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편집 2024-03-29 00:04 (금)
시라도 내렸으면 좋겠다
시라도 내렸으면 좋겠다
  • 홍기확
  • 승인 2022.06.20 09:3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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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의 조각모음]<39>

제주도가 아열대 기후가 되려나 보다. 여름이 아닌데도 덥거나, 봄인데도 춥다. 느닷없이 비도 내리고, 원래부터 안 맞았던 일기예보는 더욱더 가혹하게 비 올 확률 50%를 자랑스럽게 내민다. 도대체 비가 온다는 거냐 만다는 거냐! 사계절이 뚜렷한 대한민국에 태어난 걸 나름 자랑스럽게 생각했는데, 삐졌다.

며칠째 비가 오다 말다 하고 있다. 어쩌면 기상청의 중계는 정확하다. 비 올 확률이 50%라고 한다면, 다시 말해 비가 ‘오다(50%) 말다(50%)’하는 것 아닌가? 나름 참신한 표현이라 생각하면서 사뭇 1904년에 설립된 기상청의 웅혼한 기상과 절묘한 언어의 곡예에 감탄하게 된다.

이렇게 추적추적 비가 오는 날씨는 반갑지 않다.

차라리, 시(詩)라도 내렸으면 좋겠다.

시집 10권을 도서관에서 빌렸다. 감수성(感受性)이라고는 내 마음속 모든 감정을 끌어모아 봤자 0.001%를 차지하는 나 같은 냉혈동물에게 시집은 뜨거운 담요와 같다. 그 담요를 한 겹 한 겹 덮어 보았다.

동화책도 4권을 빌렸다. 동심(童心) 역시 없는 나에게 동화책은 나른한 오후 툇마루에 엎어져 아무 걱정 없이 자던, 그 시절의 꼬마를 기억에서 소환한다.

시집과 동화책을 읽으며 생각에 잠긴다.

그리고 시(詩)가 내렸다. 아래의 시가, 위의 비보다 낫다.

 

『아랫동네 아이』 홍기확

나는 윗동네 아이였다

산동네 237번지

윗동네 너른마당에는 항상 뛰어노는 아이들이 가득했다

그 중 한 친구의 아버지는 고물장수였다

그 친구는 어느 골목에나 나오는

아버지가 가장 무서웠다, 무서워했다

리어카의 부드러운 바퀴는

언제나 소리소문없이 우리 앞에 나타났다

그뿐이랴, 동네 친구들이 모인 너른마당이든 어디든 쏘아 다녔다

그러다 아저씨와 동네에서 마주치면

부끄러운 표정으로 우리에게 강냉이 한 움큼을

봉지에 담아 주시며 항상 말씀하였다

“친구니까 나눠 먹고 우리 애랑 사이좋게 지내라”

우리는 강냉이를 먹으며 행복했고,

고물장수 아들이었던 내 친구는 먹지 않았다

아버지와 길에서 마주치면 창피해하던 친구

안타까웠던 나는, 비상한 머리로 계책을 짜내

고물상 아저씨에게 말했다

아저씨, 다른 동네에 가보니,

다른 고물상 아저씨들은 가위로 차각차각

멋있는 소리를 내면서 나타나시던데

아저씨는 그런 거 없나요”

술에 절고 햇빛에 검게 탄 얼굴과 깊게 파인 주름 위로

아쉬움과 부끄러움, 놀람이 교차하는 게 보였다

지금 와서 그 다사다난하고 복잡미묘한 눈빛이 기억나는 건,

그리고 문득 이해가 되는 건,

내가 아버지가 된 지 15주년 기념이라서인가 보다

며칠 후 동네에 찰각찰각 가위소리와 함께

‘고물 사요’라는 외침이 들렸다

친구는 멀리서 들려오는 가윗소리와 아버지의 외침으로

더 이상 고물상 아버지와 마주치지 않았다

윗동네 고물상 아버지는 그 이후 더욱 술을 많이 드셨다고 했다

얼마 후 윗동네 대문에는 "장례중"이라는 등(燈)이 걸렸다

그 이후로 나는 윗동네 골목으로 다니지 않았다

산동네 중간쯤에 살았던 나는,

그 이후 아랫동네 아이가 되었다


 

일상의 조각모음

홍기확 칼럼니스트

2004~2010 : (주)빙그레, 파주시, 고양시, 국방부 근무
2004~2010 : (주)빙그레, 파주시, 고양시, 국방부 근무
2010~현재 :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근무
수필가(현대문예 등단, 2013년)
경영지도사(마케팅), 박물관 및 미술관 준학예사, 관광통역안내사(영어)
현 서귀포시청 공무원 밴드 『메아리』회장 (악기 : 드럼)
저서 : 『평범한 아빠의 특별한 감동』, 2015년, 지식과감성#
『느리게 걷는 사람』, 2016년, 지식과감성#
『일상의 조각모음』, 2018년, 지식과감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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