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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어버린 땅 알뜨르
잃어버린 땅 알뜨르
  • 배준현 청소년기자
  • 승인 2024.07.16 08:2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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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배준현

# 서문

하루에도 수천 편의 비행기가 뜨고 내리는 제주도엔 단 한 편의 비행기도 뜨지 않는 비행장이 있습니다. 대한항공에서 1990년대 후반에 교육 목적으로 설립한 정석비행장도 아니고 제주의 관문으로 1940년대 초에 건립된 제주국제공항도 아닙니다. 이 비행장은 제주에서 가장 먼저 비행기가 뜨기 시작했지만 가장 먼저 비행기가 끊기기도 했습니다. 바로 1930년대에 일제에 의해 비상착륙장으로 건립되어 활주로의 형태를 갖추게 된 알뜨르비행장입니다.
 

# 명칭

제주국제공항은 일제강점기 시절인 1940년대 초부터 육지와 본토를 잇기 시작한 역사가 깊은 비행장입니다. 일본에 의해 태평양 전쟁 중 일본 육군 항공대의 후방 기지로 이용되기 시작한 제주국제공항은 당시에는 건설 부지에 우물이 하나 있었다는 이유로 우물 정(井)자와 들판을 뜻하는 제주 방언인 ‘뜨르’를 합쳐 정뜨르비행장이라고 불렸습니다.

알뜨르비행장은 정뜨르비행장과 비슷한 작명 방식을 가집니다. 정뜨르비행장이 ‘정’이라는 단어와 제주 방언으로 들판을 뜻하는 ‘뜨르’를 합쳐서 지어졌듯이. 알뜨르비행장도 제주 방언으로 아래쪽을 뜻하는 ‘알’과 ‘뜨르’가 합쳐져서 생긴 이름입니다. 한마디로 아래쪽 들판을 뜻하는 이름입니다.
 

# 건설

알뜨르비행장은 일본 육군 항공대 주도로 건설된 정뜨르비행장과는 다르게 일본 해군 항공대의 중간 착륙지로 1930년대 초에 건설되었습니다. 1920년대 후반과 1930년대 초에는 태평양 전쟁과 중일전쟁이 발발하기 전이라 제주도의 전략적 가치가 그리 높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1932년에 일본이 중국 만주로 진출해 괴뢰국인 만주국을 설립하며 중국과의 관계가 긴장되자 당시 제주도를 관할하던 일본 해군은 훗날 중국과의 전쟁이 발발할 것이라 예상하고 이에 대비하여 항공기지를 미리 건립해두기로 결정합니다.

알뜨르비행장의 옛 급수탑. 다른 시설이 모두 사라지는 동안 급수탑만이 자리를 지키고 있다.
알뜨르비행장의 옛 급수탑. 다른 시설이 모두 사라지는 동안 급수탑만이 자리를 지키고 있다.

이에 따라 1932년부터 1933년까지 현재 서귀포시 대정읍 상모리와 하모리 일대의 6만여 평의 땅을 확보하고 비행장 건설을 시작하였는데, 이것이 바로 알뜨르비행장의 시초입니다. 이 비행장 부지에 살던 지역 주민들은 일제의 식민 통치에 의해 강제로 땅을 헌납하고 떠나야 했습니다. 그렇게 제주도민들은 알뜨르를 잃어버렸습니다. 이렇게 개발된 알뜨르비행장은 당시에는 규모도 크지 않고 본격적인 항공기지로 이용할 필요성도 크지 않아 항공대의 중간 기착지나 비상 착륙지로 사용되었습니다.
 

# 중일전쟁 때 이용

알뜨르비행장이 본격적인 항공기지로 이용되기 시작한 것은 중일전쟁 개전 직전부터입니다. 일본 해군은 중일전쟁 직전인 1936년부터 1937년 초까지 비행장 주변 15만여 평의 토지를 다시 한번 강제로 매입하며 비행장 확장을 시작하였고, 같은 해 7월 일본이 중국을 침략하며 중일전쟁을 일으키자, 알뜨르비행장의 군사적 중요성이 생기게 됩니다.

일본군은 육군을 중심으로 전선을 구성하여 진격하고 있었는데, 끊임없이 육군과 대립하던 해군은 전쟁에서 자신들의 영향력을 기르고자 자신의 항공대를 이용해 중화민국의 수도인 난징을 폭격하는 것을 계획합니다. 하지만 해군이 이용할 수 있는 항공기지가 중국 대륙 내에 없었고 항공모함의 함재기를 이용한 폭격은 효율성이 떨어졌던 이유로 한반도나 일본 본토에서 이륙해 바다를 건너 중국 대륙을 타격하는, ‘도양폭격’이라는 이름의 폭격을 시행해야 했습니다.

해군은 일본 본토에서 가장 중국에 가까웠던 나가사키의 오오무라 항공기지를 이용해 난징 폭격을 시도하려 했습니다. 그러나 해군이 보유하고 있던 가장 최신 폭격기로도 난징을 폭격하고 바다를 건너 다시 일본으로 돌아올 수 없었기 때문에 난징을 폭격한 다음에는 중간에 위치에 있던 알뜨르비행장에 착륙해야 했고, 이로 인해 알뜨르비행장이 본격적으로 이용되기 시작합니다.

활주로 하나만 덩그러니 놓여 있던 알뜨르에 수십 대의 폭격기가 하루가 멀다 하고 착륙했고, 언론에서는 알뜨르를 이용해서 성공한 폭격 임무를 칭찬하며 제주를 이용한 도양폭격은 성공하게 됩니다. 알뜨르비행장의 중요성은 점점 커져 나중에는 아예 알뜨르비행장에서 출발까지 해서 중국을 폭격하게 되었고, 총 36회의 공습이 알뜨르에서 출발해 총 300톤의 폭탄을 중국에 투하하며 수천 명의 사상자를 냈습니다. 이후 1937년 11월에 일본 해군이 상하이에 항공기지를 건립하며 굳이 제주도를 이용할 이유가 없어져 알뜨르비행장은 다시 조용한 비행장으로 돌아갔으나 제주의 군사적 가치를 알게된 해군에 의해 오오무라 항공기지의 연습 항공대와 파견대가 설치되며 잃어버린 땅의 크기는 커져만 갔습니다.
 

# 태평양 전쟁 때 이용

1941년 일본은 미국 하와이의 진주만 태평양함대 기지를 기습 공격하며 태평양 전쟁을 개전하였습니다. 1941년부터 일본 제국이 항복하기 전인 1945년까지 알뜨르비행장은 계속해서 증축되고 확장되었습니다. 화약고, 연료 창고, 격납고, 식량 창고 등의 부속 건물들이 연이어 건설되며 알뜨르비행장은 총 80만여 평의 면적을 가진 대형 항공기지로 변화하였고, 이 과정에서 지역 주민들의 막대한 인력이 계속해서 강제 동원되었습니다.

그러나 1945년 4월 일본 육군이 제주도에 본격적으로 상륙하면서 알뜨르비행장의 전략적 가치는 더욱 줄어들게 됩니다. 원래 해군만 이용하던 알뜨르를 육해군 공동으로 이용하게 되었는데, 육군은 이미 현 제주국제공항인 정뜨르비행장을 보유하고 있었고 알뜨르비행장은 제주 남부에 위치해 미 해군의 공격에 취약한 상황이었기 때문입니다. 비행장이 미군 함포 폭격의 사정거리 안이었고, 만에 하나 상륙이라도 당한다면 미국에 의해 일본 공습에 이용될 수 있었기 때문에 이미 제주 북부에 비행장이 있는 상황에서 남부에 또 다른 대형 비행장을 운용하는 것은 불필요했습니다. 결국 수년간 확대 공사를 진행했음에도 일본군의 무관심과 몇 달 후 이어진 원자폭탄 투하로 인해 알뜨르비행장은 일본군 비행장 역할을 종료하게 되었습니다.
 

# 한국전쟁 때 이용

광복을 맞이해서도 알뜨르는 주민들 품으로 돌아가지 못했습니다. 1950년에 시작되어 1953년 정전협정까지 지속된 6.25전쟁이 그 이유였습니다. 비록 알뜨르비행장은 비행장의 목적으로 이용되지는 않았으나 여전히 한국군에 의해 군사시설로 운용되었습니다.

당시에는 모슬포의 대부분이 군사기지로 이용되었는데, 현 해병부대에 위치했던 육군 제1 훈련소인 강병대가 그 예시입니다. 송악산과 알뜨르비행장 일대에는 민간인 통제구역이 설정되고 중공군 포로 수용소가 건립되었습니다. 1952년부터 1953년까지 이용된 이 수용소는 오직 중공 반공포로만을 수용했던 시설이었습니다. 반공포로란 중공군의 일원이었지만 공산주의를 반대하고 민주주의를 지지했던 포로들로, 정뜨르에 수용되었던 친공포로와는 다르게 중화인민공화국의 송환을 거부했던 포로들입니다. 총 만 오천여 명에 달하는 반공포로들이 이곳에 수감되었고, 이는 당시 대정의 인구에 맞먹는 수치이죠.

또한 알뜨르비행장은 국군 주둔 시설, 3개소의 수용소, 그리고 활주로로 이루어져 총 182만 평의 민간인 통제구역을 포함해 운영되었습니다.

알뜨르비행장을 포로수용소로 확장하고 민간인 통제구역을 설정하는 과정 뒤편에는 일제가 토지를 압수하고 인력을 동원했던 것처럼 민간인의 희생이 있었습니다. 당시 통제구역이 비행장 구역보다 더 넓게 형성된 이유로 인해 원래 비행장과 송악산 근처에 거주하거나 토지를 경작하던 민간인들은 삶의 터전을 버리고 이주해야 했습니다. 하지만 이들의 반발은 그리 거세지 않았는데 그 이유로는 국군이 아닌 미군이 주축이 되어 수용소를 운영하고 있었다는 점과 미군이 ‘제주도 프로젝트’를 추진하여 지역사회의 공공시설을 개선하고 경작법을 전수했다는 점을 들 수 있겠습니다.

알뜨르비행장에 수용되어 있던 반공포로들은 유엔군의 자유 송환 원칙에 따라 거취가 결정되었습니다. 미군과 유엔군은 중화민국(대만)의 장개석 총통과 사전에 협의하여 반공포로를 대만으로 송환한다는 것을 재확인하였고, 총통이 직접 포로에게 서한을 보내 대만 송환을 약속했습니다. 알뜨르비행장에 있던 반공포로들은 1954년 1월 23일에 송환이 완료되었고, 중화민국은 이들을 환영함과 동시에 ‘123자유일’을 지정하여 기념했습니다.
 

오늘날의 알뜨르비행장. 반쯤 파묻힌 격납고가 이곳에서 비행기가 뜨고 내렸다는 사실을 암시한다. 알뜨르비행장은 끝까지 주민들의 땅이 되지 못하고 있다.
오늘날의 알뜨르비행장. 반쯤 파묻힌 격납고가 이곳에서 비행기가 뜨고 내렸다는 사실을 암시한다. 알뜨르비행장은 끝까지 주민들의 땅이 되지 못하고 있다.

# 알뜨르의 미래

알뜨르비행장은 지금도 제주도민의 땅이 아닙니다. 국방부 소유이며, 격납고와 급수탑 등 일부 시설을 개방하여 관광지로 이용되고 있습니다. 한국전쟁 이후 1988년 국방부가 이곳에 군용 비행장을 재건하려다 지역 주민들의 대대적인 반발로 취소된 바 있고, 2008년에는 알뜨르비행장 부지에 평화대공원을 설립하는 계획이 수립되었으나 국방부의 반대로 역시 무산된 바 있습니다. 이 외에도 제주 신공항 부지로 거론되기도 했으나 비행 방향이 모슬봉과 모슬포 등 언덕과 인구밀집지역을 통과해야 하는 점 등 여러 현실적인 문제점으로 인해 알뜨르비행장은 지금까지 들판과 농경지로 남아있는 상태입니다.

최근 평화대공원사업이 정부에 의해 적극적으로 재추진되며 알뜨르는 한국 근대사의 아픔의 상징에서 평화의 상징으로 거듭날 예정입니다. 흩어져 한 번에 접근하기 어려운 동굴 진지, 격납고, 고각포 진지 등을 정비하고 접근성을 개선하며 광장과 전시관을 건설하는 계획인데, 이를 통해 아픔의 역사에서 시작해 평화의 미래를 써 내려갈 알뜨르비행장의 내일이 기대됩니다.

 

참고문헌

1) 조성윤, (2012-08), 「알뜨르비행장; 일본 해군의 제주도 항공기지 건설 과정」, 『耽羅文 化』, 제41호, 395-438
2) 한형진; 김찬우, (2020-12), 『제주 ‘중공군 포로수용소'가 남긴 교훈... 항구적 평화와 한반도 통일』, 제주의소리
3) 강태권, 『알뜨르·송악산 평화대공원 세계UN평화공원으로 의미확장』, 알뜨르·송악산 평화대공원 추진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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