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편집 2024-05-20 14:58 (월)
76년만에 마주한 아버지 얼굴 ... 제주 울린 한 할머니의 사연
76년만에 마주한 아버지 얼굴 ... 제주 울린 한 할머니의 사연
  • 고원상 기자
  • 승인 2024.04.03 13:3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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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6주년 4.3희생자추념식서 김옥자 할머니 사연 소개돼
1948년 아버지 희생돼 ... 평생 아버지 그리워하며 보내
인공지능 기술 통해 아버지 초상 복원 ... 76년만에 마주해
4.3유족인 김옥자 할머니와 그 손녀 한은빈 양이 추념식장에서 눈물을 흘리며 서로를 안아주고 있다. /사진=미디어제주.
4.3유족인 김옥자 할머니와 그 손녀 한은빈 양이 추념식장에서 눈물을 흘리며 서로를 안아주고 있다. /사진=미디어제주.

[미디어제주 고원상 기자] 제주4.3 당시 잃어버린 마을 곤을동에서 아버지를 잃어버린 한 할머니와, 그 할머니의 손녀의 사연이 제주를 울렸다. 

3일 봉행된 제76주년 제주4.3희생자추념식에서 4.3유족인 김옥자 할머니와 그 손녀 한은빈 양의 사연이 소개됐다. 

한은빈 양은 이날 유족 사연을 소개하는 자리에서 76년 동안 아버지의 얼굴을 그리워하던 자신의 할머니 사연을 전했다. 

한은빈 양은 "저는 할머니를 대신해서 70년 넘게 가슴 깊은 곳에 묻어온 슬픔에 대해 말씀드리려고 한다"며 "할머니는 새해 달력을 걸 때면 제일 먼저 할머니의 아버지가 돌아가신 날을 찾아본다. 아직 죽음의 의미를 잘 모르는 저도 홀로 남겨진 딸 자식이 돼 어두운 그늘 속에서 제사를 지내야 하는 할머니가 누구보다 애처롭다는 생각을 거두지 못한다"고 운을 뗐다. 

한은빈 양은 이어 76년 전 이야기를 밝혔다. 김옥자 할머니와 그 가족들은 1948년 초겨울 살던 곳을 뒤로하고 화북동의 잃어버린 마을인 곤을동으로 피신했다. 그 당시 김옥자 할머니의 나이는 겨우 5살이었다. 

그 이튿날 김옥자 할머니의 아버지는 본래 살던 집에 남겨두고 온 소에게 여물을 먹이기 위해 길을 나섰고, 그게 마지막이었다. 김옥자 할머니의 아버지는 다시는 돌아오지 못했다. 

4.3유족인 김옥자 할머니의 손녀 한은빈 양이 3일 봉행된 제76주년 제주4.3희생자추념식 자리에서 유족 사연을 전해주고 있다. /사진=미디어제주.
4.3유족인 김옥자 할머니의 손녀 한은빈 양이 3일 봉행된 제76주년 제주4.3희생자추념식 자리에서 유족 사연을 전해주고 있다. /사진=미디어제주.

하지만 비극은 끝이 아니었다. 김옥자 할머니의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몇 달이 흐르지 않아 김 할머니의 어머니도 화북천에서 돌아가신 채로 발견됐다. 뒤 이어 김 할머니의 남동생도 3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세상을 떴다. 혼자 남겨진 김 할머니는 이모 손에 자라면서 온갖 장사와 공장에서의 노동, 식모살이 등을 통해 삶을 이어갔다.  

한은빈 양은 "할머니는 슬픈 사연을 지녔지만 손자와 손녀들 앞에선 항상 따뜻한 미소를 잃지 않으셨다"며 "저는 할머니가 세상 누구보다 밝고 강인한 분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점점 크면서 할머니의 미소 뒤에 숨겨진 아픔을 헤아리게 됐다"고 말했다. 

한 양은 이어 "할머니의 가장 큰 슬픔은 이제 얼굴조차 제대로 떠오르지 않는 망각"이라며 "할머니는 '아버지가 꿈에서라도 보고 싶어 꿈에 나왔는데, 자신이 얼굴을 봐도 몰라볼지도 모른다'라고 하신다. 

한 양은 할머니와 함께 곤을동을 찾았던 때의 일도 전했다. 

한 양은 "애써 외면했던 곤을동의 잃어버린 마을 터를 70여년만에 찾아간 적이 있었다"며 "말 한마디 없이 한참을 둘러보고 돌아서며, 길가에 우뚝 선 소나무 앞에서 '저 소나무는 그떄(1948년)도 딱 저만큼 컸었다'라고 하셨다"라고 전했다. 

그러면서 "저희 할머니의 시간은 여전히 '다섯살 옥자'에 머물고 있지만 그리움에 사무친 아버지 얼굴은 그 시간 속에서도 찾을 수 없다는 말이 아닐까"라고 사연을 마무리했다. 

이어진 한은빈 양이 사연을 전해준 직후 추념식장의 대형 스크린에선 김옥자 할머니가 아버지를 그리워하는 영상이 나왔다. 

영상 속에선 김옥자 할머니가 아버지를 향해 "아버지가 나를 불러도 모르고, 나도 아버지를 불러도 모를 것"이라며 어버지의 얼굴이 기억나지 않는 설움을 전했다. 

한은빈 양의 입을 통해 김옥자 할머니의 사연이 전해지며, 추념식장은 눈물바다로 변했다. 많은 이들이 이 사연을 접하며 눈물을 흘렸고, 추념식을 진행해야할 진행자들의 눈시울도 불거졌다. 

이어 추념식장의 대형스크린에서 인공지능으로 복원된 김옥자 할머니의 아버지 초상이 모습을 보였다. 인공지능 기술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긴 하지만, 김옥자 할머니가 76년만에 마주하는 아버지의 얼굴이었다. 

대형 스크린에 아버지의 얼굴이 떠오르자 김옥자 할머니는 눈물을 숨기지 못했고, 그 손녀인 한은빈 양이 그런 할머니를 안아주며 추념식장을 감동으로 채워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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