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학상장(敎學相長)
교학상장(敎學相長)
  • 홍기확
  • 승인 2022.03.23 09: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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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의 조각모음]<36>

아이의 발표자료 하나를 보았다. 독서토론 모임에서 책을 읽고 난 후 아이가 쓴 감상문이었는데, ‘교학상장(敎學相長, 가르치고 배우는 과정에서 서로 성장함)’이 제목이었다.

아이를 키우며, 아이와 함께 나도 자라나는 걸 느낀다. 아이의 머리가 굵어지고 질문이나 판단이 예리해지고 지식이 풍성해질수록, 나의 답변과 논리 역시 풍부하고 확장되어 간다. 게다가 즉각적으로 답변할 수 없는 어려운 질문들이 늘어난다.

주말에 내가 다니는 직장인 서귀포시청에 차를 세우고, 아이와 밥을 먹기 위해 나오는 순간 아이가 내게 묻는다.

“이렇게 큰 회사에서 일하는 아빠가 자랑스러워.”

나는 순간 대꾸하지 못했다. 그리고 뜻밖에 아이의 한마디로 글감을 얻어 잽싸게 메모를 해 놓았다. 메모된 날짜를 보니 무려 1년 3개월전의 메모다. 오래된 메모를 꺼내는 것은 이제야 대꾸를 할 수 있어서다.

회사에서 말을 잘 하지 않는다. 업무 이외에는 불필요한 단어조차 내뱉지 않는다. 오로지 업무 이야기만 한다.

직원들과 밥도 잘 먹지 않는다. 부하 직원들도 상사와 같이 먹는 걸 좋아하지 않겠지만, 나는 특히 가족이 아닌 사람과 밥이나 술을 같이 하는 걸 꺼린다.

이유는 말이 통하지 않아서다. 인생의 철학이나, 인문학, 역사를 얘기하는 건 말이 통하는 사람이나 가족들과만 한다. 다른 이유는 지구온난화, 자본주의의 모순, 공장식 축산 등에 대한 사회의 중요한 문제에 관심이 없어서다. 이런 사람들이 있긴 하지만 찾기 힘들다.

대부분은 새롭게 생긴 커피숍, 맛집, 새로 산 옷과 최근 한 머리스타일, 마지막으로 최악으로 생각되는 ‘다른 이들의 신상(身上)’ 따위에 대한 얘기를 한다. 도저히 대화에 참여하고 싶은 생각이 없고, 참여해도 참을 수가 없다.

그래서 가족이 좋다는 거다. 피터 싱어의 실천윤리학이나 유발 하라리의 인류학 강의를 듣고, 장 지글러의 왜 세상의 절반은 굶주리는지에 대한 책을 읽고 서로 토론할 수 있는 가족이 있어 좋다.

최근 당선된 대통령의 여성가족부 폐지에 대한 각자의 생각을 펼쳐보며 필요성과 파급효과를 아내, 중학생과 아빠가 함께 얘기할 수 있는 멋진 가족이어서 좋다.

아이의 ‘이렇게 큰 회사에서 일하는 아빠가 자랑스러워.’라는 말에 대한 나의 답변은 이렇다.

“아빠는 큰 회사에 다니는 아빠보다, 작은 집에서 대화하는 아빠의 모습이 더 좋다. 그리고 대화의 상대방이 될 수 있는 네가 더 자랑스럽다.”

교학상장(敎學相長).

오늘은 숲길을 걸으며 아이가 지금까지 읽었다는 500권의 책 중에서 엄선한 책의 내용을 내게 조잘조잘 공유했다. 남들은 관심이 없을 체로키 부족이 새들에게 이름과 의미를 붙이는 이야기와, 인디언의 장례식 풍습들이었다.

아빠는 이 책을 읽어봤냐고 했다. 안 읽어봤으면 읽어보라고 했다. 나는 웃으며 대답했다.

“인디언은 멋지네. 참 낭만적인 이야기네. 다음에 읽어봐야겠어.”


 

일상의 조각모음

홍기확 칼럼니스트

2004~2010 : (주)빙그레, 파주시, 고양시, 국방부 근무
2004~2010 : (주)빙그레, 파주시, 고양시, 국방부 근무
2010~현재 :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근무
수필가(현대문예 등단, 2013년)
경영지도사(마케팅), 박물관 및 미술관 준학예사, 관광통역안내사(영어)
현 서귀포시청 공무원 밴드 『메아리』회장 (악기 : 드럼)
저서 : 『평범한 아빠의 특별한 감동』, 2015년, 지식과감성#
『느리게 걷는 사람』, 2016년, 지식과감성#
『일상의 조각모음』, 2018년, 지식과감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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