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의 힘은 어디에 있을까. 대형구조물? 수많은 사람들? 높은 건축물이 많고, 인구가 많다고 도시에 힘이 붙을까? 그러진 않다. 도시의 힘이란 해당 지역에 사는 사람들이 얼마나 그 도시에 애정을 가지고 있는가에 달려 있다. 제주특별자치도와 공공건축가들이 지난 2월 14일부터 2월 25일까지 제주시민회관에서 ‘걷고 싶은 도시 공간 만들기’라는 기획전을 가졌다. 기획전에 참여한 공공건축가들은 자신들의 생각을 ‘공공성지도’로 표현했다. 공공건축가들은 제주시와 서귀포시의 원도심 일대, 제주 도내 곳곳에 널린 오일시장에 그들의 생각을 마음껏 담았다. <미디어제주>는 기획전에 참여한 공공건축가를 직접 만나서 그들이 어떤 생각으로 공공성지도를 기획했고, 그들의 제안 내용이 무엇인지 들여다본다. [편집자 주]
복개 하천변에 시민공원으로 ‘선형공원’을 제안
“걷기 좋은 공간 생긴다면 자연스럽게 걷게 돼”
제주의 공공건축가는 ‘마을 건축가’ 역할 담당
[미디어제주 김형훈 기자] 어릴 때는 걷기만 했다. 교통수단도 많지 않았고, 교통수단을 이용할 줄도 몰랐다. 집에서 초등학교까지는 10분을 더 걸어야 했다. 중학교에 입학을 하자 집이랑 학교와의 거리는 더 멀어졌다. 보통 사람들의 걸음이라면 30분이 걸리는 거리였다.
늘 걷는 거리. 그때는 몰랐다. 길의 정겨움을. 어떻게 하면 학교에 빨리 도착할지가 최대의 고민이었다. 그러기에 가장 가까운 거리, 그러니까 학교까지 최단거리를 찾아서 걷는 게 하나의 목표였다. 최단거리에 익숙해지자 다른 길을 찾는 일을 접었다. 늘 똑같은 거리가 눈에 들어오고, 거리의 간판은 자연스레 내 머릿속에 들어앉았다.
걷기란 머리로 의식해야 할텐데, 거리가 익숙해지자 두 발이 알아서 학교로 향했다. 두 발은 기록 단축을 하는 경보 선수의 다리나 마찬가지였다. 참 재미없는 등하굣길이었다. 동무없이 혼자서 걷기만 해서였을까. 물론 최단거리를 찾지 않는 아이들에겐, 길은 가장 재미있는 놀잇감이다. 나는 그걸 몰랐다. 매일 경보만 하느라고.
지금은 경보 선수를 닮은 걷기는 하지 않는다. 걷기는 가장 인간적인 몸짓인데, 나이가 들면서 가장 인간적인 몸짓을 느끼는 중이다. 걷기는 시간을 쓰는 행위이면서, 장소와 공간을 향유하는 일이기도 하다. 그러지 않고 시간 단축을 위해 걷는 이들에게, 걷기는 시간의 낭비이며, 공간을 향유하는 일은 있을 수도 없다. 어쨌든 나이가 들면서 걷기에 소비를 하고, 장소를 즐긴다.
사실 걷기는 가장 단순한 일인데, 지금을 사는 이들은 걷기보다는 자동차에 더 의존한다. 어떻게 하면 자동차에 의존하는 이들이 땅 위를 딛고 걷게 만들 수 있을까. 프랑스의 사회학 교수인 다비드 르 부르통은 <걷기예찬>에서 다음처럼 얘기했다.
“어떻게 하면 사람들이 다시금 스스로 발 딛고 서 있는 대지를 느낄 수 있게 할 것인가. 그러면 저 파이어니어의 후예들은 신체적으로 피곤하다고 불평할 것이다. 그러나 오랫동안 불평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들도 일단 다양하고 자발적이며 적극적인 방식으로 자신의 사지와 오감을 진정으로 작동하는 즐거움을 발견하고 나면 오히려 자신들이 자동차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이 아쉬워서 불평할 것이다.”
그렇다. 즐거움이다. 길에서 즐거움을 느낄 수 있다면, 사람들은 언제든지 자동차에서 내려서 걸을 준비를 하게 된다. 제주도내 공공건축가들이 제안한 ‘걷고 싶은 도시 공간 만들기’는 그런 이야기로 가득하다.
‘공공건축가와 함께 걷기’라는 주제를 단 기획에서 소개할 마지막 건축가는 플랫건축사사무소의 홍선희다. 그는 ‘CITY LINE PARK-병문천 복개 하천변 시민공간 제안’을 내놓았다.
병문천은 옛 제주성의 서쪽을 구획짓는 하천이었다. 병문천은 1990년대 복개되면서 도로와 주차장 용도로 사용중이다. 건축가 홍선희는 넓은 복개구간을 제대로 활용하자며 제안을 했다. 복개구간을 놔둔 상태에서 사람들이 오가는 공원으로 만든다면, 즐거움을 줄 수 있으리라는 생각이다. 그의 제안은 어떤 내용인지 직접 들어본다.
- 어떻게 병문천 복개구간을 바꾸고 싶었는지 이야기를 듣고 싶습니다.
공공건축가 중 제가 속한 분과는 제주시에 있는 모든 천변 답사를 다니게 됐는데, 지난해 6월이었어요. 병문천 복개구간을 걷는데 너무 힘든 거예요. 나무도 없고, 보행로라고 돼 있는 길조차 보이지 않았어요. 보행로를 개선해야 하는 구간 중에 가장 열악했어요. 그걸 직접 느끼고 나서 제가 먼저 주제로 삼았어요.
- 내가 할 지역이다, 이렇게 꼽으셨군요. 제안 중 특징적인 것을 말씀해 주신다면.
보행로 개선을 고민하면서 주민들이 이용할 수 있는 공원을 넣자는 개념으로 접근했어요. 코로나 팬데믹 이후로 근린공원의 중요성이 높아지고, 선형공원도 대두되고 있거든요. 공원은 사람들이 이용을 하는 것이니, 보행로에 대한 문제도 개선이 되겠구나 느꼈습니다.
- 원도심 일대를 보면 공원다운 공원이 없어요. 도시구조를 잘못 짰다는 느낌이 들긴 해요.
제주는 자연이 워낙 좋죠. 그래서 도심 공원을 피부로 느끼지 못했을 수도 있어요. 오래 전부터 그런 환경이었고, 도심은 공원이 있는 곳이 아니라 주거밀도가 높고 차가 다니는 곳이라고 느껴온 것 같아요.
- 집 가까운 곳에서 걸어 다닐 수 있는 공원이 많았으면 좋겠어요. 계획을 보면 차선을 줄이는 것도 좋은 것 같아요. 여기는 상대적으로 차량통행이 많지는 않잖아요. 차폭을 왕복 4차선으로 줄이고, 남는 공간은 어떻게 활용한다는 제안인지요.
주차장에 대한 민원도 있기 때문에 병문천 하류에 공유 주차공간을 만들어주고, 교차로는 로터리로 제안을 했어요. 차량 흐름도 끊기지 않고, 보행도 편하게요. 육지부는 폐철도나 폐도로를 활용해서 선형공원으로 만드는 곳이 많아요.
- 이런 환경이 도심에 굉장히 중요한데, 왜 도심에서 걷는 게 가치가 있다고 보시나요.
저는 걷는 가치보다는 공원에 대한 가치를 먼저 생각했어요. 그 중에 선형공원의 가치를요. 선형공원은 길로도 쓰이죠. 그러니까 선형공원은 보행하는 보행로로도 쓰이고, 운동을 할 수 있는 공간이 되기도 하고, 집 앞에서 바로 나와서 접할 수 있는 그런 자연적인 요소가 있는 공간이에요. 제안을 한 내용도 공원이 모든 집을 마주하고 있기 때문에 커뮤니티공간으로도 쓸 수 있죠. 한가지 더 고민했던 게 있어요. 원도심은 주거밀도가 낮아요. 여기 살던 사람들이 다른 지역으로 이사를 가고 하다 보니, 주거를 서포트해주는 시설도 별로 없어요. 제안대로 선형공원이 생김으로써 사람이 모이고, 사람이 모이면 사람들이 살게 되고, 그 사람들에게 필요한 공간이 생긴다는거죠.
- 아무튼 선형공간은 단절이 아닌, 연결이 돼야 하는데 말씀대로 집 입구에서 곧바로 마주하도록 계획을 짰다는 말씀이시죠.
그렇죠. 여기는 길이 아니라 공원이잖아요. 그래서 쉴 수 있는 공간을 뒀어요. 앉아서 쉬다 보면 서로 얘기를 나누고, 거기서 문화가 발생하겠죠.
- 제안 중에 행정이 현실적으로 충분히 받아들일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게 있다면요.
차 폭을 줄이고, 전체적으로 공원화하는 것은 충분하 가능하다고 봐요. 차량통행도 그리 많지 않거든요.
- 병문천 복개구간과는 다른 얘기인데, 원도심 내에 공원을 만든다면 어떤 작업이 필요할까요.
답사를 다녀보니 원도심은 유휴부지가 많지 않아요. 골목도 좁아요. 병문천처럼 거대하게 선형공원을 제안하는 것은 힘들 것 같고, 블록마다 조그마한 포켓공원은 괜찮을 것 같아요.
- 제안처럼 바뀐다면 시민의식도 변화가 있으리라 예상되네요. 왜냐하면 항상 차로만 이동하다가 걸어보니까 괜찮다고 인식할 수도 있지 않을까요.
솔직히 말씀드리면 육지에서는 걸으려고 제주에 오잖아요. 올레길 이후로 사람들은 걷기 위해 제주에 오는데, 정작 제주에 사는 분들은 걷질 않아요. 사실은 걸을 수 있는 공간이 없어서 그런 것 같아요. 걷기 편한 공간이 생긴다면 자연스럽게 걷게 되고, 골목 옆에 내가 좋아하는 가게도 생기고, 그러면 자연스럽게 걸어다니지 않을까 싶어요.
- 공공건축가로 활동해오셨는데, 공공건축가 역할은 뭐라고 할 수 있을까요.
가장 큰 성과는 공공성지도라고 봐요. 두차례 공공성지도를 만들면서 시민들에게 줄 수 있는 공공공간이 이렇게 엄청나게 많은지를 몰랐거든요. 또한 제주도 공공건축가는 다른 지역과 달리 ‘마을 건축가’ 역할도 가지고 있어요. 저는 조천읍 지역을 맡은 공공건축가였어요. 조천읍 주민들이 원하는 걸 듣곤 했는데, 지금까지는 그런 도구가 없었던 거예요.
기획을 마치며
제주도내 공공건축가들이 참여해서 만든 공공성지도는 땅에 가치를 부여하는 작업이다. 그동안 눈여겨보지 않던 공유지에 힘을 불어넣고, 도심에 활력을 넘치게 만드는 일이었다. 특히 올해 만든 ‘제주 공공성지도 2022’는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만들어졌다. 물론 여기엔 행정의 의지가 담보되어야 한다.
사람들이 사는 곳곳은 예전 풍경이 아니다. 대부분은 도시화된 도심의 얼굴을 하고 있다. 그러면서 한 장소에서 다른 장소로 옮기기 위해 걷기를 즐기던 이들은 어느덧 차량에 밀리게 되었다. 우리는 애초부터 걸어다녔는데, 차량에 익숙해지면서 그걸 망각하는 삶을 살고 있다.
도심에서 걷기를 이야기하는 이유는, 모든 것을 ‘기능’이라는 단어로 단순화시키지 말자는 말이다. 빠르게 서두르는 사람은 한 장소에서 다른 장소로 이동하는 행위에 큰 의미를 부여하지 않을지 모르지만 그렇지 않은 이들은 더 많다. 아이들을 보라. 아이들은 직선이 난 길도 곡선으로 이동한다. 아이들은 ‘놀이’를 찾고, 만들기 때문이다. 이처럼 도심 곳곳이 걷기로 즐거워진다면 얼마나 좋을까.
우리는 생각하는 사람이다. 도심이라는 땅 위를 즐겁게 걸을 수만 있다면, 걷는 행위를 통해 ‘사유(思惟)’를 더 자극할지 누가 알런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