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편집 2024-03-29 00:04 (금)
제주4.3 속 75년 전 잡혀간 이들 ... 이들 향한 그리움 법정에 모여
제주4.3 속 75년 전 잡혀간 이들 ... 이들 향한 그리움 법정에 모여
  • 고원상 기자
  • 승인 2023.01.17 12:58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제주지법에서 제22차 직권재심, 피고인 30명 모두 무죄
피고인의 유족들 "아버지, 사진 한 장 남기지 않아 ... 그립다"

[미디어제주 고원상 기자] 17살에서 많아야 23살. 삶을 제대로 피워보지도 못한 나이였다. 75년 전 4.3의 광풍이 몰아치던 제주에서 살아가던 그 청춘들은 자신들이 무슨 죄를 저질렀는지도 모르고 군경에게 붙들려 잡혀갔다. 그들은 1948년 12월과 1949년 7월 이어진 군법회의에서 모두 유죄를 선고받고 제주 밖 형무소로 이송됐다. 그리곤 다시는 고향 제주로 돌아오질 못했다.

그렇게 붙들려가 생을 마감해야만 했던 30명의 영령이 17일 오전 70여년의 세월을 넘어 마침내 명예를 회복했다. 이날 제주지방법원에서 제주4.3 수형인들에 대한 제22차 직권재심이 열렸고, 이 자리에서 박해완 등 30명의 피고인이 모두 무죄를 선고받았다.

이들 30명 중 김두화 등 4명은 1948년 12월 3일부터 28일에 걸쳐 모두 15차례 이뤄졌던 제1차 군법회의 과정에서 모두 유죄를 선고받았다. 이들에게 내려진 죄명은 ‘내란죄’였다.

이들의 죄는 그들이 제주도 ‘중산간’에서 살고 있었다는 것이었다. 4.3이 일어난 후이 1948년 11월21일 국방부는 제주에 계엄령을 선포했고, 그 후 중산간 주민들에게 소개령을 내렸다. 제주 해안에서 5km 이내에 머무는 이들은 무장대로 보겠다는 것이 군경의 입장이었다. 이와 같은 소개령에 따라 사람들은 자신이 태어나 자라고 살아갔던 마을을 등 뒤로 하고 내려왔다. 하지만 그런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은 군경에 의해 잡혀가는 것이었다. 그들은 중산간에서 ‘살았기’ 때문에 잡혀갔다.

그 외 박해완 등 26명은 군경을 피해 한라산으로 피난을 갔다가, 유화정책에 따라 군경이 뿌린 하산을 권하는 전단지를 보고 하산을 결정, 해안가로 내려온 이들이다. 군경의 권고에 따라 산에서 내려오면 살려준다는 말을 믿고 내려왔지만, 이들은 모두 붙들렸고 1949년 7월 모두 국방경비법 위반 혐의로 유죄를 선고받았다.

이렇게 유죄를 선고받은 이들은 자신의 부모와 형제, 자녀들을 남겨두고 제주를 떠나야만 했다. 그렇게 제주를 떠난 이들은 열악하기만 했던 형무소에서 힘겨운 시간을 보내야헸고, 그런 시간 끝에 결국 타자에서 명을 달리했다.

그들이 죽었을 때, 가족들에게 그 소식이 전해진 이들도 있었지만 그렇지 못한 경우도 있었다. 어떤 이는 형무소에서 끌려간 가족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형무소로 찾아가, 인근에 시신을 가매장 하고 2~3년 후 되돌왔다. 하지만 시신이 묻힌 곳으로 돌아왔을 때 해당 지역은 이미 개발이 이뤄져 있었다. 묻은 시신은 어디에 있는지 다시 찾지 못했다.

그들이 그렇게 제주를 떠나고 75년이 지나 법정에 모인 그들의 자녀들은 모두 부모를 그리워했다. 평생 얼굴 한 번 보지 못한 아버지가 사진 한 장 남기지 않고 가셨다고, 한이 맺힌 그리움의 소리를 쏟아냈다.

그들 중에는 고(故) 이원술씨의 아들이자 초대 4.3유족회장을 지냈던 이성찬씨도 있었다.

이씨는 법정에서 “아버지의 얼굴이 기억이 안난다”고 입을 열었다. “사진도 한 장 없었는데,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난 뒤 얼마 안가 어머니도 떠나 할아버지 밑에서 자라게 됐다. 할아버지가 엄한 편이셨는데, 아버지에 대해 물어볼 수도 없어 그냥 모르는채로 지냈다”고 말했다.

이씨가 아버지의 이야기를 들었던 것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성년이 되고 나서였다. 할아버지는 그 때가 돼서야 자신의 가슴 속에 묻어두었던 이야기를 이씨에게 풀어놨다.

이씨의 아버지는 군법회의에서 유죄를 선고받고 대전에 있는 형무소로 끌려갔고, 이씨의 할아버지는 당장 대전 형무소로 자신의 아들을 찾아갔다. 그 자리에서 누군가에게 이런 말을 들었다. “어느 정도의 돈만 마련이 된다면 아들을 형무소에서 빼올 수 있다”고. 이씨의 할아버지는 자신의 아들을 형무소에서 빼내기 위해, 돈을 마련해서 돌아오겠다는 약속을 하고 다시 제주로 돌아왔다. 1950년 봄이었다.

기다림의 봄이었다. 밭의 작물은 아직 덜 자랐고, 수확을 해서 돈을 마련하기까지는 좀더 시간이 필요했다. 이씨의 할아버지는 밭의 작물 수확을 마치면 그 돈으로 아들을 빼오겠다고, 이 봄만 보내고 농사만 마무리하고 올라가면 되겠다고 생각했다. 잘 풀릴 것이라고, 아들은 돌아올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렇지만 시간은 이씨 할아버지를 기다려주지 않았다. 그 해 봄이 지나고, 아직 밭의 수확이 이뤄지지 않았을 때에 전쟁의 포성이 한반도에 울렸다. 한국전쟁이 발발했다. 그 전쟁 속에서 이씨 할아버지는 다시는 아들을 보지 못했다.

이성찬씨는 그런 할아버지를 회고하며 “한탄을 많이 하셨다”고 했다. “자신이 조금만 더 정신을 차리고 빠르게 움직였으면, 전쟁이 나기 전에 형무소에서 빼왔을 텐데, 자신의 아들을 죽이지 않았을텐데 하시며 자책을 많이 하셨다”며 “할아버지는 그렇게 자신이 잘못해서 아들을 죽게했다고 평생을 자첵하며 울고 외롭게 술을 마시며 살다가 돌아가셨다”고 말했다.

젊은 나이에 형무소에 끌려가 그 곳에서 생을 마감해야 했던 고(故) 오병주씨의 딸 오옥수씨도 “평생을 얼굴을 모르는 아버지를 그리워하며 살았다”고 말했다. “아버지의 얼굴을 모르는 것이 한이었다. 아버지는 꿈에도 나타나질 않았고, 밖에서 돌아가셔 묻은 곳도 없고, 지금까지 고생하면서 살았던 시절을 말로 하기가 힘들다”고 말했다.

역시 형무소에서 고인이 된 고(故) 홍이표씨의 딸 홍춘자 씨도 법정에서 평생의 설움을 털어놨다. 홍씨느 “어머니와 아버지의 얼굴을 모르고 살았다”며 “두 살 때쯤 아파서 죽다 살아 평생을 다리를 불편하게 지냈고, 그 후 할머니가 키워주셔서 그나마 걸어는 다닌다. 그런데도 어머니 아버지는 사진 한 장 없다. 사진 한 장이라도 놓고 가시지”라고 토로했다.

재판장은 이들의 사연에 대해 “아직도 4.3이 가야할 길은 멀기만 하다”고 말했다.

그러면서도 이번 제22차 직권재심을 통해 무죄를 선고 받은 이들의 자녀들에게 “다가오는 설 명절만큼은 그 동안의 설움을 내려놓기를 바란다. 좀 더 따뜻한 명절을 보내길 바란다”고 전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딥페이크등(영상‧음향‧이미지)을 이용한 선거운동 및 후보자 등에 대한 허위사실공표‧비방은 공직선거법에 위반되므로 유의하시기 바랍니다.(삭제 또는 고발될 수 있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