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편집 2024-03-29 17:52 (금)
“4·3도 당당하게 현대사의 기억임을 내세우자”
“4·3도 당당하게 현대사의 기억임을 내세우자”
  • 김형훈 기자
  • 승인 2022.11.30 11:1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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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 유해를 걷다] <9> 기획을 마치며

마을신문 <아라신문>과 의미 있는 기획

‘학교 밖’ 행사여서 한계를 지닌 아쉬움

“5·18처럼 가치를 제대로 알릴 필요성”

[미디어제주 김형훈 기자] 지난 5월이다. 마을신문인 <아라신문>과 이야기를 나누다가 학생기자들을 위한 4·3교육을 진행해 보자며 의견을 교환했다. 그렇게 시작된 기획은 ‘4·3 유해를 걷다’라는 제목으로 올해 11월 초까지 진행됐다. 제주도내 인터넷 종합신문인 <미디어제주>와 마을신문인 <아라신문>이 공동으로 기획을 했다는 점에서 무척 의미 있는 일이기도 했다.

5월부터 11월이라면 꽤 긴 시간인데, 기획은 생각과 달리 추진되지 못한 아쉬움이 컸다. <아라신문> 학생기자들을 대상으로 진행하려고 하자, 마을기자들도 참여를 하면서 폭은 넓어졌으나 현장 답사는 뜻대로 하질 못했다. 아무래도 ‘학교 내’가 아닌, ‘학교 밖’이라는 한계가 작용했다. 만일 ‘4·3 유해를 걷다’라는 프로그램이 학교에 포함된 기획이라면 어땠을까? 달라졌을 건 분명하다. 대부분의 학생 평가 기준은 학교내 프로그램을 위주로 하기에, 학교 밖에서 진행하는 프로그램을 연속적으로 하는 데는 한계가 뒤따를 수밖에 없었다. 내년에도 이 프로그램을 가동한다면 <미디어제주>와 <아라신문>, 학교 공동 기획으로 더 좋은 성과를 내고 싶다.

‘4·3 유해를 걷다’는 주제별로 4·3을 훑어보기로 했다. 문학을 통해 4·3을 접하고, 건축을 통해 4·3을 접하고, 학교를 통해 4·3을 접하는 등 기획의도대로 진행됐다. 그 점은 무척 만족하다는 평가를 받았다.

답사지를 선정하면 사전 답사를 하고, 자료를 작성하는 과정을 거쳤다. 그런 뒤에 학생기자와 마을기자들에게 자료를 배포한 뒤 현장을 둘러보는 일정으로 진행됐다. 그걸로 그치지 않았다. <미디어제주>에 보도를 함으로써 주제별 현장답사의 가치를 다시 새기는 기회를 가졌다.

이젠 현장을 둘러보면서 아쉬웠던 장면을 얘기하고자 한다. 제주4·3은 1948년 4월 3일 일어났기에 ‘4·3’을 달고 있지만, 그에 앞선 장면은 더 중요하다. 바로 1947년 3월 1일이다. 그 현장은 제주시 원도심 일대에 있다. 특히 관덕정 일대에서 경찰의 발포로 희생된 제주도민들이 분명히 존재했다. 그런 역사적 사실은 존재를 하는데, 답사를 하며 둘러본 현장은 아무 것도 없었다. 단지 있었다면 조선시대를 기억하는 관덕정과 제주목 관아였다. 우리는 20세기의 현대사는 잊어버린채, 봐 보지도 못하는 과거에 얽매이는 현장을 봐야 했다. <미디어제주>와 함께 답사를 했던 <아라신문>의 학생기자와 마을기자들도 이 점을 무척 안타깝게 여겼다. 왜 현대사의 장면을 우리는 새기지도 못하고 있을까? 드러내지 못하는 역사일까? 그건 아니지 않은가.

이상하리만큼 조선시대 역사가 존재하는 곳은 4·3이 들어갈 영역을 허용하지 않는 느낌이다. 11월 초, 그러니까 마지막으로 답사 일정을 진행한 곳은 화북진성을 비롯한 화북 일원이었다. 화북진성은 화북초등학교가 있던 자리였다. 4·3의 피해를 본 곳이다. 여기엔 화북진성에 대한 소개만 있을 뿐, 아무리 눈을 비비고 봐도 4·3이라는 글자는 찾을 수 없었다.

4·3과 5·18. 30년의 간극이 있긴 하지만 현대사의 두 장면을 바라보는 모습은 너무 차이를 드러낸다.

5·18의 최후 항전지였던 옛 전남도청을 주변은 역사 현장의 터이면서, 거대한 문화현장으로 자리를 틀고 있다. 옛 전남도청 주변은 아시아문화전당(ACC)이 자리를 잡고 있다. 거기서는 5·18만 기억하지 않는다. 현대사의 아픔도 기억하면서, 어떻게 현대사의 아픔을 긍정적으로 승화시킬지에 대한 고민을 한다. 더 중요한 것은 ‘잊지 않는다’는 점이다. 헬기에서 쏜 총탄의 흔적을 지닌 ‘전일빌딩’은 사라질 위기를 견뎌내고 당당히 서 있다. 역사는 잊힐 산물이 아니라고 말한다. 옛 전남도청 주변도 마찬가지이다. 건물 곳곳은 총탄의 흔적을 그대로 품고 있다. 그 총탄은 말한다. “잊지 말아달라. 5·18”이라면서.

전남 나주 금성관 앞에 세워져 있는 '전라남도 5.18 사적지 나주-3호' 표석. 미디어제주
전남 나주 금성관 앞에 세워져 있는 '전라남도 5.18 사적지 나주-3호' 표석. ⓒ미디어제주
옛 전남도청 주변은 5.18 당시 총탄의 흔적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미디어제주
옛 전남도청 주변은 5.18 당시 총탄의 흔적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미디어제주

더 놀라운 점은 5·18을 겪은 광주 일대에만 5·18이 있지 않다는 점이다. 전남 나주는 5·18과 전혀 관련이 없어 보이지만, 5·18을 겪은 이들은 그게 아니라고 한다. 나주에 가면 예전 관아인 ‘금성관’을 만나게 되는데, 여기는 조선시대 나주목사가 머물던 곳이다. 그 일대 주변으로 나주군청이 존재했는데, 현재 나주군청은 사라졌으나 중요한 표석 하나를 만날 수 있다. ‘전라남도 5·18 사적지 나주-3호’라는 이름의 표석이다. 그 내용을 옮겨본다.

이곳은 19805·18민주화운동 당시 나주 군청이 있었던 자리로, 521일 광주 외곽이 봉쇄되어 광주 진입이 불가능하게 되자 전남 각 지역에서 모여든 수많은 시위대가 집결하는 장소였으며, 나주 지역민들은 민관이 합심하여 시위대를 위해 김밥과 주먹밥 등 식사와 음료 및 잠자리까지 제공해 주었던 곳이다. 또한 23일과 24일에는 시위대들이 가지고 있던 M1소총, 카빈소총 등의 총기류를 군청 앞마당에 자진 반납하였던 곳으로 5·18민주화운동 기간 중 나주지역이 평화적으로 시위를 마무리할 수 있도록 이용되었던 장소이다.

나주 일대 역시 목관아를 복원하는 작업이 한창인데, 현대사를 기억하고 있다. 관덕정 일대의 현대사를 잊고 있는 우리와는 다르다. 역사는 ‘유물’이 되어서는 안된다. 역사는 제대로 드러낼 때 가치를 지닌다. 우리 4·3도 숨죽이지 말고 제대로 드러내는 작업이 요구된다. ‘4·3 유해를 걷다’ 기획을 하며 학생기자들 역시 그 점에 공감했음은 물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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