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편집 2024-04-20 10:04 (토)
“기죽지 않고, 당당하게 사는 제주여성의 DNA가 있어요”
“기죽지 않고, 당당하게 사는 제주여성의 DNA가 있어요”
  • 김형훈 기자
  • 승인 2021.08.10 13:5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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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도 제주여성생애사 아카이브 영상제작사업

10부작 제주여성 허스토리로 만들어 방송 예정

[인터뷰] 모더레이터로 참여한 <물숨> 고희영 감독

[미디어제주 김형훈 기자] 여성들의 이야기는 감춰졌다. 아주 오랜 옛날로 거슬러 오르면 여성은 살짝 보이고, 대부분은 남성 위주의 기록이다. 왜 그럴까. 우리가 역사를 배울 때 메소포타미아라고 불리던 땅에 살던 수메르인이 남긴 기록은 그러지 않았는데 말이다. 그들이 남긴, 역사에서 가장 오랜 이야기인 <길가메시 서사시>를 쓴 작가는 엔헤두안나라는 여성인데, 그를 아는 이는 세상에 없다. 이렇듯 여성의 기록은 수천 년간 베일로 가렸다. 아시리아 법전에 등장하는 ‘베일’이라는 천 조각 하나가 가린 여성의 얼굴은 얼굴만이 아니라, 여성이라는 존재 자체를 잊게 했다.

우리라고 다를 건 없다. 작은 섬 제주도의 주인공은 누구일까. 남녀 모두일텐데, 문자화된 기록은 그렇지 않다. 다만 제주여성은 입으로 전해온 본풀이를 통해 제주도의 주인공이 여성임을 스스로 밝히고 있다.
 

# ‘제주여성생애사’를 영상으로

구전(口傳). 입으로 전하는 이야기는 분명 한계를 가진다. 이야기를 이어받아 누군가 전해줘야 하는데, 전수자가 없으면 그 순간 이야기는 멈춘다. 시간이 흐르면 잊어버리듯, 입으로 전하던 누군가의 이야기는 그렇게 끝난다. 이젠 그러지 말자. 그러려면 기록이 뒷받침돼야 한다.

제주특별자치도 성평등정책기금 사업으로 진행되는 ‘제주여성생애사 아카이브 영상제작’은 그래서 의미 깊다. 공모를 거쳐서 작품은 완성됐고, 조만간 TV 화면을 통해 시청자들의 눈과 가슴을 자극한다. 스토리AHN(대표 안현미)이 사업자로 선정됐고, ‘제주여성 허스토리’라는 이름으로 전파를 탄다. ‘제주여성 허스토리’는 여든을 넘긴 10명의 제주여성을 담았다. 그 10명의 여성과 마주 앉아 이야기를 나누면서 영상을 전달하는 모더레이터 역할은 고희영 영화감독이 맡았다. 영화 <물숨>으로 잘 알려진 고희영 감독은 왜 모더레이터로 나섰을까.

제주여성생애사 아카이브 영상제작 일환으로 제작된 '제주여성 허스토리'의 모더레이터로 참여한 영화 '물숨'의 고희영 감독. 미디어제주
제주여성생애사 아카이브 영상제작 일환으로 제작된 '제주여성 허스토리'의 모더레이터로 참여한 영화 '물숨'의 고희영 감독. ⓒ미디어제주

“언젠가 해보고 싶었어요.”

짧은 한마디. 제주 출신인 고희영 감독은 늘 자신이 궁금했다. 아니, 그 자신이면서도 제주 여성이라는 존재 자체에 끌렸다. <물숨>이라는 작품도 그런 궁금증을 찾는 작업이었다.

“올해 해야 할 것이 많아요. 그런데 작업을 해보자는 전화를 받고, 앞뒤 가리지 않고 뛰어들었어요. 제주에서 태어났지만 제주 밖에서 더 많이 살았어요. 제가 제주사람인 걸 알면 다들 ‘어쩐~지~’라는 말을 많이 해요. 그걸 들으면 나만의 제주 DNA가 있나?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그걸 모르겠는 거예요.”

제주여성의 DNA? 과연 뭘까. ‘제주여성은 남다르다’고 하는데, 그 말 뒤엔 뭐가 숨겨 있을까.

“제주여성은 어떻게 특정되는지 스스로 정리를 해봤어요. 제주여성은 이 세상에서 가장 성실하고 부지런하며, 놀면 큰일 나는 줄 알아요. ‘독립적’이라기 보다는 ‘남성의존 제로’죠. 하지만 남성의존도는 낮은데 자존감은 낮은 여성. 그래서 마음이 아파요. 외지에서 살다 보면 제주여성들은 다른 지역 여성과 비교될 정도로 너무 훌륭하지만 사회적 분위기는 그러지 못했죠. 어릴 때부터 존중받지 못하고 컸기 때문에 애환과 슬픔이 있어요.”
 

# 고희영 감독이 ‘모더레이터’가 된 이유

고희영 감독은 제주여성으로서, 제주여성을 숱하게 만나며 기록해왔다. 이번 영상제작의 모더레이터로 적격인 이유도 그 때문이다. 그는 10명의 제주여성을 선정하는 섭외과정에도 직접 참여했다. 누군가의 말을 깊이 있게 들어주고, 속에 있는 걸 끄집어내는 역할이 그에게 있다. 10분이라는 짧은 분량에 제주여성의 생애를 담기에 더더욱 그의 존재는 필요했다. 10명의 제주여성들을 만나면서 그들의 생애를 훑어보던 고희영 감독은 ‘어쩐지’에 대한 답을 찾았을까.

“공통질문을 넣어서 무엇이 제주여성의 생애를 관통하고 있는지 찾아보려 했어요. ‘어쩐지’가 무엇인지 밝혀보려고요. 던진 질문은 ‘타임머신이 있어 과거로 가고 싶다면 그 이유’와 ‘내가 제주여성이구나, 내가 그 DNA를 가지고 있구나 느낄 때는 언제인지’를 물었죠. 그 질문을 넣었더니 너무 멋진 대답이 나왔어요. 그 말을 들으려고 고생을 하면서 이 작업을 하고 있구나를 느끼게 됐죠.”

'제주여성 허스토리' 모더레이터로 시청자를 만날 고희영 감독. 미디어제주
'제주여성 허스토리' 모더레이터로 시청자를 만날 고희영 감독. ⓒ스토리AHN

질문에 대한 답은 뭘까. 고희영 감독이 ‘멋진 대답’이라고 부른 그 답은 뭘까. ‘어쩐~지~’에 대한 답을 이어서 들어보자.

“기죽지 않고, 당당함을 가지고 산다는 얘기를 들었어요. 곧이곧대로라고 말한 분도 있어요. 곧이곧대로는 제주여성이 지니는 융통성 없음일 수도 있지만 그 말엔 정직함이 들어 있어요. 여든을 넘긴 삼촌이 말하는 곧이곧대로라는 말은 정직함의 울림이었죠.”

당당하게 산다는 것. 꾸밈없고 거짓 없이 살아온 제주여성. 요즘 사회가 찾는 그런 인재상이다. 그들은 바로 우리 사회가 갈구하는 ‘공정’이라는 걸 일찌감치 실현하던 이들이 아니던가. 그러나 제주여성은 ‘빛나는 존재’이기 보다는 ‘드러내지 못하는 존재’였다. 고희영 감독은 자신이 이 일에 뛰어들 수밖에 없었던 이유 하나를 더 꺼냈다.

“충격받은 게 있어요. 어쩌면 이 일을 하게 된 결정적인 계기이기도 해요. 제주4·3과 관련된 방송 출연을 하게 돼 공부를 하려고 <추가진상보고서>를 보는데 너무 놀랐어요. 교육계 피해나 마을단위 피해는 있는데, 여성 기록이 없어요. 따로 조사하지 않았느냐고 물었더니 조사하지 않았다는 거예요.”

문자화되고 있는 최근의 역사에서조차 제주여성은 밀리고 있다. 구술 역사는 제주여성이 중심이지만 여전히 제주여성은 드러나는 존재가 되지 못하고 있다. 제주문화를 들여다보면 여성이 주역이 아닌 게 없는데도 말이다. 그런 면에서 우리는 ‘어쩐~지~’를 다시 들여다봐야 한다. 사회가 그렇게 만든 면도 없지 않다.

“우리 때 여성들은 사회에 본격 진출했어요. 그야말로 슈퍼우먼인데, 우리들은 ‘슬퍼우먼’으로 불렀어요. 아이를 낳는 날까지 일하고, 젖을 떼기도 전에 출근해서 원고를 쓰기도 했어요. 더 노력했고, 잠을 줄어야 했어요. 노력하면 되는 줄 알았어요. 사실은 사회문제였는데 말이죠. 여든을 넘은 어르신들을 보면 제주도라는 분위기가 이들의 어깨를 억누른 부분이 있었죠. 우리 어머니들의 거친 말투는 겨를이 없어서였던 거예요.”
 

# “제주여성 이야기가 제주 주류 역사로”

감추면 잊히고, 잊히면 사라진다. 제주여성들의 이야기가 그랬다. 비록 늦었지만 ‘제주여성생애사 아카이브’는 사실을 담아두는 시작점이다. 어떻게 하면 제주여성의 이야기를 더 듣고, 기록으로 더 남길 수 있으려나.

“제주여성, 여성 이야기를 하는데 제주출신 여성학자들이 많지 않아요. 앞으로는 학문으로 승화시키고, 제주 주류 역사로 이어지게 해야 할 시점입니다. 제주도청에 성평등정책과가 생긴 것고 반갑고, 늦었지만 아카이브로 만드는 제작비를 마련했다는 것은 의미 있고, 칭찬받을 일입니다. 도청 성평등정책관이 직접 촬영할 때마다 와주니 어르신도 좋아해요. 도청에서 그렇게 해주니 80인생은 표창을 받는 기분이죠.”

'제주여성 허스토리' 방송의 한 장면. 스토리AHN
'제주여성 허스토리' 방송의 한 장면. ⓒ스토리AHN

스토리AHN이 제작한 10부작 ‘제주여성 허스토리’는 8월 19일부터 매주 목요일 밤 11시 20분, 제주MBC를 통해 시청자들의 눈과 가슴을 사로잡는다. 고희영 감독은 제주에 살고 있는 여성들이 ‘제주여성 허스토리’에 관심을 기울여줄 것도 당부했다.

“해녀들은 바다를 정원처럼 가꾼 사람들이죠. 그런데 자존감은 낮았어요. 그러던 그들이 바뀌었어요. 공식석상에서 사람들이 박수를 쳐주면서 해녀들 스스로도 훌륭한 일을 했다는 걸 알게 됐어요. 제주에 사는 여성들이 ‘제주여성 허스토리’에 나오는 할머니를 보면서 멋있는 분이라는 걸 알고, 그 할머니의 멋있음이 자신에게도 있다는 걸 알았으면 합니다. 스스로를 낮추지 말고 더 당당해지면 좋겠어요.”

10부작이 끝나면 가을이 온다. 벌써 가을이라니. 고희영 감독은 가을엔 뭘 꿈꿀까. 그는 제주여성 이야기를 놓을 생각이 없다. <물숨>에 이어, 제주바다를 안은 해녀를 그리고 있다. <물숨>에 나온 해녀보다 더 깊은 바다를 탐하는 제주여성이 다음을 기다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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