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북진성에 있던 학교는 모두 타버려
주민이 주민을 죽이는 참극도 일어나
옛 화북지서엔 여전히 ‘폭도’로 명기
[미디어제주 김형훈 기자] 4.3이라는 거대한 물결은 모든 걸 삼켰다. 살기 위한 몸부림은 처절했다. 죽음이 있던 현장은 교육계라고 다르지 않다. 제주 도내 학교 곳곳은 4.3의 아픈 흔적을 지니고 있다. 다만 보이지 않을 뿐이다.
교육계가 피해를 벗어날 수 없었던 이유는 교사는 물론 학생들도 4.3 봉기와 떼려야 뗄 수 없는 연관성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다. 해방을 맞고 나서 학생들은 청년조직을 만들며 활동하는데, 진보적인 교사들의 영향을 무시하지 못한다.
4.3의 발발 원인 중 하나인 1947년 3.1사건만 하더라도 수많은 학생들과 교사들이 연관돼 있다. 수배되기도 하고 체포된 이들이 있고, 고문도 당했다. 실제 죽음으로 이른 경우도 있다.
조천지서에 작년 3.1사건의 피의자로서 유치 중이던 조천리 청년이 유치장 내에서 급사한 사건이 발생하였다. 사망자는 조천면 조천리 하동에 주소를 둔 김용철(당년 22세)이란 청년인데, 작년 3.1사건의 피의자로서 경찰에서 수배중이었는데, 지난 3월 4일 대흘리 2구에서 피신 중이다가 경찰에 체포되어 유치 중이었던 바, 6일에 이르러 돌연 급사하였다고 한다.
- <제주신보> 1948년 3월 12일자
김용철 고문치사 사건은 민심에 불을 질렀다. 그의 장례식에는 분노에 찬 도민들이 각지에서 몰려들었다고 한다. 어쩌면 4.3은 당연히 일어날 수밖에 없는 항쟁이었다. 일부 중학생들은 무장봉기의 주체가 되기도 했다.
아라신문 학생기자·마을기자들과 옛 화북초등학교를 찾았다. 화북진성 안에 학교가 존재했는데, 지금은 흔적도 없다. 옛 화북초등학교는 4.3으로 완전 불타면서 학교와 관련된 모든 기록이 사라졌다. 옛 화북초의 흔적을 뒤지면 너무 아픈 이야기가 나온다.
4월 3일 봉기가 발발하면서 화북지서로 쓰던 공회당이 불타고, 순경과 급사 각각 한 명이 숨진다. 5월 10일 총선거를 앞두고 화북 내에서는 투표를 하지 말자는 분위기가 확산되면서 주민 대부분은 중산간 마을인 월평과 영평, 용강 등지로 올라갔다고 한다. 그러다 시간이 흐르며 사람들은 마을로 다시 내려왔으나 죽음의 기운은 가을부터 몰려왔다. 마을의 청년들이 어딘지 모르게 자취를 감추기 시작했다. 이듬해는 충격적인 사건이 발생한다.
1949년 1월 8일. 그날은 토요일이었다. 낮 1~2시 쯤이었다. 요란한 비상 종소리가 울리면서 마을 주민들은 학교 운동장으로 불려 나왔다. 1991년에 발간된 <화북동향토지>에 실린 내용을 잠시 옮겨본다.
마을 사람들은 멋모르고 공포속에 서로 얼굴만 쳐다보며 남녀노소 모였더니 호명을 하기 시작하며 앞으로 나와서 열을 지으라는 것이다. 80여 명이 앞으로 나갔더니 이 분들에 대한 죄명이 공비와 내통하였고 그 자식들이 산에 올라갔으니 사형을 시킨다는 것.
호명받지 않은 사람 중에 다소 젊은 사람을 뽑아 철창으로 찔러 죽이라는 것이었다. 이러고 보니 그 중에는 친척도, 이웃도, 평소 삼촌조카하며 살아온 처지에 그럴 수가 있겠는가.
차마 못할 일이며 짐승도 못할 일이지만 총구를 들이대고 하라는 것이었다. 같은날 같은 시각에 80여 명이 같은 장소에서 죽고 말았다. 참으로 처참하고 비통한 일이며, 이때 죽은 분들은 역대 화북을 이끌어온 유지들이 대부분으로 한꺼번에 부부가 참살되니 대가 끊어진 집안이 거의 전부가 되고 말았다.
- <화북동향토지> 중에서
초등학교 운동장에서 있을 수 없는 일이 발생했다. 당시의 참혹함을 <화북동향토지>는 그나마 차분하게 설명하고 있다. 그 소식은 무장대에게 전해졌다. 사흘 후인 1949년 1월 11일 무장대가 내려와서 화북초등학교를 완전 불살라 버린다.
<화북동향토지>는 학교에서 일어난 처참한 죽음이 1월 8일만 아니라고 한다. 1월 23일인 일요일에도 15명이 참사를 당했다고 적고 있다.
이같은 끔찍한 사건이 학교에서 발생했으나, 관련 기록은 <화북동향토지>에만 보일 뿐이다. 제주4.3평화재단이 펴낸 <제주4·3사건 추가진상조사 자료집-교육계 4·3 피해실태>을 보면 화북초등학교는 평온한 것으로 나온다. <화북동향토지>는 주민들의 학살 장소가 학교 운동장으로 나오지만, 제주4·3평화재단 자료집은 그런 언급이 없다. 그렇다면 어느 기록이 정확할까. <화북동향토지>를 만들 당시엔 4·3에 대한 피해를 꺼내는 일이 쉽지 않았다. 그럼에도 <화북동향토지>는 피해 사실에 대한 이야기를 언급하고 있다. 책을 펴낸 이들의 기억도 더욱 또렷할 때여서 <화북동향토지>에 실린 이야기를 허구로 취급하기는 어렵다. 좀 더 체계적인 조사가 요구된다.
아라신문 학생기자와 마을기자는 옛 화북초등학교를 둘러보는 것에 그치지 않았다. 4·3봉기가 일어났을 때 피해를 입었다는 화북지서 터도 훑었다. 주민들의 공회당으로 썼던 그곳은 조용하기만 하다. 그러나 그런 정적을 깨는 비석이 눈길을 사로잡았다. 극우단체에서 세운 표지석이었다. 여전히 4·3봉기를 일으킨 이들을 ‘폭도’로 명기하고 있다. 우리는 언제까지 ‘폭도’로 불려야 하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