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숙의 시조집 『섬의 레음은 수평선 아래에 있다』
① 반복과 압축의 시적 환기와 음악성
차례
1. 반복과 압축의 시적 환기와 음악성
1) 반복과 압축의 음악성, 섬의 레음
2) 동음이의어의 시적 환기, 텍스트와 콘텍스트
2. 자연의 결, 제주어의 결
3. 제주어 시조의 시대 의식
들어가며
시대가 바뀌면서 삶도 변하고 문학도 변한다. 천년의 혈통을 이어오는 시조 역시 그렇다. 기본 맥을 유지하면서도 다양한 양상으로 옷을 갈아입으며 그 안에서 시조 미학을 추구한다. 김정숙 시인이 세 번째 시조집 『섬의 레음은 수평선 아래에 있다』는 제주의 말과 소리로 접근한 시조 節制美절제미를 보여준다.
이 시조집 표제에서 ‘수평선’은 제주사람들이 어우러지는 무한한 문학적 상상력을 연상시키며, 제주어의 시조를 담은 그 이상의 넓은 세계로 가늠할 수 있다. 제주사람들의 삶이 표출된 ‘섬의 레음’은 변방으로 인한 한계성이나 아픔에 머무르지 않는다. 가난한 삶을 살았으면서도 그 삶에는 ‘레음’이라는 음계에서 전혀 다른 상상의 바다 속을 더듬게 한다. 대부분 시편에는 제주 정서를 포용하는 맑음, 희망, 사랑 등의 음률이 깔려있다. 이처럼 김정숙 시인의 인식세계는 그 대상의 참 모습을 긍정적으로 조감하려는 시대정신에 바탕을 두고 있다.
이 시집의 발문을 쓴 강덕환 시인은, 지역작가라면 그 지역의 언어로 그 지역민의 정서를 표현하는 숙명적인 존재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는 점을 강조했다. 김정숙 시인은 『나도 바람꽃』, 『나뭇잎 비문』에 이어 이번 세 번째 시집에서 그 과제를 풀어냈다.
시를 쓰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언어적 체험’이라는 것은 뼛속 깊은 자신의 정체성이며, 소속된 지역민의 정체성이다. 시인은 뱃속에 잉태되던 순간부터 들어오던 말. 고향의 정체성과 지난한 삶의 흔적을, 목젖까지 밀려오는 시대의 아픔 등 제주 사람들만의 독특한 정서를 담아냈다.
김정숙 시인은 시조 형식의 다양성을 추구하면서 내용면에서도 문학적 상상력의 깊이를 가하여 현대시조의 미래지향적 방향성을 제시한다. 특히 제주 정서의 밝은 측면과 폭넓은 세계관으로 시대 의식을 표출해 낸 이번 시조집에서, 시조 장르가 한층 진화해 가는 일면을 뚜렷하게 보여주고 있다.
1. 반복과 압축의 시적 환기와 음악성
시조의 형식적 미학은 무엇보다 압축과 節制美절제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일정 리듬과 율격을 지녀야 한다는 것은 시적 언어의 집약과 응축을 요구한다. 이는 내용과 형식의 자유를 제한하는 측면을 뛰어넘어, 시적 발상에 질서와 규율을 부여함으로써 새로운 리듬의 세계를 창출하는 시조 미학을 지닌다고 볼 수 있다. 특히 음보의 일정한 패턴과 반복에서 운율이 만들어지며 독자들에게 음악적인 면모로 전해진다.
제주어를 활용한 시조에서 음악적 특성은 더 드러난다. 제주어는 억양의 변화가 풍부하여 말의 강세와 높낮이를 조절하여 감정을 표현하는 경우가 많고, 말 자체를 축약하는 과정에서도 운율과 리듬이 내포되는 특성이 있기 때문이다.
정병욱은 『한국 시조의 미학』에서 시조의 반복미와 압축미가 한국 문학의 특징을 가장 잘 나타내는 요소 중 하나라고 했다. 아울러 이러한 특징은 시조를 한국 문학의 대표 장르로 거듭나게 했으며, 현대시조에서도 그 가치를 새롭게 인식할 필요성이 있음을 제기했다. 김정숙 시인의 대부분 시편들에는 자유로운 사상과 절제된 시조의 미학을 절묘하게 실현한다. 제주어를 시상으로 하는 이번 시조집에는 제주어의 운율적 요소를 포착하여, 반복과 압축의 음악성을 작품 전반에 깔아놓고 있다.
1) 반복과 압축의 음악성, 섬의 레음
제주의 지역 감수성을 끌어낸 이 시집을 포괄하는 메타포는 ‘레음’이다. 음계의 ‘레’ 자와 결합한 ‘음’이라는 글자는 일상에서 수시로 뱉는 소리다. 생각을 꺼낼 때, 수긍의 끄덕임을 할 때, 때론 아픔을 꺼낼 때의 정서 표현의 음성이다. 그러나 시인은 한 발 나아가 음계의 ‘음’ 자를 내포시켜 음악성을 시조 전반에 깔아놓고 있다. 이 관점에서 볼 때 ‘레’와 ‘음’의 결합 ‘레음’은 제주섬에서 만나는 다양한 삶의 소리에 음악적 요소를 가미한 ‘음성 결합체’라 볼 수 있다.
시조집 『섬의 레음은 수평선 아래에 있다』에는 총 93 首수의 시조가 들어있다. 이 안에서 표제작으로 쓴 대표 시조 「섬의 레음은 수평선 아래에 있다」는 단시조 12 首의 소제목이 들어있다. 올레, 줄레, 찔레, 살레, 촐레, 볼레, 고레, 빌레, 몰레, 포레, 지레, 날레 등등 각자의 색채를 보이는가 하면, 모든 소재에 ‘레’의 음절로 따스한 화음을 내며, 운율이 담은 제주 정서의 血脈혈맥을 짚어낸다.
한그루 포도나무였다
내가 자란 납읍은
송이 같은 골목들이 동글동글 집을 달고
사랑이 영글어 가는
올레올레 우리 올레
- 「섬의 레음은 수평선 아래에 있다/올레」 전문
올레는 거친 바람을 막기 위하여 길에서 집까지 이르는 돌로 쌓은 통로를 말하는 제주어이다. 태어나서 첫걸음을 내딛는 곳이다. 김 시인이 살았던 시대 제주인이라면 누구나 올레에 대한 기억이 있을 것이다. 시적 화자는 고향 땅을 포도송이에 비유했다. ‘송이 같은’ 골목들이라 비유한 걸 보면, 시인이 살았던 동네는 유독 구불구불한 골목이 많지 않았을까. 여기서 골목은 동네 사람들이 같이 이용하는 공적인 통로라 할 수 있으며, 올레는 골목과 자기 집 마당이 연결되는 지극히 사적인 통로이다.
시적 화자는 공적인 골목에서 사적인 공간으로 이어주는 올레에 ‘동글동글 집’을 달았다고 표현한다. 동글 동글의 언어에는 아무리 세상살이가 힘겹더라도 모두 감싸 안아줄 것 같은 포용감이 잠재해 있다. 그 온기로 사랑을 만들어 내는 것이 올레라고 한다. 제주섬의 삶은 변방의 환경으로 인한 공동체의 결집이 불가피했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우리’라는 공동체 의식을 기저로 이웃과 함께 살아가야 했다. “올레올레 우리 올레‘에서 느낄 수 있듯이 ‘우리‘ 제주사람들의 올레는 따뜻한 사랑과 이웃 愛애 그리고 강력한 연대감을 일깨워준다. 하여 시적 화자는 ’올레‘를 개인과 개인을 공동체로 연결해 주는 情정의 통로. 집과 바깥 세계를, 거기에다 결속의 통로임을 강조하고 있다.
흙이라고 다 같은가
암반덩이 품어 사는 빌레
조금만 가물어도 풋것들을 다 태워 먹는데
그래도 내 땅이 어디냐고
아끼는 빌레 빌레밭
- 「섬의 레음은 수평선 아래에 있다/ 빌레」 전문
제주의 밭 빌레. 우리의 어머니 아버지가 품어냈던 밭이다. 빌레밭에는 돌덩이가 묻혀 있어, 씨앗을 뿌려도 곡식들이 뿌리내리기 힘들었고, ”조금만 가물어도 풋것들을 다 태워 먹는“ 척박한 땅이었다. 화산섬의 자연환경에서 탄생한 빌레밭은 제주민들의 가난을 상징한다. 그리고 늘 외세에 시달렸던 제주사람들의 ‘아픈 역사’로 해석해도 무방할 것이다.
제주는 화산섬이다 보니 밭마다 돌덩어리들이 박혀서 농작물 수확이 힘들다. 그런데도 제주사람들은 ’빌레밭‘을 일구며 살아왔다. 시인은 "그래도 내 땅이 어디냐고 아끼는 빌레밭"이라며, 제주사람들에게는 비록 암반 덩이가 깔린 빌레밭마저도 소중한 삶의 터전이었음을 강조한다. 단시조가 주는 담백한 울림은 내 땅을, 그리고 제주섬을 지키기 위해 노력했던 제주사람들의 마음을 따뜻하게 보듬어준다.
위에 분석한 단시조 외에도 「촐레」의 종장 “매 끼니 자리젓 멜젓/ 입맛 돌던 촐레촐레“, 「볼레」의 종장 ”당신의 눈물방울이/달달 익은/볼레 볼레“등등 레음의 모든 시편에는 반복과 압축의 시적 환기로 음악성을 짙게 깔아놓았다.
「구순의 입덧」은 제목에서부터 눈시울이 뜨거워졌던 작품이다. 제목을 보는 순간 불현듯 九旬의 할머니가 생각났기 때문이다. 필자의 할머니는 구순까지도 콩잎을 멸젓에 싸서 머릿고기를 즐겨 드셨었다. '콩잎에 쿠싱한 멜젓'으로 여름을 넘길 만큼 콩잎과 멜젓은 제주사람들의 밥상에 단골로 등장하는 음식이다. 콩잎의 독특한 향과 멜젓의 맛은, 우리들 어머니 아버지의 삶을 기억하게 하는 제주의 정서가 짙게 배어 있다.
"빙떡은 솔강솔강 삶은 무채 맛이라 시고…" 빙떡은 메밀가루로 만든 얇은 피에 삶은 무채를 넣어 말아 먹는 음식으로, 제주도에서는 결혼식이나 설 등 특별한 날 주로 먹었던 음식이다. 아직도 필자의 집안은 설날이면 빙떡의 솔강솔강 무채 맛을 즐기기 위해, 온 가족이 둘러앉아 빙떡을 만들며 담소를 나눈다.
입덧할 때는 특별한 음식을 찾는다. 솔강솔강, 토랑토랑, 모랑모랑 등 의성어•의태어 만으로도 口脣의 입맛을 돋우는 음식들. 시인은 제주사람들의 입가를 자극 했던 음식들을 주인공으로 등장시키며 제주 정서를 추억하게 한다. 특히 토속적인 제주 음식의 맛에 베인 정서를 강조하는 ‘시고’라는 존칭 종결어미의 반복적 표현은 시의 전반에 리듬을 깔아준다. 낭송 그 자체로 제주의 할머니 어머니가 즐겼던 추억의 맛이 살아나며, 제주의 숨결이 살아 숨 쉬는 것 같다.
2) 동음이의어의 시적 환기, 텍스트와 콘텍스트
시조 작품에서 텍스트는 글자로 쓰인 표면적 내용을 의미한다. 반면 콘텍스트는 텍스트를 둘러싼 맥락적 재해석으로 볼 수 있다. 이 시조집은 동음이의어의 대비를 통해 제주 시가에서만 느낄 수 있는 지역성과 말의 맛 즉 어감을 보여 준다. 동음이의어의 대비는 현실적 소재의 ‘텍스트’와 그 소재를 둘러싼 시어의 상징성, 나아가 독자의 배경과 사회의 배경을 바탕으로 독자의 관점에서 재해석한 ‘콘텍스트’ 적 해석의 묘미를 느낄 수 있다.
「아버지의 자리」는 아버지와 바다, 그리고 자리돔을 중심으로 한 추억과 그리움을 담는다 "이 자리 저 자리 해도 바당 자리가 최고라"는 바다가 가장 좋은 곳임을 이야기하며, 이는 실제의 “자리/바다” 뿐만 아니라 아버지가 살아왔던 삶의 자리, 그리고 가족이 함께했던 시간까지 한 곳에다 펼쳐놓는다.
"졸마룽혼 건 바짝 졸영 조근조근 씹어 먹곡/중략/ 젓 담앙 새 자리 나도록 놀차 먹곡 밥솥디 치멍 먹곡“ 자리의 크기에 따라 구수한 제주 언어의 맛을 중장에 사설로 늘어놓는다. 종결 시어 ‘먹곡’의 반복과 크기에 따른 제주어의 나열 방식에서 언어 간의 화음을 연출하는가 하면, 독자들에게 노랫가락처럼 다가오게 한다.
중장에서 단순 나열의 작법을 통해 독자들은 잠시 제주 정서의 세계로 감정이입 한다. 아버지의 살아생전 먹었던 ‘자리’의 문화를 보여주며, 나아가 아버지가 살아계실 때의 삶의 방식을 생각하게 한다. 반면, 종장에서는 동음이의어의 반복으로 시적 울림을 끌어낸다. 여기서 "이 봄도 자리돔은 나고” 봄은 모든 생명이 움트는 계절로 자리돔 역시 봄에 피어나는 생명들처럼 실재성을 나타낸다.
한편 “당신은 자리에 없고"라는 아버지의 부재를 대비시키며, ‘실재’와 ‘부재’의 반전적 상황을 부각한다. “당신은 자리에 없고“의 표현을 통해서 드러내고자 한 것은 아버지의 부재로 인한 물리적인 빈자리뿐만 아니라, 정신적 공허함에서 오는 시적 자아의 그리움의 표명이다. 가슴 한쪽에 영원성으로 존재한 아버지의 자리는 시인을 문득문득 아리게 하는 정서적 자리이다. 이처럼 시인은 제주민들이 즐겨 먹었던 ‘자리돔’에서 만나는 ‘자리’의 생명성과 제주사람들의 음식문화라는 객관적 사실에 안주하지 않고, 아버지’의 부재와 아버지에 대한 기억을 담담하게 대비시키며 독자들의 아버지 또는 삶의 ‘자리’를 되돌아보게 한다.
동음이의어의 감각적 대비는 다른 작품에서도 등장한다. 「시집인데」의 시부모가 사는 집이라는 뜻의 제주어 ‘시집’과 김정숙 시인의 시조집을 말하는‘시집’의 대비, 「아침 바람 찬바람에」에서의 장갑을 찌라는 제주어 ‘찌라’를 말하며, 음식을 찌다의 ‘찌라’의 대비를 볼 수 있다.
시인은 동음이의어를 통해 언어유희의 문학적 접근을 시도했다. 독자들의 예상과 기대를 뒤엎는 방식으로 웃음을 유발한다. 이는 기본 ‘텍스트’를 통한 ‘콘텍스트’ 적 해석을 가능하게 하며, 해석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제시한다. 아울러 독자의 언어적 사고와 유연성을 자극한다.
이처럼 김정숙 시조집에서는 동음이의어를 통한 시적 발상 외에도, 작가와 독자의 틈새에 끼어들어 절로 웃음을 유발하게 하는 작품들이 많다. 하여 시조집을 들여다보면 저도 모르게 입살 맞게 읊조리는 우리를 만나게 될 것이다.
반복과 압축의 시적 환기와 음악성을 다룬 작품은, 여기서 소개한 작품 외에도 여러편 있다. 각각의 시편 안에서 반복적 시어로 사용한 제주어 ‘멍/보름/낭/왕/기/양/무사/쿨’ 등등, 이들은 음의 반복과 의미 나열, 제주어의 축약미 등 절묘한 언어 배치를 통해 운율과 리듬의 시적 음악성을 생동감 있게 드러낸다.
김정숙 시인의 시조들은 자연그대로 담백한 시조 절제미와 제주인의 정서를 두루두루 보여준다. 반복과 압축의 음악성을 내포하는 시조의 전반적 정서는 포용감이다. 어릴 적 동화 같은 포도송이 마을의 올레, 힘들지만 견디어온 제주사람들의 터전 빌레, 그래도 그리운 마을 그리운 정서 입덧…. 행간에 미세하게 젖어 드는 크고 작은 떨림이랄까. 제주의 기억을 궁구하고 싶게 한다.
최근 추이를 보면, ‘제주어’를 중점으로 한 특별활동의 수업 현장들은 종종 볼 수 있으나, ‘제주의 정서’를 다루는 수업은 보기 힘들다. 정체성 형성의 절정기인 청소년기에 우리의 것, 우리 지역의 정서를 알리는 일은 자기를 이해하고 우리 지역을 이해하는 첫걸음이 될 것이다. 하여 제주지역 감수성이 짙은 김정숙 시인의 시조집의 독자 범주를 청소년기까지 확장하여 학교 특별활동 시간 등 독서 활동에 적극 활용될 수 있기를 제안해 본다.
※김정숙 시조집의 독서 평론은 3회에 걸쳐 연재될 예정이며, 다음 칼럼은 “2편 자연의결, 제주어의 결”입니다.
※‘아래아’는 인터넷 표기가 되지 않은 게 많으므로, 시조집 표기와는 달리 시평에서는 편의상 ‘ㅗ’로 표기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