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편집 2024-03-28 19:15 (목)
“수형소 끌려가 병들어 죽고, 한국전쟁 때 총 맞아 죽고…”
“수형소 끌려가 병들어 죽고, 한국전쟁 때 총 맞아 죽고…”
  • 홍석준 기자
  • 승인 2022.11.15 14:4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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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 직권재심 법정, 70년 넘게 묻어둔 희생자‧유족들의 기구한 사연 이어져
제18차 4.3 군사재판 수형인 직권재심, 내란죄‧국방경비법 위반 모두 무죄
제주4.3평화공원 내 행불인 묘역에 있는 조형물. 당시 수형인들이 가족들에게 보내온 편지 문구가 눈에 밟힌다. ⓒ미디어제주
제주4.3평화공원 내 행불인 묘역에 있는 조형물. 당시 수형인들이 가족들에게 보내온 편지 문구가 눈에 밟힌다. ⓒ미디어제주

[미디어제주 홍석준 기자] “피고인들은 내란죄 또는 국방경비법 위반죄로 기소됐으나 희생자 신고인, 유족, 인우 보증인의 진술 등에 의하면 피고인들은 아무런 죄가 없음에도 군‧경에 연행되어 군법회의에 의해 처벌받은 것으로 보이고, 달리 피고인들이 내란죄 또는 국방경비법 위반죄를 저질렀다는 증거가 전혀 없습니다. 따라서 피고인들 모두에게 무죄 판결을 선고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제18차 제주4·3 군사재판 수형인 직권재심이 열린 15일 오전 제주지방법원 201호 법정.

30명의 수형인 희생자들에 대해 무죄를 선고해달라는 취지의 검찰 모두진술 내용은 한결같았다.

하지만 억울한 누명을 쓰고 수형소로 끌려가 병들어 죽고, 한국전쟁 발발 후에는 형무소 인근에서 총맞아 죽은 희생자의 유족들이 전하는 기구한 사연은 끝없이 이어졌다.

큰아버지가 대구형무소로 끌려갔다가 마산형무소에서 이질로 돌아가셨다는 조카 오한준씨는 형무소 소장이 보낸 편지를 통해 큰아버지 사망 소식을 알게 됐다고 한다.

당시 49세였던 할아버지는 형무소로 끌려간 큰아버지를 찾으러 나섰다가 인근 초등학교에 수용돼 재판도 받지 못하고 총탄에 숨진 사연을 담담하게 전하기도 했다.

아버지로부터 들은 얘기가 있느냐고 묻는 질문에 오씨는 “워낙 트라우마가 심해서 말을 잘 안하셨다. 14살 때 겪은 일 때문에 큰 충격을 받으신 것 같다”고 생전의 아버지 모습을 회고했다.

17세의 나이로 형무소에 끌려가 숨진 5촌 당숙의 사연을 소개한 조카 현원택씨는 당시 가시리 마을이 초토화된 후에도 큰할머니가 혹시나 아들이 돌아오지 않을까 해서 혼자 그 마을 떠나지 못한 채 살다가 돌아가셨다는 사연을 전했다.

또 자신의 장인이 대를 잇기 위해 어린 나이에 혼인신고도 하지 못하고 결혼해서 살다가 딸을 낳았는데, 4.3 때 장인이 끌려가는 바람에 그 딸을 5촌 삼촌의 딸로 입적시키고 재가한 후 살다가 돌아가신 장모님의 기구한 사연을 소개한 한규숙씨의 가족사도 들을 수 있었다.

한씨가 “장모님 산소가 삼양 원당봉에 있었는데, 장모님 댁 어르신들의 허락을 받아 장모님 제사를 모셔와 장인 제사와 함께 모시면서 시신도 없는 장인 묘소에 비석을 세워 함께 모셔두고 있다”는 얘기를 소개하자 옆에 있던 아내는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흐느끼다가 “아버지는 자식이 나 하나뿐이었다. 오늘도 아픈 다리 때문에 오지 않으려다가 유족회 분들 얘기를 듣고 참석했다”면서 울음을 삼켰다.

유족들의 사연 소개가 이어지던 중 ‘좀 짧게 하자’는 방청객의 얘기가 나오자 재판부가 단호하게 방청객을 퇴정시키는 상황이 빚어지기도 했다.

장찬수 부장판사는 “유족들이 70년 넘게 살아온 얘기를 들으려면 밤을 새워도 모자랄 거다. 그 짧은 20분을 기다려주지 못하겠느냐”면서 재판부가 가급적 유족들의 사연을 많이 듣기 위해 배려하는 이유를 거듭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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