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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9년 10월 2일 제주비행장 249명 학살, 침묵한 언론”
“1949년 10월 2일 제주비행장 249명 학살, 침묵한 언론”
  • 홍석준 기자
  • 승인 2022.11.25 17:1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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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허호준 기자 ‘제주4.3시기 언론의 4.3인식과 보도의 변화’ 주제발표
“진실을 외면한 왜곡 보도 피해, 고스란히 제주도민에게” 언론의 책무 강조
1949년 10월 2일, 이승만의 재가를 받고 제주비행장에서 249명이 불법적인 군법회의 선고 결과에 따라 집단 학살됐지만, 당시 이 사건은 어느 신문에도 보도되지 않았다. 사진은 지난 2007년 제주공항 내에서 발견된 집단 학살터에 대한 유해 발굴현장 모습. /사진=제주4.3평화재단
1949년 10월 2일, 이승만의 재가를 받고 제주비행장에서 249명이 불법적인 군법회의 선고 결과에 따라 집단 학살됐지만, 당시 이 사건은 어느 신문에도 보도되지 않았다. 사진은 지난 2007년 제주공항 내에서 발견된 집단 학살터에 대한 유해 발굴현장 모습. /사진=제주4.3평화재단

[미디어제주 홍석준 기자] 제주4.3 시기, 언론의 4.3에 대한 인식과 보도 내용은 어땠을까.

1947년 3.1절 발포 사건 이후 4.3이 무장봉기로 이어지던 3.10 총파업 시기와 4.3 무장봉기 발발 전후 시기, 5.10 선거와 6.23 재선거를 전후한 시기로 나눠 당시 언론 보도 내용을 재조명한 연구 결과가 발표돼 눈길을 끌고 있다.

허호준 한겨레신문 선임기자는 25일 열린 제주4.3 제74주년 기념 학술대회에서 ‘제주4.3시기 언론의 ‘4.3 인식과 보도의 변화’ 주제발표를 통해 당시 언론의 보도 내용을 조사, 분석한 내용을 소개했다.

사건 당시 언론 보도가 진실을 파악하는 데 도움이 되는 것은 물론, 어떻게 왜곡됐으며 이같은 왜곡이 사건 전개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 파악할 수 있다는 이유에서다.

허호준 선임기자의 이날 발표에 따르면 1947년 당시 제주도 현지 취재에 나섰던 언론사가 7곳 정도 있었다고 한다.

당시 취재기사 내용이 발굴된 언론사는 경향신문과 독립신고, 공립통신 등 3곳이다.

경향신문 이선구 기자는 제주 섬과 섬 사람들의 특성을 ‘단단한 지역 공동체가 단일대오로 외부에 맞서고, 특권계급이 없다’는 내용의 분석 기사를 썼다.

“30만 주민이라고 하는 섬사람들은 제주도 특유한 지방색과 더불어 서로가 친밀하게 가족적인 우의 가운데 굳게 결합되어 그들이 얼마나 뜨거운 향토애를 가졌느냐는 것은 말을 몇 마디 주고 받는 동안에 곧 발견할 수가 있는 것이다. … (중략) … 따라서 그들은 해방 이후에도 육지의 영리한 무리들처럼 천박한 분열이라는 것을 모르고 오직 제주섬의 행복을 위하여 착한 형과 혹은 현명한 아들이 하자는 대로 모두 한가지 이념 아래 손쉽게 엉킨 것이다. 그들 가운데는 특권계급이라는 것이 없다.” (경향신문, 1947.4.2.)

빈부 격차가 없고, 특권계급이 없는 제주도민 사이의 동질성에 주목했던 당시 언론 보도 내용을 소개한 것이다.

1948년 제주도 현지 취재에 나섰던 대한일보 이지웅 기자가 “고래로 소유력이 균등하여 부의 차가 없고 권력의 행사가 없는 것이 본도 정치 경제 양면으로 보는 특색이다”(대한일보, 1948.6.3.)라고 평가한 부분도 확인된다.

조선통신 조덕송 기자도 “작년 3.1 제주도 총파업 사건은 이러한 도민의 공통성과 단결성을 여실히 증명하고도 남을 것”이라면서 총파업이 성사될 수 있었던 도민들의 단결력에 주목했다.

공립통신 진학주 가자가 관덕정 앞 발포사건을 목격자들을 대상으로 취재 보도한 내용도 발굴됐다.

“관덕정 앞 발포사건은 경관들이 발포한 38발로서 16명의 사상자의 시체 급(及) 신체를 조사한 결과 1명을 제외하고 전부가 배측(背側)으로부터 탄환을 맞은 것, 부상자는 전부 시위 군중이 아니고 구경꾼이었던 것, 사상자는 제1구서 앞이 아니로 반대측 식산 현관, 서장 관사 현관 골목 안 등인 것, 시위군중은 전연 무기를 휴대치 않았던 것으로 보아도 발포에 이를 위급한 상황이 아니었다는 것이 당시 목격자들의 담화를 종합한 결과다.”

당시 진학주 기자는 3.1절 발포사건 당시 38발의 총알이 발포됐고, 16명의 사상자 가운데 1명을 제외한 15명이 전부 뒤에서 총을 맞은 구경꾼이었다는 상황을 보도한 것이다.

3.1사건에 대한 조병옥 경무부장의 담화가 다른 지역 언론 중에서도 자세하게 언급된 서울석간(1947.3.21.)의 보도 내용도 소개됐다.

정부 수립 이후 언론의 4.3에 대한 인식을 들여다볼 수 있는 다수의 기사들이 소개되기도 했다.

특히 허 기자는 제주도의 사태를 우려하는 언론 보도가 1948년 10월 이후 사실상 사라지고, 군‧경의 제주도 파견과 전과 위주의 발표가 이어진 상황에 주목했다.

9월 하순까지만 해도 토벌대 증원이 역효과를 내거나 제주도 사태의 원인이 알질 경찰로부터 기인했다면서 물리력만으로는 사태를 막을 수 없다는 우려의 목소리가 나오기도 했지만, 포고령과 계엄령 공포를 전후한 시기에는 이같은 언론 보도가 없어진 것이다.

실제로 ‘악질 경관에서 기인, 외인이 본 제주사태’(한성일보, 1948.9.26.), ‘악질 경관 등 원인, 제주도 사태와 춘천공보원장 담’(서울신문, 1948.9.26.), ‘역효적인 경관 증원? 제주 동란 진압은 전도 요원’(평화일보, 1948.9.29.), ‘사태 진압 요원, 제주도의 평화는 언제나?’(대구시보, 1948.9.29.)라는 제목의 기사들이 보도됐지만 이후에는 제목에서조차 제주도 사태를 우려하는 기사를 찾아볼 수 없게 된 것이다.

오히려 10월 13일 국내 언론은 제주발 합동통신 기사를 인용, ‘괴잠수함’의 제주도 연안 출현설을 대대적으로 보도한 데 이어 ‘제주도 밀림지대서 국군과 무장폭도 교전 쌍방 전사 89명 추측’(남조선민보), ‘포화에 싸인 제주 폭도와 국군 교정 쌍방에 사상’(국제신문) 등 기사가 잇따라 보도됐지만 이 시기 제주 상황을 전한 언론 보도는 모두 합동통신 기사 뿐이었다.

하지만 정작 잠수함 출현설은 나중에 가짜뉴스로 판명됐고, 쌍방간 전투라는 제목으로 보도된 사안도 토벌대의 일방적인 토벌이었던 것으로 확인됐다.

5.10 재선거를 전후로 한 시기에는 제주 현지를 답사한 기자들조차 일방적으로 군‧경을 옹호하는 기사들로 채워졌다.

초토화 시기 학살된 제주도민과 제주도의 참상은 전하지 않은 채 ‘평화의 낙토를 건설하자’고 한 이승만의 발언을 보도하거나 군경의 희생으로 도민들이 절망에서 벗어나고 있다는 식의 보도가 이어졌다.

한겨레 허호준 선임기자가 25일 제주4.3연구소 주최 학술대회에서 '4.3시기 언론의 4.3인식과 보도의 변화' 주제발표를 하고 있다. ⓒ미디어제주
한겨레 허호준 선임기자가 25일 제주4.3연구소 주최 학술대회에서 '4.3시기 언론의 4.3인식과 보도의 변화' 주제발표를 하고 있다. ⓒ미디어제주

특히 허 기자는 1949년 10월 2일, 이승만의 재가를 받고 제주비행장에서 249명이 불법적인 군법회의 선고 결과에 따라 집단학살된 사실이 어느 신문에도 보도되지 않았던 당시 끔찍한 상황을 되짚었다.

제주도 사건이 마무리되는 시점에 249명을 한꺼번에 처형한 것은 유례가 없는 일이었다는 점을 들어 “한국전쟁 이전 국가에 의한 대규모 집단 처형은 이 사건이 유일했지만, 어느 신문에도 보도되지 않았다”고 전했다.

허 기자는 발표를 마무리하면서 “4.3 시기 미군정과 신생 대한민국은 제주도의 ‘민족사적 비극’을 폭도나 반란군, 공산주의자들의 폭동 내지는 반란으로 규정했고, 그 속에서 죽어간 숱한 제주도민의 억울함과 참상을 보도한 언론은 없었다. 정보는 소통되지 못했고, 진실은 철저히 왜곡됐다”고 냉정하게 진단했다.

포고령과 계엄령 이후 제주 상황에 대한 보도는 왜곡되거나 사라지면서 암흑기가 찾아왔고, 국방부의 전황 보고를 알리는 기사에는 보도 통제를 의미하는 ‘검열’이라는 글자가 붙었지만 어느 언론도 대량 학살에 대한 의문을 제기하지 않았던 상황을 전했다.

제주도는 ‘붉은 섬’으로, 도민은 폭도나 반도, 공산도배로 낙인찍히면서 정부에 의한 학살이 정당화될 수 있었던 요인이 ‘언론의 실종’에 있었음을 목도한 것이다.

그는 “언론의 왜곡 보도와 보도통제는 4.3이 끝난 뒤에도 계속돼 도민들에게는 4.3 시기나 그 뒤에도 오랜 기간 붉은 낙인이 찍히도록 했다”며 “4.3 시기 언론의 진실 보도를 외면한 왜곡 보도의 피해를 제주도민이 고스란히 입었다”고 전했다.

“국가 공동체에서 발생하는 역사적 사건의 진실 보도는 언론의 중요한 책무”라는 허 기자의 마지막 멘트와 함께 70여 년이 지난 대한민국의 현실에서도 여전히 유효하다는 그의 발언은 짧지만 깊은 울림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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