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편집 2024-03-28 19:15 (목)
제주 간첩조작 피해자 수십명 "일본만 다녀와도 간첩으로"
제주 간첩조작 피해자 수십명 "일본만 다녀와도 간첩으로"
  • 고원상 기자
  • 승인 2023.02.22 12:33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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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도 차원 첫 실태조사 보고서 발간돼
간첩조작사건 20건 조사, 피해자는 53명
피해자 공통점 '일본' ... 시대상황도 더해져
"지속적인 실태조사 필요 ... 치유 대책 등도"

[미디어제주 고원상 기자] 해방 전 제주에서 태어난 김양진씨는 5살이 되던 무렵, 부모를 따라 일본으로 건너가게 됐다. 오사카와 후쿠야마 등지를 옮겨다니며 생활했고, 태평양전쟁이 막바지를 향해 달려가고 있었을 당시에는 히로시마에 거주하기도 했다.

1945년 8월6일,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이 투하될 때에는 폭발의 여파가 그의 집을 덮치기도 했다. 그의 집은 순식간에 무너져 내렸고, 무너지는 집에 깔려 그 자리에서 김씨의 어머니가 숨을 거뒀다. 학교에 등교한 김씨의 여동생과 남동생은 시신도 찾지 못했다. 김씨와 김씨의 누나, 매형 등이 살아남았지만, 원폭 현장의 혼란 속에서 살아남은 가족들과도 헤어지게 됐다.

그렇게 집과 가족을 잃은 김씨는 그 후 공장 일하고 공장에서 살며 삶을 꾸려나가던 김씨는 우연히 일본에서 열린 조총련의 시위 현장을 보게 된다. 그 시위 분위기에 압도된 김씨는 그 시위현장에서 비로소 자신이 혼자가 아니라 동향 동포들과 함께 한다는 사실을 느꼈다. 그렇게 김씨는 조총련에 몸을 담게 됐다. 김씨가 아직은 10대였던 시절이었다.   

하지만 그 이후 조총련의 활동에서 비리 등의 모습을 보게 되고 환멸을 느끼다 탈퇴를 하게 된다. 그 이후 조총련 공작원으로부터 간첩활동 등의 제의와 협박까지 받게 되자 김씨는 더 이상 일본에서 살기가 어렵다고 느꼈고, 어린시절 부터 살아온 일본을 등졌다. 1964년 자신의 고향 제주로 돌아왔다.

고향 제주로 돌아온 후 결혼을 하고 농사를 지어 살며 슬하에 2남1녀의 자녀도 두었다. 그렇게 제주에서 평범한 행복을 느끼며 살아가나 싶었던 김씨는 1972년 8월, 갑작스럽게 간첩협의로 체포됐다. 그 후 그를 기다리고 있던 것은 모진 고문이었다.

고문 끝에 그는 결국 간첩 행위를 했다는 허위 자백을 했고, 1973년 2월2일 서울형사지방법원에서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 이어 항소심에서 15년 형을 선고받았고, 대법원에서 이 형이 확정됐다. 그가 15년 형을 받았을 때, 허위 자백을 제외하고 법원에 제출된 증거는 라디오 하나와, 라디오 부속 하나 뿐이었다. 라디오와 모진 고문이 그를 일순간에 간첩으로 만들었다.

이후 13년을 옥살이를 하고 나온 그는 재심을 받지 못하고 있다. 그는 지난해 12월 진실규명신청서를 접수하고, 아직도 억울함을 풀기 위해 싸우고 있다.

♢ 제주에 살며 간첩으로 몰린 억울함, 수십명에 달해

간첩으로 몰린 후 잡혀가 모진 고문 속에서 허위자백을 한 이는 김씨만이 아니다. 제주민주화운동사료연구소가 최근 발간한 ‘2022년 간첩조작사건 피해실태 조사보고서’에 따르면 이번 실태조사에서 조사된 간첩조작사건만 20건에 달한다. 1967년부터 1987년까지 있었던 간첩조작사건이다. 이에 따른 피해자는 53명이다.

이번 피해실태 조사보고서는 제주도 차원에서 처음으로 이뤄진 도내 간첩조작 사건 피해자에 대한 실태를 조사다. 2021년 시행된 ‘제주도 간첩조작 사건 피해자 등의 명예회복 및 지원에 관한 조례’에 따라 이뤄진 조사이기도 하다.

이번 조사에 따르면 김씨 처럼 일본에서 살다온 사람만이 아니라 단순히 일본에서 공부를 하거나 일본 여행을 다녀온 사람들까지 간첩으로 몰려 모진 고문끝에 억울한 옥살이를 해야 했다.

대표적으로 1965년 ‘민주민족혁명당 간첩조작 사건’이 있다.

그 해 12월 현 국가정보원의 전신인 중앙정보부는 “민주민족혁명당을 창당해 남한을 공산혁명으로 적화하려는 목적을 가진 북괴노동당 지하당 공작원 8명을 검거했다”고 발표했다. 그 때 체포된 8명 중 대부분이 제주사람들이었다.

이들 중에는 일본에서 공부를 하고 의학박사 학위를 받은 의사, 대학원 공부를 위해 일본을 다녀온 사람, 1964년 열린 도쿄올림픽을 구경하기 위해 일본 여행을 다녀온 사람 등이 있었다. 이들은 모두 중앙정보부에 잡혀가 모진 고문을 견디지 못하고, 결국 허위자백을 했다. 이들은 1명을 제외하고 모두 대법과 재심에서 무죄판결을 받았다.

북한에 납치됐다가 가까스로 탈출해 제주로 돌아왔지만 간첩혐의를 받은 오경대씨도 있었다. 1967년 중앙정보부에 끌려가 고문 끝에 간첩행위를 했다고 자백했고, 법원에서 징역 15년형을 선고 받았다. 출소후에도 고문 후유증과 연좌제 및 보호관찰 등으로 힘든 삶을 이어가야 했다. 오 씨는 2020년 11월20일 재심에서 무죄판결을 받았다.

♢일본에 다녀오기만 해도, 그들은 간첩이 돼 버렸다

민주화운동사료연구소에 따르면 이번에 조사가 이뤄진 사건의 공통점은 ‘일본’이었다. 연구소가 이번 조사를 위해 심층 인터뷰를 진행한 피해자 10명이 모두 일본과 연관이 돼 있었다.

피해자 10명 중 5명은 돈을 벌기 위해 일본으로 밀항해 살다가 돌아온 후 간첩으로 몰렸고, 2명은 일본 여행을 다녀온 후에 간첩조작사건에 연루됐다. 1명은 본인이 직접 일본에 가진 않았지만, 조카 등이 일본으로 밀항했던 것 때문에 잡혀갔다.

이번 조사에 따르면 1980년대까지 제주에서는 일본으로 밀항하는 이들이 적지 않았다. 일거리를 구하기 위함이었다. 아울러 일본으로 밀항을 하든 여행을 가든, 일본에 먼저 가 있는 지인을 만나거나 친척을 만나는 일도 부지기수였다. 그들에겐 일본에 있는 친척이나 지인이 조총련에 속해 있는지 아닌지는 상관없었다. 그들에게는 이념이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들은 고향으로 돌아와 조총련 관계자를 만났다는 사실 하나로 ‘간첩’의 누명을 써야 했다.

당시 시대상황도 억울한 간첩조작사건의 피해자들을 만들어냈다. 연구진은 제주출신 간첩조작사건의 피해자들이 대부분 군사독재정권의 희생자라고 판단했다. 그러면서 “정당성을 결여한 군사정권은 정치적 위기가 닥칠 때마다 간첩조작사건을 터트려 국민들의 관심을 돌리게 했다”며 “군사정권의 위세에 눌려 언론은 제 역할을 하지 못하기도 했다”고 설명했다.

이번 연구진은 아울러 이렇게 누명을 쓴 이들에 대해 “이제라도 피해자와 유가족의 억울함을 풀어줄 방안을 모색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제언했다. 그러면서 “이미 지난 과거사라며 지나가기에는 피해자와 유가족의 육체적·정신적 후유증이 너무 크다”고 덧붙였다.

이번 조사의 한계점도 지적됐다. 먼저 짧은 조사기간이 지적됐다. 연구진은 “조사기간이 7개월이었는데, 이 기간 동안 피해자들을 찾아 심층 인터뷰를 하기에는 어려웠다”고 말했다.

연구진은 이외에도 ‘간첩조작사건 피해자 등의 인권증진 및 지원에 관한 조례’에서 비롯된 한계점도 지적했다. 이들은 “조례에서는 ‘간첩조작사건’을 ‘유죄판결을 받은 사람이 이후 재심을 통해 무죄를 선고받은 사건’으로 규정하고 있다”며 “재심을 청구하지 못한 사람이나 실형을 선고받지 않고 고문만 받다 풀려난 사람 등은 지원을 받을 수 없다”고 토로했다.

연구진은 그러면서 제주도를 향해 “지속적인 실태조사를 통해 피해자들의 실상을 드러내고, 이를 사회에 알려야 한다. 아울러 피해자 및 유가족의 트라우마를 치유할 대책을 마련하고, 피해자들이 재심을 통해 무죄판결을 받을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할 것”이라고 제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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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준 2023-02-22 13:42:14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 같은데 일본은 이 부분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는지 정말로 궁굼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