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편집 2024-03-28 17:35 (목)
“공부 좀 하고 똑똑한 사람들은 대부분 경찰에 끌려갔죠”
“공부 좀 하고 똑똑한 사람들은 대부분 경찰에 끌려갔죠”
  • 홍석준 기자
  • 승인 2023.04.03 11:0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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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5세 박강부씨 “‘너만이라도 살아야 한다’는 할아버지 덕분에 살아 돌아와”
하귀중 교사였던 아버지 “어떻게 죽었는지도 몰라 … 삼형제도 뿔뿔이 흩어져”
제주4.3 제75주년 추념식이 열리기 전 위패봉안실에서 지팡이를 짚고 서 있는 85세 박강부 어르신. 당시 열 살이었던 그는 하귀중 교사였던 아버지가 경찰에 끌려가 희생됐다고 한다. ⓒ미디어제주
제주4.3 제75주년 추념식이 열리기 전 위패봉안실에서 지팡이를 짚고 서 있는 85세 박강부 어르신. 당시 열 살이었던 그는 하귀중 교사였던 아버지가 경찰에 끌려가 희생됐다고 한다. ⓒ미디어제주

[미디어제주 홍석준 기자] 제주4.3 제75주년 추념식이 열린 3일 오전 제주4.3평화공원 내 위패봉안실. 혼자 지팡이를 짚고 서서 물끄러미 위패를 찾고 있는 어르신이 눈에 띄었다.

제주시 애월읍 신엄리 자택에서 11대째 살고 있다는 박강부씨(85). 박씨는 4.3 발발 당시 하귀중(현 귀일중) 교사였던 아버지가 경찰에 끌려가 희생됐다고 한다. 당시 아버지 나이는 33세였다. 하지만 박씨는 장작 아버지가 어떻게 해서 돌아가셨는지 전혀 알지 못한다고 한다.

당시 그의 아버지가 외도파출소로 끌려가자 할아버지가 “너만이라도 살아남아야 한다”면서 무작정 배를 타고 떠나야 했던 것이었다.

“그 때는 배를 탈 때 아이들은 어른 손만 잡고 있어도 그냥 배를 탈 수 있었는데, 나는 전혀 알지도 못하는 할머니의 옷자락을 잡아 배를 탔는데, 내리고 보니 목포였지.”

열 살 나이의 소년이 혈혈단신 머물 곳도 없이 혼자 목포에 도착한 것이었다. 3형제 중 맏이였던 그는 그렇게 배를 타고 목포로 갔다가 여수로, 다시 부산에 머물다가 한국전쟁이 발발했고 서울이 수복됐다는 소식에 서울로 거처를 옮기면서 혼자 객지 생활을 했다고 한다.

이후 둘째는 일본으로 건너가 교포로 살고 있고, 막내는 부산에서 살면서 3형제가 모두 뿔뿔이 흩어져 살고 있다는 그는 군에 입대, 전역한 후 뒤늦게 고향인 신엄리로 돌아와 살고 있지만 여전히 아버지가 어떻게 돌아가셨는지 아무런 얘기도 듣지 못했다고 한다.

돌아가신 아버지 이름을 묻자 그는 어렵사리 입을 열었다. 당시 서른세 살이었던 아버지는 박찬종씨.

다만 박씨는 “그 때는 마을에서 공부 좀 하고 똑똑했던 사람들이 대부분 경찰에 끌려갔다고 한다”면서 “농업학교를 수석으로 입학하고 졸업했던 아버지는 당시 몸이 좋지 않아서 집에서만 있었다는 얘기를 전해 들었다”고 말했다.

다행히 ‘4.3은 말한다’에는 박씨 아버지가 초토화작전 당시 경찰에 끌려가게 된 경위가 간략히 기술돼 있다.

11월 12일 집단총살 때는 신엄리 주민도 일부 희생됐다. 이날 토벌대는 무슨 혐의를 뒀는지 신엄3구 구장인 김용원(金龍元, 39, 이명 김금아)을 호출해 함께 총살했다. 또한 신엄1구 전직 구장인 하달제(河達濟, 46)도 총살대상에 포함됐다. 사위(광령리 출신)가 입산하는 바람에 구장직에서 물러나 있던 하달제는 이날 총에 맞았으나 목숨만은 건져 동생집 마루 밑으로 숨어들었다. 그러나 곧 발각돼 군이 주둔해 있던 외도리로 끌려갔다.

하달제가 외도리로 끌려갈 때는 그의 아내 송기종(宋己鍾, 41)과 아들 하병두(河秉斗, 15), 딸 하원순(河元順, 12)도 함께 끌려갔다. 백창원의 외사촌인 김동규(金東圭, 23)와 하귀중학교 교사였던 박찬종(朴贊宗, 33) 그리고 홍중철(洪重哲, 28)도 함께 갇혔다. 이들은 결국 1948년 12월 17일의 집단 총살 때 희생됐다. 희생자들은 그들이 처한 주변 상황에 의해 '무장대 지원혐의'를 받은 것인데, 한 증언자는 "김동규는 그의 외사촌 백창원과는 전혀 다른 입장에 섰던 사람이었다."고 말했다. ([출처] ‘4.3은 말한다’ 초토화작전 - 애월면 ⑩)

이 부분에 언급된 백창원에 대한 얘기는 별도로 언급된 내용이 ‘4.3은 말한다’에 실려 있다.

한편 백창원의 입산으로 인해 그의 가족들은 토벌대에게 희생됐는데, 그 자신은 무장대의 내부 갈등 끝에 희생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대한청년단 애월면 단장을 지냈던 한 증언자는 “당시 경찰을 통해 들은 말인데, 백창원은 4·3말기에 더 이상의 희생을 막으려 귀순공작을 펴다가 발각돼 인민재판을 받아 사형을 당했다고 한다.”고 말했다.

중산간 마을인 신엄3구는 큰 희생은 면했지만 당시 중산간마을이 일반적으로 치렀던 사건들을 고스란히 겪었다. 낮엔 경찰이 올라왔고 밤엔 무장대가 내려왔다. 5·10선거는 무산됐고, 여름철에는 무장대의 백지날인도 유행했다. 그러나 무장대는 당시 약 60여 호에 불과한 작은 마을을 중시하지 않았고, 토벌대 측에서도 입산자가 없는 이 마을을 주목하지 않았다. ([출처] ‘4.3은 말한다’ 초토화작전 - 애월면 ⑩)

대부분의 중산간 마을이 그랬듯이 ‘낮에는 경찰이 올라왔고 밤엔 무장대가 내려왔다’는 신엄리.

결국 당시 하귀중 교사였던 아버지가 경찰에 끌려가 희생됐지만, 박씨를 포함한 3형제가 그나마 무사할 수 있었던 것은 할아버지가 삼형제 중 장남인 그를 배에 태워 내보내 제주를 떠나 있었기 때문에 화를 피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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