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편집 2024-04-18 21:23 (목)
산으로 올라간 제주사람들, 70여년만에 드러난 삶의 흔적
산으로 올라간 제주사람들, 70여년만에 드러난 삶의 흔적
  • 고원상 기자
  • 승인 2022.12.13 16:0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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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기념사업위원회와 마중물 등 4.3유적지 조사결과 발표
2017년 이후 노로오름 일대 조사 ... 집터 등 유적 확인
배기철 4.3통일의길, 마중물 조사단장이 13일 오후 제주도의회 도민카페에서 노로오름 일대에 대한 4.3유적지 조사를 한 결과를 발표하고 있다. /사진=미디어제주.
배기철 4.3통일의길, 마중물 조사단장이 13일 오후 제주도의회 도민카페에서 노로오름 일대에 대한 4.3유적지 조사를 한 결과를 발표하고 있다. /사진=미디어제주.

제주 중산간을 중심으로 한 4.3유적지 조사가 5년여만에 첫 결과물을 내놨다. 이를 통해 70여년 전 제주 애월읍 노로오름 일대로 올라간 그 당시 제주사람들의 삶의 흔적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제주4.3기념사업위원회와 4.3통일의길, 마중물은 13일 오후 제주도의회 도민카페에서 제주4.3유적지 조사보고회를 갖고 제주시 애월읍 상가리 노로오름 일대에서의 제주4.3 당시 제주사람들의 삶을 조사한 결과를 발표했다.

1948년 제주4.3 이후 많은 사람들이 제주의 중산간으로 올라간 것으로 알려져 있다. 1949년 3월 제주지역경비사령관으로 임명된 유재흥 대령은 그 당시 약 2만여명의 제주도민이 중산간에 남아 살아가고 있던 것으로 파악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 당시 제주도민들이 중산간에서 어떻게 생활했는지는 그 실상에 대해서는 정확하게 파악된 바가 없다. 제주4.3기념사업위원회와 4.3통일의길, 마중물 등은 이에 따라 2017년10월부터 노로오름을 시작으로 171차례에 걸쳐 돌오름과 한대오름, 다래오름, 빈네오름, 머체왓, 쌀오름, 산란이오름, 녹하지오름, 마흐니오름, 예래천, 색달천, 창고천, 서중천 등에 대한 조사를 이어갔다.

특히 그 당시 애월읍 사람들은 노로오름을 중심으로 바리메오름과 노꼬메오름, 산세미오름, 궤물오름, 천아오름, 천아계곡 등으로 올랐던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이번 보고회에서는 이 지역에 대한 조사 내용이 공개됐다.

◇제주시 노로오름 일대 삶의 흔적 ... 유물·탄피 등 발견

조사팀은 노로오름 지역을 모두 5개 구역으로 나눠 조사에 나섰다. 그 결과 매 구역마다 빠짐없이 집터와 생활용품, 농기구 등이 발견됐다. 특히 노로오름 일대는 4.3당시 무장대와 토벌대의 전투가 벌어졌던 곳으로, 이를 증명하듯 조사 구역에서 탄피 등도 발견됐다.

5개 구역 중 첫 번째 지역은 ‘산물내’로 불리는 곳이다. 산물내는 노로오름 분화구 인근과 노로오름 남서쪽 개깡낭 밭 사이에 있는 물줄기들이 모여 형성된 내로 하류로 흘러가면서 금성천과 만난다.

이 지역에서는 일본군 주둔 흔적이 연이어 발견됐다. 아울러 산물내를 따라 이어지는 노로오름 서쪽 등산로 주변으로 크고 작은 집터들과 보초터의 흔적들이 모습을 보였다.

이 일대는 제주4.3 당시 무장대와 토벌군이 격돌했던 산물내 전투의 현장으로 알려져있기도 하다. 조사팀 역시 산물내 전투지로 추정되는 안천이오름 동남쪽 약 900미터 지점에서 다수의 매복흔적들을 발견했다. 이외에 다수의 탄피와 탄두, 박격포 불발탄 등이 발견됐다.

두 번째 조사 구역은 족은바리메와 안천이오름 일대다. 특히 족은바리메 등산로에는 일본군 진지 동굴과 그 주변으로 땅을 파서 사용했던 보초터 흔적 등이 발견됐다. 이외에 족은바리메 북동쪽 사면부터 안천이오름 동쪽 사면까지 일본군 숙영지 흔적들이 연이여 확인됐다. 이 중에 4.3당시 이용했거나 그 이후 사용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흔적들도 발견됐다.

조사팀은 이 일대 4.3초기 애월읍 무장대의 근거지로 알려진 굴묵낭궤에 대한 조사도 이어갔다. 이 근처에서 돌을 쌓아 조성된 집터의 흔적이 발견됐으며 그릇조각과 탄피 등 다수의 유물이 나왔다.

4.3유적지 조사 과정에서 발굴된 유물들. /사진=제주4.3기념사업위원회.
4.3유적지 조사 과정에서 발굴된 유물들. /사진=제주4.3기념사업위원회.

세 번째 조사 구역인 노로오름 북서쪽에서는 땅을 파고 살았던 크고 작은 흔적들이 확인됐으며, 그 이외에 화로자리가 온전히 남아 있는 돌로 쌓아 만든 집터 등도 확인됐다.

네 번째 조사 구역은 노로오름 북쪽과 북동쪽이다. 이 일대에 들굽궤라는 동굴이 있는데, 이 궤의 상부에 보초터의 모습이 확인됐으며 궤 주변에서는 군화와 그릇 등 다수의 유물들이 나왔다. 조사팀은 이를 통대 이 궤가 무장대 근거지로 사용됐을 것으로 추정했다. 아울러 궤로 향하는 내 바닥에서 탄피 등도 발견, 이를 통해 이 곳에 대한 토벌도 있었을 것으로 분석했다.

그 외 족은 들굽궤라는 굴에서도 출토된 유물 등을 토대로 많은 수의 무장대가 머물러 있었을 것으로 파악됐다. 이 족은 둘급궤 일대에서는 다수의 집터들과 크고 작은 다른 궤들이 확인되면서, 4.3 당시 많은 주민들이 이곳에 머물러 생활했을 것으로 추정되기도 했다.

마지막 조사구역은 노로오름 분화구였다. 이곳에서는 땅을 파서 살았던 집터 흔적과  놋숟가락, 항아리 조각 등이 출토됐다. 그 외 분화구의 서쪽 능선에서 보초터 흔적과 다수의 탄피 및 탄두가 발견되면서 무장대와 토벌대 간의 치열한 전투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됐다.

4.3유적지 조사 과정에서 발굴된 유물들. /사진=제주4.3기념사업위원회.
4.3유적지 조사 과정에서 발굴된 유물들. /사진=제주4.3기념사업위원회.

◇ "노로오름 일대, 삶의 거점 ... 체계적인 조사 작업 이뤄져야"

조사팀은 이와 같은 조사 내용을 토대로 “이 일대가 치열한 전투의 현장이었을뿐만 아니라, 산을 올랐던 사람들의 삶의 거점이자 터전이었다”는 점을 전했다.

특히 “노로오름 지역은 태평양전쟁 말기 일본군 주둔지라는 역사적 현장으로서의 의미와, 4.3 당시 산에 올랐어야만 했던 제주사람들의 삶과 아픔을 들여다 볼 수 있는 집터 등이 발견되고 있어 역사 및 문화적으로도 중요한 가치를 갖고있는 곳”이라고 덧붙였다.

조사팀은 그러면서 “수많은 아픔과 역사들이 앚혀져가는 현실 속에서 산물내 전투지를 비롯해 몇몇 격전지를 발견할 수 있었던 것은 이번 조사의 큰 성과”라며 “다만 장비와 조사 인력 부족이라는 현실적인 문제와, 제주조릿대로 뒤덮인 생태적 조건으로 조사를 빠르게 진척시킬 수 없었던 것이 아쉬움”이라고 밝혔다.

조사팀은 이외에도 향후 조사를 위한 과제로 기초적인 자료의 공유 등을 언급했다. 조사팀은 그러면서 “개인이나 단체 또는 기관이 갖고 있는 구술자료, 증언채록 등을 통합적으로 데이터베이스화하고 공유하는 시스템을 갖춰, 더 늦기 전에 그 사실들을 확인하고 조사하는 일이 시급할 것”이라며 “이미 많은 시간이 흐른 상황에서 점점 그 자취가 희미해지고 증언해 줄 수 있는 분들이 점차 줄어들고 있다”고 말했다.

조사팀은 아울러 “한라산 중턱에 수많은 유적과 유물들이 묻혀 있는데, 이를 제주의 소중한 역사적 자산으로 남길 수 있는 방안을 마련함과 동시에, 한라산에서의 삶을 이해하고 들여다 볼 수 있는 훈련된 인원과 장비가 동원되는 체계적인 조사 작업이 이뤄져야 할 것”이라고 강조하기도 했다.

또 이번 조사 지역 중 노로오름 분화구 지역을 역사문화유적지로 지정하는 방안에 대해서도 언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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