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편집 2024-04-19 16:27 (금)
그리운 표선백사장 길 따라_1부
그리운 표선백사장 길 따라_1부
  • 미디어제주
  • 승인 2022.05.16 10: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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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미아의 독서 칼럼] <10>
1부 : 천혜의 마을 표선
그리운 표선백사장 길 따라 송미아
그리운 표선백사장 길 따라 ⓒ송미아

설화문화연구 표선선집 “그리운 백사장 길 따라”를 위해 탐방한 표선백사장은 여전한 기억의 빛을 내뿜는다. 당시 서하동 끝에 살았던 필자는 백사장 인근 친구와 만나며 이곳을 수시로 드나들었다. 눈 오는 날, 바람 부는 날의 공기가 어떻게 다른지 알 만큼 우리는 백사장을 좋아했다. 사춘기 전후에 수시로 드나들었던 백사장 돌 둑에서는 친구와 문학 수다 꽃을 피웠다. 그리고 아버지와 함께 동네 아이들이 수박 서리하는 것을 지키던 매오름 밭 원두막도 어렴풋이 생각났다. 그리웠던 표선에서의 오래된 기억들을 하나씩 꺼내었다. 매오름의 상쾌한 바람을 타고 흙냄새 나는 표선 공기를 한몸 가득히 담아본다. 
                                    
백사장 길을 따라 매오름에 올라서니 표선 마을이 한눈에 들어온다. 전통 취락마을을 재현하고 있는 제주민속촌과 표선백사장, 세명주할망당이 있는 당캐포구, 해안 길 따라 형성된 올레길에는 아름다운 빛의 길이 어우러져 있었다. 

무엇보다 IB교육 학교로 선정된 표선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가 이 마을 가운데에 있어 기뻤다. 이 지역 꿈나무들에게 글로벌 미래 교육의 한 방식인 IB 교육이 시행된다니 매우 고무적인 일이 아닐 수 없다. 자연과 미래를 동시에 품고 있는 표선을 그냥 놓쳐버려서는 안 될 것 같은 절실함에서 이 글 한 편을 남기려한다.

이글의 1부에서는 자연을 간직한 표선 마을, 표선리의 설촌 유래, 설화, 신앙, 여행길 등 “천혜의 마을 표선”을 소개하고, 2부는 최근 화두가 되고 있는 미래 교육의 방향, 고교학점제와와 IB교육과의 연관성, 표선 마을의 희망 IB학교 등 “ IB과정이 왜 표선 마을의 희망인가”라는 주제를 다루어 보겠다.

 

1부 천혜의 마을 표선

요즈음 제주 하면 대부분 획일화된 하나의 이미지를 떠올리게 된다. 이는 제주가 자아내는 고유함의 근원인 자연과 방언 등 제주만의 양식이 사라져가는 현실을 보여주는 단면이라 할 수 있다. 국적불명의 상업 건축물과 방언의 향유층 감소로 인해 퇴색된 제주의 색은 전국화와 세계화의 불가피한 대가인지 반문하게 된다. 
제주를 몇 개월이라도 살아 본 사람들은 알아차릴 것이다. 좁은 제주 안에서도 마을마다 생활상과 언어가 다르다는 것을. 특히 한라산을 중심으로 어디에 위치했냐에 따라 바람세기가 다르고 토양질도 달라지기 때문에 그만큼 생활양식도 다르다. 제주가 그저 하나의 관광지로 인식되는 오늘날의 현실이 안타까운 이유이다. 
표선리는 제주도 한라산 동남부에 소재한 백사장이 있는 해안마을이다. 이곳에 가면 바다에 내 몸을 맡기고 싶을 만큼 짜릿한 전율이 느껴진다. 특히 한라산을 배경으로 노을 지는 표선백사장을 거닐었던 사람이라면 누구든 백사장이 선물하는 ‘천혜’의 포토존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꼭 다시 찾고 싶은 여행지 리스트에 올리지 않을까. 

자연을 간직한 표선 마을

매오름을 품은 표선 마을의 위치

표선리는 한라산을 중심으로 제주도 동남부, 서귀포시 동부지역에 위치한 지역으로 크게 동상·동하·서상·서하·한지동 등 5개의 자연취락을 형성하고 있는 해안마을이다. 최근 여러 차례 답사를 통해 만난 매오름은 표선 마을의 서북쪽 세화리와 경계에 서 있으면서 마치 표선리 전체를 매의 날개로 감싸 안은 듯하다. 매오름에 얽힌 설화를 미리 인지하고 있어서인지 그야말로 매오름의 자태가 표선리 마을을 수호하는 듯이 느껴졌다. 필자가 어린시절 아버지를 따라 갔던 매오름 밭은 우리집의 살림 밑천이었다. 따가운 햇볕과 고된 밭일이 싫어 꾀를 내던 어릴 적이었지만 고개를 들어 멀리 내다보면 지긋이 보이던 웅장한 자연물이 다른 분위기를 냈던 것 같다.   

돌이 많은 표선의 지질과 기후

필자의 기억을 더듬어보면 ‘검댕이터’ 밭은 온통 자갈과 돌덩이 천지였다. 어머니가 물질해 모은 돈으로 샀다던 그 밭은 애초부터 농지가 아니었다. 그래서 자갈을 고르고 나면 또 땅 밑에 뾰족이 삐져나온 바위덩이로 인해 호미가 꺾인 적도 있다고 했다. 이 거친 땅에 농사를 지었으니 얼마나 힘겨웠을까. 다행히 ‘매오름’ 밭은 ‘검댕이터’ 밭 보다 자갈과 바윗덩이가 적었고 매오름에서 흘러내리는 물과 양분이 있어 땅이 기름졌다.

표선의 지질은 주로 자갈과 바위가 많이 섞여 있는 미사질 양토이다. 또 경사가 심하게 나타나는 곳이 많아 농경지로 사용하기가 힘든 땅이 대부분이다. 마을의 2∼7%만이 완만한 경사지로 이곳에는 보리, 고구마, 유채 등 제주도의 전통작물이 재배되어 왔다. 아울러 해안 인접지역도 하해범람지로 지질 환경상 농경지로의 이용은 불가능했다. 이러한 지질적 환경을 극복하기 위하여 표선리는 해안 경관을 활용한 관광산업으로의 재편이 불가피했다. 최근 기후변화로, 표선 인근 서귀포와 성산포 지역 겨울철 평균기온이 7~10도 내외로 올라가 감귤이나 골든 키위를 재배하는 농가가 많아지고 있다. 

모래 섞인 표선의 바람

표선의 바람은 매섭기로도 제일 가지만 함께 휘몰아치는 모래바람으도 유명하다. 부모님이 보리, 조 농사를 짓던 어느 해에 태풍도 아닌 바람이 다 쓸어버린 ‘검댕이터’밭은 그야말로 처절했다. 자갈과 돌이 많은 ‘검댕이터’ 밭은 둘레에 바람막이도 없는 들판이어서 열매 작물을 심을 수 없었다고 아버지는 소회한다. 줄기는 자라는데 열매는 맺지 않고 줄기가 뻗으면 어느 날 바람이 모든 것을 후려쳐버렸으니 속타는 농부의 심정이 어땠으랴. 결국 이듬해부터는 ‘검댕이터’ 밭에 감자와 고구마 같은 뿌리 식물을 심었다. 농사야말로 땅에 인간의 바램을 담아야 하는 자연의 일인 바, 그 섭리를 따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표선은 여름과 겨울철에 풍향이 변하는데, 특히 겨울철의 북서계절풍은 강풍으로 농사에 큰 영향을 주었다. 

표선리의 바람은 농사뿐 아니라 전통가옥에도 영향을 주었다. 표선리 사람들은 강한 바람에도 버틸 수 있는 초가집을 이었다. 일 년에 한 번씩 새끼를 꼬아 단단하게 엮어 지붕을 얹으면 바람을 이겨낼 수 있었다. 자연물로 자연의 고난을 이겨낸 것이다. 김형훈의 《제주는 그런 곳이 아니냐》에서 ‘겹집’의 형태는 북부지방과 제주에서만 관찰되는데 이는 바람을 제어하는 역할을 한단다. 특히 기둥 사이를 흙으로만 채우지 않고 외벽을 다시 돌로 이어 붙이는 덧벽 구조는 바람이 드센 제주 초가의 특징이라고 한다. 제주사람들은 겨울철 혹독한 북서풍을 견디기 위해 동백나무, 후박나무, 대나무 등을 집 뒤 터에 심었다. 
그리고 가옥 진입 입구에는 집 마당을 연결하는 ‘올레’를 만들기도 했다. 올레를 구분하기 위해 쌓은 구불구불한 돌담은 매서운 바람을 분산시켜주는 일등공신이었다. 올레는 강풍을 막기 위한 지혜의 산물이자 제주의 상징이다. 척박한 자연환경을 지역민들의 기나긴 고민으로 이겨냈으니 제주를 넘어 한국을 대표하는 소중한 문화유산으로 손색이 없다.

표선의 자연환경이 만든 터전의 변화

표선의 산업은 토질의 한계점을 극복하기 위해 특수작물 재배와 표선해변의 천연자연을 활용한 관광산업으로 재편되고 있다. 표선리의 일차 산업은 기후변화에 의해 일반작물이 점차 감소하고 대부분 특수작물을 재배하고 있다. 표선리의 수산업은 제2 종항인 표선항에 선박 30여 척이 어로작업을 하고 있으나 최근 어획량이 줄어들고 있다. 예전 표선 사람들은 경지를 가꾸면서도 봄이 되면 미역과 톳을 캐러 바다로 뛰어들며 생계를 유지했다. 최근 들어 해녀 수 역시 감소하는 추세이나, 표선리 청정해안에서 해녀들이 거두어들인 각종 해산물과 지역특산품은 여전히 수요가 높다. 특산물 중에서도 옥돔과 자리돔의 맛은 전국적으로 소문이 자자하다. 소라와 전복, 성게 맛 또한 천혜의 풍미를 낸다. 

표선리는 일차 산업의 취약성을 보완하기 위해 표선백사장과 해안을 이용한 다양한 관광 사업에도 주력하고 있다. 표선리는 남쪽으로 넓게는 태평양과 만나는 드넓은 백사장이 펼쳐진다. 자연의 선물인 표선 해안은 모래 해안과 암석 해안의 명암이 뚜렷해서 멋진 경관을 보여준다. 최근들어 표선 백사장을 찾는 관광객들이 늘어나고 있는 추세이다. 표선 서쪽 한지동 해안에서 동쪽 끝까지 이어지는 풍경의 파노라마에 매료된 사람이 아마도 필자 한 사람만은 아닐 게다.  


표선리 설촌 유래

표선리 마을리지에 의하면 지금까지 표선리에 대한 최초의 설촌은 약 700년 전 고려 말 충렬왕 무렵에 ‘웃말캐미’(서상동)에서 현씨가 설촌하여 시작되었고 이후 안가름과 뒷가름 일대에 사람이 옮겨와 정착하는 한편, 박씨 성을 가진 사람이 들어와 살면서 확대되어 나갔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여기에서는 설촌과정에서 유물 유적 및 기타 증거물을 통해 전해지는 지명과 시기 등의 일부만 정리되어 있다. 

‘웃말캐미란 그 어원부터가 위에 있는 마을의 이름이고, 캐미란 개마, 즉 높은 언덕이란 뜻으로 지금 이 부근은 과수원이 주측을 이루고 있다. 그 후 옮겨 왔다고 전해지는 <안가름>과 <고분쟁이 동산>에서는 토기 여러 점을 찾아내는 성과를 얻었다. 이러한 유물·유적들의 발굴은 표선지역의 설촌 연대를 훨씬 옛날로 올려놓은 셈이 되는데 <남추곶>의 나무를 베어내어 9만여 평의 표선해수욕장을 하룻밤 사이에 메워버렸다는 <설맹디할망>의 전설과 함께 표선 사람들에게 큰 관심사가 되었다.

<안가름>에서 96년 신석기시대의 유물인 돌도끼 1점이 발견되었고, 최초의 포제단이라는 제주민속촌 상류의 ‘고분쟁이동산’에서는 “곽지(郭支) 1식” 토기편 여러 점이 발견되기도 했다. <안가름>뿐만 아니라 동편의 <뒷가름>의 과수원에서도 조선 시대의 자기 파편들은 지금도 무수히 나오고 있다. 전해진 바에 따르면 안가름, 뒷가름이 마을의 중심지가 될 무렵 속칭 '상뒤동산'을 경계로 영남리와 좌선리로 나눠졌는데, 그뒤 한일병합 때 표선리로 통합되어 면소재지가 되었다. 표선리는 당포와 함께 <표선지촌>으로 불리워 왔는데, 마을의 연혁에 따르면 1940년대 초 300호가 되어 이때 동상, 동하, 서상, 서하등 5개 이사장제를 도입하여 25개 반을 관리하도록 하였다. 이 마을에 한지동까지를 포함하여 지금의 권역으로 형성되었다. 

1910년대 초에서 5년 뒤 인구의 유입과 당캐포구를 근거지로 한 어장 형성 등으로 차츰 상가가 들어서기 시작했다. 주변 위성마을이 많은 표선리는 1914년 일주도로가 개설된 이후 빠른 속도로 규모가 커지며, 1917년에는 2일과 7일에 표선 오일장이 들어섰다. 1940년대 초 마을 규모 확대에 이어 지역도 동상, 동하, 서상, 서하, 한지동 등 5개 단위로 구획화되었고 이는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한지동은 지금으로부터 250년 전에 박춘호씨가 가마리 동쪽 경계에 입주하면서 설촌이 되었고 지금은 넙치 등 양식어업의 중심지가 되었다. 
한편 당포는 조선시대 포구였으나 일제강점기 이후 일본의 전복 채취선의 근거지가 되고 일본을 왕래하는 여객선 출입이 빈번해지면서 취락이 형성되었다. 표선리는 표선면 소재지로 1946년 표선면의 중심 마을로 편제되어 유동인구와 상업시설이 집중되어 있고, 최근 들어 관광 도시와 농어촌 등 복합지역 마을로 발전되고 있다. 

표선리 사람들의 염원을 담은 설화 설맹디할망

백사장이 펼쳐지는 표선리는 드넓은 바다가 있고 서북 편으로는 기이한 매의 형상을 한 매오름이 위치해있어 지형적인 특징을 담은 설화가 구비 전승된다. 표선리의 중심이 되는 창조의 여신 설맹디할망은 표선리 사람들에게 거인의 모습으로 그려진다. 특히 당캐의 세명주할망당은 설맹디할망을 모시고 있다고도 하고 동일 인물이라고도 하며 조금씩 다른 설로 각색되어 전해지고 있다. 세명주할당은 제주도의 창조설화인 설문대할망과 상통하는 대목의 이야기를 기본 모티프로 하고 있다는 것이다. 

한편 표선리 설화에는 용궁과 연결시키는 매와 비슷한 모습의 형상을 담는 <용궁아들 삼 형제와 매오름>의 매오름 설화, 제주도 일대에 각색되어 퍼져 있는 해녀의 전설을 모티브로 하고 있는 <금덕이 여>라는 전설 등 이외 다양한 표선리의 자연지형과 사람들의 마음을 반영한 설화가 전해진다. 여기에서는 표선리 창조설화 설맹디할망 중심으로 최근 재해석 작품과 연결하여 감상해 보겠다.

설맹디할망과 백사장 설화

옛날에 지금의 표선해수욕장 자리는 깊은 바다였고 남초곳은 아름드리 나무들이 들어서 있는 큰 숲이었다. 이 원시림의 숲에는 특히 볼래나무가 많았으며 한 번 들어가면 나오기가 쉽지 않았다. 하루는 설맹디할망이 해수욕장 자리의 바다를 메우려고 남초곶의 나무들을 모두 베어다가 바다에 집어 넣었는데 그날 표선리 마을 모든 집의 도끼와 소들이 다 동원되었다고 한다. 
이튿날 일어나 보니까 바다는 모두 메워져 있었는데 집에 보관했던 도끼와 괭이의 날이 모두 무디어지고 길마를 지웠던 소들은 등이 터지고, 벗겨져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지금 백사장, 해수욕장이 조성된 9만여 평의 이 패사 모래판은 50여 년 전까지도 멸치잡이를 하던 어장이었으며 마을 사람들은 최근까지도 이 백사장에서 까맣게 탄 나무 등걸들을 찾아낸 적이 있었다고 전해 온다. 말하자면 이 설맹디할망과 백사장, 남초곳의 전설은 이 고장 창조 설화인 셈이다. 설맹디할망과 세명주할망당을 동일인물로 보는 설도 있다. < 출처: 바람이 보이는 아름다운 마을 표선리, 표선리 사람들 이야기 종합>

고대 모계 중심 사회에서는 생명을 잉태하는 여성의 능력이 신성시되었다. 이는 대지의 생산성과 결부되어, 고대인으로 하여금 천지창조의 근원을 여성 신의 모습으로 형상화하는 정신적 배경이 되었다. 제주를 창조한 설문대할망 역시 그렇다. 바닷속의 흙을 삽으로 떠서 제주도를 만들었다는 ‘설문대할망’은 그들을 지켜주는 수호신의 역할까지 한다. 위에 제시된 표선리 마을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설문대할망’과 표선리의 창조여신 ‘설맹디할망’을 동일인으로 보는 설도 있다. 아래 소개되는 이무자 시인의 재창작 설화 시 역시 동일인으로 그리고 있으며 ‘설맹디할망’은 ‘세명주할망당’의 해신의 역할까지 부여한다.


세명주할망당                         

명주같이 고운 모래알
쌓이고 쌓여 크고 넓다는 한모살 
백사장으로 유채꽃 물결이 밀려든다

세상에서 제일 몸집이 큰 여인
명주 한 통이 모자라 속옷 한 벌 
제대로 입어 보지 못한 여인

한라산 백록담에 앉아
오름으로 회오리치며 부는 바람 
흑룡만리 돌담 구멍으로 이어놓고

밀려드는 거친 파도를 감지하여
초하루 보름 당집 문을 두드리는 
설운 이들을 보듬어 젖가슴을 내어주며 

물로 뱅뱅 돌아진 섬
근심 걱정 어름쓸어 잔잔하게 
치마폭으로 덮어주는 세명주할망

나 그 품으로 들어가
포구를 메우는 포근한 바람을 마신다

                  <이무자, 설화 시 「세명주할망당」 전문>

 

‘설문대할망’ 설화는 설문대할망이 제주를 창조한 이야기부터 한라산 물장오리 또는 죽솥에 빠져 죽는 최후의 모습까지를 모두 담고 있다. 설화 향유자들에게 창조주의 죽음은 새로운 세계로의 탄생을 위해 필연적으로 겪어야 하는 의례로 해석된다. 이무자 시인은 이러한 희망을 재조명하여 설화 시를 창작했다. ‘초하루 보름 당집 문을 두드리는, 설운 이들을 보듬어 젖가슴을 내어주며’에서 시인은 세명주할망당을 믿고 보름마다 당집을 찾는 표선 사람들의 발걸음을 보듬고 품어주는 당신의 역할을 제시한다. 또, ‘세상에서 몸집이 제일 큰 여인, 명주 한 통이 모자라 속옷 한 벌 제대로 입어 보지 못한 여인’으로 제주의 창조신 설문대할망과 표선리 창조신 설맹디할망을 동일인으로 그리고 있다. ‘물로 뱅뱅 돌아진 섬 근심 걱정 ‘어름 쓸어 잔잔하게 치마폭으로 덮어주는 세명주할망’, 세명주할망당은 척박한 땅에서 억척스러운 삶을 이어 온 표선 사람들의 믿음의 표상이라 할 수 있다. 

앞서 말했듯이, 표선리의 창조신 설맹디할망은 아래 소개되는 표선리 사람들의 신앙, 해신인 세명주할망당과 동일인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 당캐 세명주할망당 본풀이를 분석해 봤을 때 설문대할망의 사연으로 연결하기 어려운 구절들이 있기 때문에 학계에서는 동일인이 아니라는 분석도 있다. 하지만 표선 사람들은 그들을 동일인으로 믿고 싶어한다. 제주전통문화연구소 문무병 박사(시인)에 의하면 당케 ‘세명주할망당’은 ‘설문대할망’이라고 하지 않고 ‘세명주할망’이라고 그 이름, 두 신화는 같다고 보는 게 맞다고 했다. 시인 이무자 역시 이들을 동일인으로 그렸다. 제주 각지에서는 설문대할망의 내용을 각 지역의 특색에 맞게 각색해 확장하고 전승하고 있다.

 

표선리 사람들의 신앙 

민간신앙은 대부분 무속에 뿌리를 둔다. 신과 인간을 중개하는 심방을 통해 신에게 굿을 하거나, 신당에 가서 심방 없이 직접 기원하는 형식으로 실현된다. 민간신앙에서 여성들은 주로 집안의 안위를 위해 마을의 수호신을 모신 신당을 찾아가 심방을 통해 당굿을 하였다. 그리고 남성들은 재관을 정하여 유교식 제사 형식으로 마을공동체의 풍요와 안녕을 기원하는 포제를 지냈다.

집안의 안위를 위한 여성들의 신앙

표선 마을 사람들은 지금도 사람이 죽으면 장례를 마친 뒤 귀양 풀이를 하여 망자의 한을 풀어주는 의식을 치른다. 또, 아들을 절실히 원하는 가정에서는 심방을 청하여 인간이 신에게 기원하는 형식의 애기맞이 궂을 하루 종일 하는 풍습도 있다. 이는 집안의 평안과 자손의 번영을 염원하는 간절함에서 발현된 의식이기 때문에 필자 역시 시댁에서 주관한 이런 의식들을 따른 적이 있다. 필자의 시어머님은 몇 가지 제물을 마련해 본향당에 가서 당신 자손들이 무사 형통하기를 빌고 또 빈다. 표선의 어머니들 역시 해안 당케 ‘세명주할망당’과 상록수림 안에 위치한 ‘저바당한집’ 본향당에서 그들의 소망을 희구한다. 

당캐 세명주할망당(왼쪽)과 세명주할망당 제단. 송미아
당캐 세명주할망당(왼쪽)과 세명주할망당 제단. ⓒ송미아

당캐 ‘세명주할망당’은 표선 포구에 있는 성산해양결찰서 표선파출소와 수협 위판장 사이에 위치해 있다. 네모나게 돌담을 두르고, 그 안에 기와지붕을 얹은 당집이 있다. 당집 안에는 벽의 한쪽을 안으로 들어가게 만들어서 2단의 제단을 만들었다. 위쪽에는 흰 종이를 깨끗하게 깔고 그 위에 나무로 된 위패를 모셔 놓았으며, 위패 위에 지전 물색과 실 등이 있다. 당캐 해신당의 당신은 히로 영산에서 솟아난 풍신 ‘세명주할망’이다. 이 신은 표선리 본향당인 ‘저바당한집’신과 부부간이다. 당에는 매월 초하루, 보름에 다니며 선박이 출어할 때나 물질 나갈 때 등 이곳에서 해상의 안전을 기원한다. 특히 ‘세명주할망’은 한라산에서 솟아난 산신이 해변 마을에 좌정하여 풍신으로서 표선리 사람들의 생업을 지켜주는 생업 수호신이 이기도 했다.

저바당한집’은 표선면 중심부 표선리 서상동 상록수림이 우거진 곳에 자리하고 있는 본향당이다. 당 신은 산신이며 풍신인 ‘저바당한집’은 당 집 밖에는 일뤠할망을 따로 모시고 있는 좌형의 당이다. 당 집 안에는 위패를 모신 제단이 마련되어 있고, 당 집 밖에는 자전 물색이 걸려있다. 이 당 신은 도내 각 곳을 돌아다니며 좌정할 곳을 찾다가 가장 깨끗한 곳을 골라 이곳에 좌정하여 표선리 사람들의 생산, 물고, 호적, 장적 등을 수호해 주는 본향당이 되었다. ‘저바당한집’은 송당 금백조 여신의 아들이며, 당캐 세명주할망의 남편 신으로 전해지고 있다. ‘저바당한집’과 ‘세명주할망당’의 부부관계를 설화 시로 재구성한 김영숙 시인의 “천 년 전의 약속”을 감상해 보겠다.

저바당한집. 송미아
저바당한집. ⓒ송미아

 

천 년 전의 약속

바람은 알고 있다
벚나무 가지의 간지러움을

바다는 알고 있다
백사장의 달콤한 키스를

청실홍실 드리운 합환주를 마시니
세명주할망도 저바당한집도
천년 전 그 약속을 어찌하지 못하는구나

들어라 들어라
사람아 사람아

천생연분인 그 사랑을

<김영숙, 설화 시 「천년 전의 약속」 전문>

 

김영숙 시인은 설화 시 “천 년 전의 약속”을 통해 세명주할망당과 저바당한집의 역할과 지위를 규정하고 표선리 사람들의 마음을 대변하였다. 표선 사람들은 이 두 당을 드나들면서 가족의 안위와 거친 자연환경에 대처할 담대함을 키웠다. 특히 표선 사람들에게 겨울철 거친 북서풍은 늘 불안의 대상이었다. 바다에 의지해 살아가는 해녀들, 근근한 농사로 생업을 유지한 이 지역민들에게는 생업의 수호신이 필요했던 것이다

특히 ‘알고 있다’로 반복되는 시의 운구를 통해 저바당한집과 세명주할망당이 표선 사람들의 걱정과 바람을 알고 다독여주며 보살피는 존재임을 암시하고 있다 그리고 본향당 저바당한집과 당케 세명주할망은 부부 관계로 천년 전의 약속만큼이나 오랜 세월 뿌리 깊은 신앙의 대상이었음을 말해준다. ‘달콤한 키스와 합환주’는 아름다운 부부애를 상징하는 동시에 이러한 화합이 표선의 안녕과 번영으로 승화되기를 바라고 있다.

마을 공동체의 안녕과 풍년을 기원하는 신앙

표선 사람들에게 신앙은 필수적인 생활양식이었다. 본토의 변방에서 소외와 압제를 견뎌야 했던 이들에게는 특별한 공동체 의식이 필요했다. 유교식 마을제인 포제는 마을의 향회가 주관하고 남성들이 하나가 되어 마을의 무탈을 기원하는 신앙 행위이다. 이들은 정월이 되면 마을의 수호신에게 신년의 하례를 하고 오곡의 풍년을 빈다. 이는 조선조 남성 우위의 유교적 봉건질서가 확립되고 무속을 천시하여 굿을 제사로 바꾸는 과정에서 비롯됐다고 한다. 당굿과 포제는 원래 하나였으나 후대에 와서 여성이 주도하는 당굿(마을굿)과 남성이 주도하는 유교식 마을제인 포제로 분리된 것이다.

포제단은 매오름 산책로를 따라 표선리 2475번지에 소재해 있다. 포제단 입구는 기와 지붕을 얹었고 입구 맞은편과 좌측에 두 개의 제단이 있다. 하나는 상단제로 흉제지신을, 하나는 하단제로 토지지신을 모시고 있다. 제관8~9명의 참여하여 음력 정월 상정일 또는 해일 자시에 제를 지내며, 표선리 마을 이장이 전사관이 되어 제물을 관리하고 있다.

바다에 나갈 때면 거센 파도와 싸워야 했다. 가뭄과 바람, 호우는 두려움인 동시에 공동체를 결집시키는 극복의 대상이었다. 표선리 사람들은 포제와 더불어 ‘저바당한집’과 당캐 ‘세명주할망당’의 의식을 아직도 이어오고 있다.

현대의 표선리는 현재 예수 장로교, 침례교, 천주교, 불교 조계종, 원각사, 예수 재림교, 통일교회 등 다양한 종교가 포교된 상태이다.

 

여행길 따라 걷고 싶은 표선

표선백사장에서/그리움을 좇아가는 서울 아이. 고정국 시인 제공
표선백사장에서/그리움을 좇아가는 서울 아이. ⓒ고정국 시인 제공

표선백사장과 해수욕장 ‘빛의 거리’를 걸었던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 순간을 그리워하게 될 것이다. 끝없이 펼쳐진 백사장은 사람들에게 쉼터이다. 팍팍한 일상에서 벗어나 간조 때의 표선 해변을 본다면 그 표선 빛깔의 바다조망과 하얀 모래사장에 흠뻑 취할 수밖에 없다. 간조 때의 백사장은 제주에서 최고로 넓은 모래사장으로 썰물 시에는 바다 전체가 백사장이 되며 폭이 313미터의 넓고 완만한 경사의 풍광을 드러낸다. 그러다가 밀물이 밀려드는 만조 시에는 전체 면적이 수심 1미터 이내로 조용한 호수를 연상시킨다. 관찰자 시점의 소설을 대하는 독자와도 같이, 지긋한 응시로 풍광을 좇는 여행자만이 표선의 두 얼굴을 마주할 수 있을 것이다.

표선리는 해수욕장을 찾는 이들에게 더 나은 휴식을 제공하도록 정비 사업에 온 힘을 기울였다. 공유수면 매립, 조림사업, 돌계단 조성, 잔디 식재 및 주변 정자시설 등에 주민들은 한마음 한뜻으로 임했다. 아울러 표선리 하얀 모래 해변의 정취를 더 느낄 수 있도록 설치한 해녀상, 돌하르방, 물허벅상, 십이지상 등 포토존을 마련하여 바다와 함께 살아가는 표선리 사람들의 모습을 그려 넣었다. 여행길 따라 걷는 관광객들은 표선리 해변의 아름다운 전통문화를 감상할 수 있다.

표선백사장에서/행복을 줍는 서울 아이들. 고정국 시인 제공
표선백사장에서/행복을 줍는 서울 아이들. ⓒ고정국 시인 제공

표선에서 펼쳐지는 하얀모래축제에는 남녀노소 누구나 행복한 표정이다. 축제에 참여한 사람들은 너도나도 표선 백사장에서 하얀모래를 활용한 모래찜질을 하고 수영을 하며 마음껏 여름을 즐긴다. 해수욕장에선 샤워실과 탈의실, 화장실, 식수대, 잔디광장, 그늘 쉼터, 파고라, 산책로 등 관광객들이 편하게 이용할 수 있는 시설을 구비해 놓았다.

표선 해수욕장은 흰색의 패사와 검은색의 현무암이 대조를 이루어 아름다운 해안의 모습을 뽐내고 있다. 특히 하얀 모래는 신경통과 무좀 예방에 특효가 있는 것으로 이곳에 놀러 온 사람들은 즐거운 자연 발 마사지도 함께 한다. 매년 해수욕장 개장에 맞춰 하얀 모래 축제가 활발하다. 특히 엔데믹을 예고하는 올여름은 표선을 그리워했던 사람들이 몰려들 것으로 예상되어 설렌다.

표선백사장에서/바다와 함께 춤을. ⓒ고정국 시인 제공

국내 최대 규모의 문화예술 축제로 국내 공연문화 발전을 이끈 제주 해비치 페스티벌도 매년 표선에서 개최된다. 아울러 제주올레 4코스의 트레킹 코스를 당케포구에서 해안 따라 남원으로 이어지는 길을 만들어 여행길 따라온 관광객의 발걸음을 즐겁게 한다. 그리고 백사장 인근에는 19세기 제주도의 전통 대표 취락마을인 산촌과 중산 간촌, 어촌을 재현하고 있는 ‘제주민속촌’을 개관하여 제주 전통문화를 보여준다.

마을 벽화가 어우러진 ‘빛의 거리’와 짙은 허브 향기가 머무는 허브 동산의 향기로 올여름에는 여행길 따라 즐기는 표선 해변이 축제의 분위기로 활기가 넘칠 것이다. 표선 해변 축제와 더불어 ‘표선 백사장과 제주민속촌’을 중심으로 한 여행코스가 서귀포 여행지로 더욱 선호되기를 바란다.

표선백사장에서/나도 수상스키를. ⓒ고정국 시인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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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은미 2022-05-17 15:17:14
저도 멀리 바다가 있는 곳에 살아요. 하지만 이 기사를 보니 표선 백사장에 꼭 가고 싶 네요. 세명주할망당에서 가족의 안전귀환을 빌었을 할망들의 간절함도 느껴집니다.
제주에서 한 달살기를 꿈꾸고 있는데 , 저바당한집에 가서 빌면 이루어질까요? ㅎㅎㅎ
표선백사장 설화 잘 읽고 갑니다.

최연심 2022-05-17 12:58:10
제주도는 관광지로 즐기기 위한 곳으로 여겨졌는데 '표선'을 통해 새로운 제주를 보는 것 같네요.
기회가 되면 현재와 과거가 공존하는 곳 '표선'을 느끼고 싶네요.

김선정 2022-05-17 12:03:30
표선에 대해 관심이 없었는데 역사를 알고 나니 다시 보이네요^^

초록향기 2022-05-16 22:25:27
표선.
내가 어린시절 자랐던 곳과도 그리멀지 않은 곳.
필자의 글을 통해 표선이라는 마을이 친근하게 다가옵니다. 많이 알게되었구요. 언젠가 표선 백사장도 한 번 가보고 싶네요.
좋은 글 감사합니다~^^

강영미 2022-05-16 19:03:11
섬에서 섬처럼 ,섬에 사는 사람들처럼 이어지고 이어질 이야기들이 정겹습니다. 설화며 어릴적 이야기며 ,, 마을 이야기인데도 참 따뜻하게 읽힙니다^^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