 오지 말라고 했어요."

결국, 무기징역을 선고 받은 후, 3번의 면회 끝에 그는 1989년 첫 부인과 이혼했다. 어린 아들은 일본 오사카에 있는 부모에게 보내졌다. 그는 비극적인 현실로 인해 가족이 붕괴됐지만 첫 번째 부인을 원망하지 않는다며 거듭 짧은 결혼생활이었지만 그 순간이 행복했다고 강조했다. 

이혼 후, 찾아오는 사람도 드문 가운데 어느날 이장형 선생과 남승택 신부가 그를 찾아오게 됐다. '조작간첩'사건에 대한 진실을 밝혀야겠다는 불씨가 이들에 의해 타오르기 시작했다.

"찾아와준 고 이장형 선생과 신부님, 정말 희망이었죠. 너무 감사했고요. 지금 이 세상에는 안 계시지만 이장형 선생은 정말 저를 출소시켜준 1등 공신이예요. 지금 우리가 느끼고 있는 이 기쁨을 하늘에서 나마 축하를 해 주실꺼라고 생각해요"

#"농담도 하지 않던 아이가 이젠 농담도 잘하고..."

강씨는 13년 동안 복역한 뒤 1998년 8·15특별사면으로 가석방됐다. 가석방 된 후, 일본에 있는 아들을 한국으로 데리고 와 함께 생활을 시작했다.

그는 아들이 어려서부터 가족에 대한 힘든 경험을 했기 때문에 혹시 반항심이 생겨 비뚤어진 길을 걷는 것은 아닌지 걱정을 많이 했는데 걱정과는 달리 무난히 잘 자라줘서 고마울 따름이다고 말했다. 

가석방 된 후에도 보안관찰 신분이었기 때문에 제대로 된 직장에 들어가지는 못했다. 그래서 공공근로나 막 노동일을 주로 하며 지냈다. 아들 학원비도 내주지 못할 만큼 형평이 어려웠지만, 그래도 가족과 함께 살수 있다는 것과 진실을 밝혀야겠다는 생각에 그는 행복했다.

그러다가 2000년 지금의 아내를 만나 재혼을 하게 됐다. 그는 재혼을 해 가장 변한 것이 있다며 무뚝뚝했던 아들이 밝아져 가족의 소중함을 다시한번 느끼게 된다고 말했다.

"나를 잘 이해해줬어요. 처음에는 결혼을 못할 줄 알았는데...자주 만나다 보니 비슷한 면도 있고... 인연이라고 생각했죠! 재혼한 후, 아들의 표정도 무지 밝아졌어요. 잘 웃지도 않고 농담도 하지 않던 아이가 이젠 농담도 하고 웃음이 많아져서 기분이 좋아요! 표현은 잘 못하지만 항상 제 아내에게 고마운 마음을 갖고 있어요."

#"언젠가는 밝혀질 것이라는 믿음 하나로 살아왔는데..."

2005년. 그는 천주교 제주교구사제단과 천주교인권위원회의 도움으로 제주지방법원에 재심을 청구했다. 1994년부터 '조작간첩'사건이 재조명되기 시작했고 2006년 6월 14일 재심개시를 결정했다. 천신만고 끝에 열린 재심 재판에서 그는 23년 만에 무죄를 선고받았다. 

"솔직히 재판 불안했어요. 왜냐하면 재판이 진행될수록 예전 고문을 했던 담당 수사관들이 고문사실을 부인하고 확실한 증거가 없어서 많이 불안했어요. 하지만 진실이 언제가는 밝혀질꺼라는 마음하나로 힘든 싸움을 계속 이어갔지요. 무죄를 판결 받고는 믿을 수가 없었어요. 혹시 꿈은 아닌가 하는 생각도 하구요."

지난 7월 1일이 항소신청기간이었다. 하지만 검사는 이 사건에 대해 항소를 포기했다. 그는 앞으로 손해배상 청구 등 민사에 들어갈 예정이라고 했다.

무죄를 선고 받기 위해 도움을 받았던 모든 사람들을 돕고 싶다는 그. 앞으로 해야 할 일이 더 많아 졌다는 그는 잘못된 과거사 진실을 밝히기 위한 사람들을 도우며 살아간다고 했다.

무죄를 받았다고 해서 끝이 아니라 또다른 진실을 밝히기 위한 '시작'을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과거의 잘못된 역사로 인해 상처를 받은 모든일들의 진실이 규명되기를 바란다는 그.

"중간에 포기하고 싶은 생각이 많았는데 반드시 진실이 밝혀질 때까지 포기하지 말자고 오기로 참고 견뎠다. 진실을 밝히고 싶다면 마음의 믿음이 있다면 언젠간 그 진실은 밝혀지기 마련이예요" <미디어제주>

<박소정 기자 / 저작권자 ⓒ 미디어제주 무단전재및 재배포 금지>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딥페이크등(영상‧음향‧이미지)을 이용한 선거운동 및 후보자 등에 대한 허위사실공표‧비방은 공직선거법에 위반되므로 유의하시기 바랍니다.(삭제 또는 고발될 수 있음)
댓글 2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뿌리깊은나무 2008-11-07 17:17:22
그 고생을 어찌말로 다 표현할 수 있겠습니까? 참으로 장하시고요. 아직도 정의와 사랑이 우리 주변에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메세지입니다. 이러한 일이 다시는 일어나지 앟도록 사회구조가 획기적으로 변화와 쇄신 되어야하고 정의와 사랑을 실천하는 분들에게 감사드립니다.

이어도 2008-07-06 21:04:00
이제 지난 과거를 더욱 소상히 밝히셔야 합니다. 당시 고문했던 무리들도 공개 하시고요 그래야 제2 제3의 피해자를 막는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