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편집 2024-03-29 00:04 (금)
정착과 부유(浮遊)의 어디쯤에선가
정착과 부유(浮遊)의 어디쯤에선가
  • 정경임
  • 승인 2022.02.23 14:2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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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Happy Song] 제8화

필자는 서귀포 정착민이다. 서귀포에 부동산이 있어 세금을 내고, 직장에 다니고 있어 급여를 받으며 서귀포 사람들과 식사나 음주를 간간이 하는 서귀포 시민이다. 한편 필자는 서귀포 관광 가이드다. 한두 달에 한 번꼴로 손님맞이를 하는데, 그렇다고 뭐 필자가 인기 있는 인물이라기는 말은 절대 아니다. 아마도 이왕 제주에 오니 멀찍이 사는 사람도 보고 그 정착민이 그동안 갈고 닦아 알게 된 관광명소와 맛집에 대한 고급정보를 공유하고 싶어서일 것이다. 그러는 동안 서귀포 정착민 행세를 단단히 해왔다고 자부하며 살고 있었다. 그런데 얼마 전 모친상을 치르러 서울에 가서야 ‘나는 뭔가’라는 질문을 수없이 되뇌었다.
 

# 익숙한 공간, 부유하는 삶

새벽 2시쯤 어머니의 부고 연락을 받고 밤새 뜬눈으로 뒤척이다가 사무실에서 급히 해야 할 일을 처리하고 비행기에 올랐다. 그때부터 머릿속이 복잡해지기 시작했다. 서울에 거주하는 친구들과 선후배들에게 연락을 해야 하나, 몇몇 지인들에게만 연락할까. 그러다가 연락을 다 접기로 했다. 서귀포로 이주한 이후 경조사에 직접 참석한 경우는 몇 명의 친척들뿐이고, 부의금을 보낸 경우는 안 보내면 마음이 무거워질 것 같은 몇 명의 지인들뿐이었다. 그렇게 결과적으로 관계 정리를 많이 한 상태에서 부고를 알리는 것은 뻔뻔스러운 처사라는 결론이 내려졌다. 게다가 오미크론 코로나가 확산을 넘어 창궐에 이르러 장례식장에 오라는 것은 감염 위험을 감수하라는 뜻이라고 판단했다. 그러다 보니 직계 가족과 그들의 손님들이 빈번하게 오가는 장례식장에서 오도카니 앉아 있는 시간이 많아졌고, 그럴 때마다 자기연민에 빠져드는 순간이 잦아졌다.

# 제주 정착민으로서 오롯이

제주로 돌아오는 길, 초등학교 5학년 말 어머니가 되어주신 그분을 버스정류장에서 기다리던 장면이 떠올랐다. 출근하는 어머니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혹시 영영 우리집으로 오지 않으면 어떡하지?’ 조마조마한 마음을 부여안고 어머니를 기다렸던 버스정류장. 어린 딸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어머니는 오후 6시 20분쯤이면 늘 어김없이 버스에서 내리셨다. 그런 어머니를 보고 와락 안기고 싶은 마음이 컸지만, 쑥스러움이 많았던 때라 그냥 옆에서 무심히 걷는 척했다. 왕방울만한 눈이 매력적인 예쁜 얼굴인데, 마지막으로 엷게 화장한 모습이 아름다워 보였다. 어머니의 쓸쓸한 영정사진만큼이나 제주 정착민으로서 오롯이 홀로 서야 하는 이 상황이 버겁게 다가온다. 자신의 위치를 정확히 알았더라면 이렇게까지 힘들지 않을 텐데, 당당하게 살아간다고 다짐했던 것이 현실을 외면하는 가림막 역할을 한 모양이다.
 

# 제주에서 더 살맛 나는 삶을 누리고파

제주에 살면서 삶의 방식이 약간 단순해졌다. 공간이 번잡스럽지 않으니 마음도 단순해졌고, 평소에는 직장을 오가며 주말에는 들이나 오름에 오르고 바닷가에 산책하러 다니니, 제주로 이주한 것이 더없이 행복하고 만족스럽다. 어머니의 장례식을 치른 뒤 ‘단순한 삶’에 대해 좀 더 깊이 있게 알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장석주 시인의 <단순한 것이 아름답다>라는 생태산문집을 꺼내들었다. 시인은 더 살맛 나는 삶을 누리는 방법은 뜻밖에도 단순하다고 설파한다.

우리에게는 터널 안의 서늘함과 캄캄함과 터널 입구에 다다를 때의 따뜻함과 밝음이 있어 힘이 나는 것 같다. 졍경임
우리에게는 터널 안의 서늘함과 캄캄함과 터널 입구에 다다를 때의 따뜻함과 밝음이 있어 힘이 나는 것 같다. ⓒ정경임

벗들과 우정을 나누라.
향기로운 음식을 먹고 즐거워하라.
훌륭한 예술 감상의 기회를 놓치지 마라.
숲속을 걷고 숙면을 취하라.

시인은 단순하고 소박하게 살려고 많은 것들을 끊었다. 술을 끊고, 불필요한 사교를 끊고, 소모성 관계들을 정리했다. 또한 시인은 더 단순해지려고 채찍질하며 단련했다고 한다. 먹고, 자고, 산책하고, 명상하고, 그 이외의 시간은 본인이 좋아하는 일에 쓴다. 그 결과 시인은 더 관대해지고, 생활은 활력으로 넘치며 약동했다고 한다. 시인의 삶의 방식을 좇고 싶다. 그래야 제주 정착민으로서 자기연민에 빠지지 않게 될 것이고, 오롯이 홀로 설 수 있을 테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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