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편집 2024-04-23 18:27 (화)
“피고인들의 공소사실은 범죄 사실의 증명이 없어 무죄”
“피고인들의 공소사실은 범죄 사실의 증명이 없어 무죄”
  • 홍석준 기자
  • 승인 2023.04.18 15: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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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지법 제4-1형사부, 내란죄 및 국방경비법 위반 30명 전원에 무죄 선고
2시간 가량 진행된 재심, 방청객들 침묵 속에 유족들의 한맺힌 사연 이어져
18일 오전 제주4.3 직권재심 재판이 열린 제주지방법원 201호 법정 안의 모습. ⓒ미디어제주
18일 오전 제주4.3 직권재심 재판이 열린 제주지방법원 201호 법정 안의 모습. ⓒ미디어제주

[미디어제주 홍석준 기자] 제주의 4월, 봄을 시샘하는 듯한 강풍이 몰아친 날씨 탓이었을까.

18일 오전 제주지방법원 제4-1형사부(재판장 강건 부장판사)의 제27차 제주4.3 직권재심이 열린 법정 안의 분위기는 두 시간 가량 재판이 진행되는 동안 숨막히듯 처연하고도 쓸쓸한 분위기가 이어졌다.

“제가 태어나기 전 일이라 전해 들은 바에 따르면 당시 한라산에 피신했다가 먹을 것을 주겠다고 밑에서 내려오라고 해서 하산한 후에 주정공장으로 끌려가 한 분은 광주로, 한 분은 전주로 갔다가 서대문으로 갔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그 꽃다운 나이에 형과 누님이 다 돌아가셨어요. 광주형무소로 끌려갔던 형이 17세였고 후손이 없어서 제가 할아버지 밑으로 양자로 들어갔는데 사촌 이내만 재판 청구가 가능하다고 합니다. 제가 6촌 뻘이 되는 바람에 상당히 번거로운 점이 많습니다. 이런 문제도 해결해주셨으면 합니다.”

1949년 군법회의에서 국방경비법 위반을 유죄 선고를 받고 전주교도소에 수감됐다가 서대문형무소로 이감, 6.25 전쟁이 발발하면서 행방불명된 故 김일규씨 유족의 사연이다.

“저는 4살 때 북촌리에서 많은 희생자가 발생했던 당시 현장에 있었습니다. 제가 1950년부터 제사, 명절, 벌초를 해왔는데 유족들 가운데 한 살, 두 살짜리가 엄마 품에서 같이 돌아가셨다는 걸 각명비에서 볼 때마다 참 괴롭습니다. 저도 이제 80세가 됐는데, 유족들에게 조금이라도 위로가 되는 그런 따뜻한 날이 왔으면 좋겠습니다. 제 집사람은 네 살 때 부모님을 다 잃었습니다. 올해 4.3평화공원에서 서북청년단 현수막과 사람들을 보면서 아내를 떠올렸습니다. 당시 네 살이었던 아내가 외할머니 손에 자라오면서 가슴에 맺힌 한이 많았을 겁니다. 저는 교직 생활을 35년간 했지만 가끔 (아내와) 손발이 맞지 않을 때가 많아서 제가 구박을 많이 받았습니다. 억울한 사람이 한두 사람이겠습니까. 오늘도 바람이 세지만, 이 바람으로 모든 상처가 아물었으면 좋겠습니다.”

오랫동안 가슴에 묻어둔 사연을 전하는 유족들의 잠긴 목소리가 끊어질 듯 하다가도 끝없이 이어졌다. 故 한석찬씨의 양자 황계수씨는 네 살 때 부모님을 다 잃고 외할머니 손에 자라온 아내의 상처가 아물었으면 하는 바람을 전했다.

또 당시 우체국에 다니던 중 마을이 불태워지면서 산으로 피신했다가 자수해 대전교도소로 끌려가 행방불명된 故 강병우씨의 외조카 박재수씨는 고령의 어머니가 살아계실 때 유골이라도 찾을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하소연했다.

“증조할아버지 때부터 저희 할아버지가 4형제가 되셨고, 그 다음에 아버지 형제가 계셨는데 아버지와 할머니만 살아남고 모두 돌아가셨습니다. 저는 성인이 돼서야 이런 사실을 알게 됐는데, 아버지는 어린 시절에 큰아버지와 할아버지가 형무소로 끌려가 사망한 사실 외에믄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제가 공직에 있었기 때문에 발설하지 않으신 것 아닌가 생각합니다. 북촌이 마을이 소개될 당시 전부 불살라지는 와중에 저희 할아버지는 병이 들어 움직이지 못하시니까 그대로 불에 태워져 돌아가셨습니다. 그 산을 공동묘지로 개장하려고 파보니까 당시 사고 흔적이 그대로 남아있어서 너무 안타까웠습니다. 제가 바람이 있다면 사진 한 장이라도 좀 구하고 싶습니다. 그 때 다 불타버려서 할아버지는 사진도 없고 얼굴을 전혀 모릅니다. 형무소에 신청을 해서 사진이라도 찾아달라고 하고 있는데, 이제 와서 다시 불거지지 않기를 바라고 모두 상생하는 유종의 미를 거뒀으면 좋겠습니다.”

유족인 문경복씨의 이같은 사연을 들은 재판부는 “교도소에 수감될 때 사진을 찍는 경우가 있어서 기록을 한 번 살펴봤는데, 안타깝게도 문정섭님의 사진은 보이지 않는다”면서 “재심수행단을 통해 확인해보시면 수감 중에 증명사진 비슷하게 사진을 남겨놓는 경우가 있을 것”이라고 안내를 해주기도 했다.

이날 재심에서 무죄가 선고된 30명 가운데 5명은 1947년 군사재판에서 내란죄로 유죄가 선고됐고, 25명은 이듬해 국방경비법 위반으로 수형소로 끌려갔다가 행방불명되거나 수감 중에 숨진 것으로 파악됐다.

재판장인 강건 부장판사는 “뒤늦게나마 이 사건 재심으로 적법 절차에 따른 정당한 재판이라고 보기 어려운 군법회의 재판으로 피고인들에게 유죄라고 판단한 것을 뒤집고 피고인들이 무죄임을 밝힌다”고 이들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피고인들의 애초 공소사실이 범죄 사실의 증명이 없는 경우에 해당하기 때문에 형사소송법 제325조 9항에 따라 전원 무죄를 선고한 것이다.

강 부장판사는 이어 “만시지탄이 될지 모르지만 이 재심 재판으로 잘못을 바로잡아 형언할 수 없는 고초를 겪은 끝에 가족과 단절된 채 억울하게 망인이 되신 피고인들의 영혼이 안식할 수 있게 됐다”면서 “긴 세월 동안 깊은 고통 속에 살아가면서 한이 쌓일 수밖에 없었던 유족들과 그 아픔을 함께 한 일가친척들이 망인에 대한 기억을 새롭게 하면서 작은 위로나마 받을 수 있기를 바란다”고 전했다.

다음은 이날 재심에서 무죄가 선고돼 명예를 회복할 수 있게 된 희생자들.

송희중, 강화춘, 김경옥, 신희수, 한흥용, 한정생, 김일규, 양집중, 한석찬, 고인필, 홍사만, 김희순, 강병우, 한석칠, 문정섭, 한영흥, 고을협, 고성오, 이동은, 고상범, 신경식, 정병하, 강신천, 강신갑, 이동화, 고화춘, 김여수, 양군부, 김병일, 김병극. (이상 30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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