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편집 2024-03-29 21:06 (금)
제주 근, 현대 주거건축의 공간사 시론 -5
제주 근, 현대 주거건축의 공간사 시론 -5
  • 미디어제주
  • 승인 2021.06.24 11:08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제주건축 [2021년 4월호] 스페셜 시리즈
김석윤(제주특별자치도건축사회 제17대 회장/건축사사무소 김건축)

근대주거건축의 전개 ①

# 사례1. 관덕로17길27-1, 고씨주택

산지천의 양측을 따라 있는 길 중에는 서측길이 더 역사가 앞선다. 서축항에서 산지목골에 이르는 옛길이 옛 관문도로였고 지금의 임항로는 일제 후기에 동축항 확장과 함께 생겼다.

산지천변 길이 북신로와 만나는 모퉁이 가까이 골목에 있는 고씨 주택은 도심에 위치해 있지만 제주 옛 주거의 고식을 따르고 있는 내용이 주목된다. 마당을 가운데에 두고 안채와 바깥채를 마주 보고 앉히는 안·밖거리 집이다. 여기서 우리는 주거문화의 굼뜬 속성을 증거하는 장면을 본다. 도시화나 생업의 변화가 즉각 주거형태를 변화시키지는 않는 법이다.

안·밖거리가 두 가구로 지적이 분할되는 가족사를 거치고 있으나 창건 당시 한 집일 때의 상황을 살펴야 이 집의 주거문화사적 가치를 알 수 있다. 제주 전통주거의 특성인 별동형 배치방법의 변화를 살피는 것이 제주도 주거사의 흐름을 파악할 유효한 관점이 되기 때문이다. 한국을 비롯한 동양계 주거문화는 방의 조직보다 터잡기(卜居)와 방위가 조영의 핵심이다.

이 집은 집짓기의 우선 절차인 배치에서 안·밖거리집의 전통을 따르고 있으나 구조와 방들의 조직이 일본식이다. 목조심벽구조에 외벽부분은 옛 공법대로 제주돌 쌓기하고 시멘트 몰탈로 틈새를 채웠다. 주거 이념은 전통이고 실현 기술은 새것을 채용하고 있음이다. 목재의 재질은 삼나무로 보인다. 현지산이 아니고 일본에서 들여왔을 듯하다. 다듬고 맞춤하는 치목 솜씨의 세련됨이 숙련된 일본식 다이꾸의 면모를 감지하고 남는다. 안채, 바깥채, 문간채까지 모두 세 채 건물은 지붕에 일식 산가와라를 올렸다. 바깥채와 문간채는 거의 붙어 있는데도 분동으로 지었다. 분동은 제주 주거건축의 전통이다.

안채의 평면은 중복도식 주택의 칸살을 하고 있다. 일식 주택이 서양풍을 받아들여 개선된 새 형식이 중복도식 주택인데 복도를 두면, 방을 건넌방으로 나들며 침해되던 각방들의 독립성을 지킬 수 있다. 방을 사용하는 관습에 양풍이 섞인 모습이다. 부엌 가까이에 창고(고방)을 붙여 둔 것도 동선을 단축시킨 근대성 사고의 소산이다. 안채는 전후면의 툇마루(緣側/엔가와)에 우호(雨戶/아마도)를 설치하여 제주 옛집이 풍채로 비바람을 막았던 원시에서 벗어나고 있다. 우호(雨戶)는 제주도의 기후에는 대단히 매력적인 장치가 아닐 수 없다. 바람이 많이 부는 궂은 날씨에도 집안을 밝고 안정되게 해주고 청명한 일기에는 여러 짝 문들을 모두 한 쪽으로 몰아넣어 툇마루의 개방감과 효용성을 유지해 준다.

바깥채는 홑집 평면의 전후에 퇴간을 붙여 마당쪽으로는 아마도를 달고 뒤쪽에는 담장에 처마 끝이 닿을 만큼 일식 아마하시(雨端, 눈썹지붕)를 달아서 벽장 아래에 시설된 온돌에 불을 때러 다니는 통로로 쓴다. 이 아마도와 아마하시, 일식 기와 때문에 이 집은 영락없는 일식집의 외모를 보여주고 있는데, 제재목 네치각재 단면을 기본으로 한 기와리(木割)의 경쾌한 구조미를 보여준다. 밖거리 눈썹지붕도 이전에 제주에는 없던 이색적인 상세이다. 제재목을 사용한 네모 서까래와 지붕널을 노출시키고 있는 것, 격자살 미서기문이 이 경쾌함을 더욱 농짙게 한다. 마루와 복도, 툇마루에는 기둥과 보 등의 구조재와 같은 재질의 널판으로 장마루를 깔았다. 장마루도 제재기술이 도입되고 나서 쓰인 근세형 공법으로 오래된 우물마루와 대조된다.

한편 제주돌을 장대로 다듬은 섬돌은 토속의 고법이고 방은 다다미방이 아니라 개량된 온돌방이다. 온돌 개량이 일제강점기 동안에도 지속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일본식 주택이 제주에 전래되는 초기에는 오카베(大壁) 구조이거나 동척회사의 사택에서 보이듯이 널판벽 형식이 전래하였을 것이나 이 집은 제주 옛 법대로 돌을 쌓고 시멘트로 줄눈을 거칠게 발랐다. 본채와 같은 맥락의 단간 평대문은 출입구 양측 여분에 허드레들을 보관하는 시설을 해서 수납용으로

알뜰하게 활용했다. 드러난 지붕밑은 네모 서까래가 아니고 둥근 서까래로 볼품을 셈에 둔 것이 본채와 차이가 난다.

부엌 가까이 우물이 있는 것은 수원이 넉넉했던 집터의 실리를 살린 일이겠는데 집 울안에 우물을 둘 수 있는 형편을 가진 동네는 제주도 안에는 성안 뿐이었다.

밖거리 한 칸 폭의 쪽방은 손님을 위한 것 아니었을까?

안거리 후면 툇마루에 접해 있던 제거식 화장실은 개축되어 원형이 없어졌으나 밖거리의 뒷모습과 같이 처마 아래로 눈썹지붕으로 이어졌을 것으로 추측된다. 이런 저런 내용에 미루어 이 집은 일제강점기의 중후반에 안·밖거리형 제주전통주거형식이 도시형주거로 변화되기 이전단계, 즉 일본풍과 우리전통이 융합된 근대주거의 초기형식으로 사료적 가치를 지녔다.

# 사례2. 삼도2동1174-5 일식 주택

이 집이 있는 속칭 무근성 일대의 지적도를 보면 대지들이 반듯반듯하게 획일적으로 구획되어 있다. 얼마 전에 새로운 가로계획으로 이 지역의 공간의 크게 달라져 버렸지만 골목길도 옛 마을의 올레 모습하고 대조적으로 직선형이다. 인접된 목관아 가까운 지역에 있는 경계가 불규칙한 마을 길에 비하여 규칙적인 형상을 가진 것은 후대에 이루어진 새 동네라는 얘기가 된다.

단동 배치 주거는 하층민들에 한정되었던 것 외에 전통적인 제주도식이 아니다. 정원을 남쪽에 두고 이쪽을 향하여 단일동의 주거를 배치한 것은 일조량 확보와 개인권 확보를 우선시키는 근대건축의 교과서적 배치기법을 적용하고 있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주택의 뒤쪽인 북측에 대문을 두고 진입하는 것도 개혁적인 건축계획이념에 따른 것이다.

본채의 구조는 서양에서 배운 일본식의 근대형 목구조이다. 전면에는 주지붕 처마 아래로 엔가와 부분에 아마하시를 달고 있는 모습이 더욱 일본풍을 자아낸다.

기둥재와 보는 반듯한 제재목을 사용하여 일본풍인데 서까래는 한옥식으로 둥굴게 다듬고 소매걷이를 한 것이 눈길을 잡는다. 눈썹지붕의 서까래는 각목으로 가냘픈 일본풍 상세를 사용해서 구조에서 한식과 일식이 공존한다. 지붕에는 널판 위에 알메흙을 깔고 시멘트제의 일본식 기와를 얹히고 추녀와 마루기와의 이음새를 회바름(시구이)으로 메웠다. 이것은 일본기와 잇기의 보편적인 시공법이다. 전면의 엔가와와 개구부에 격자살 유리창과 문을 단 것은 비바람을 막는 장치로 이 시대에 일본식에서 배운 가장 매력적인 트렌드였다.

개구부를 제외한 외벽부에는 제주돌로 옛 방식에 따라 덧벽을 쌓고 새 재료인 시멘트 몰탈을 온통 덮고 그 위에 다시 몰탈 뿌리기 기법으로 맵시를 냈으니 일식집의 오카베나 판장벽보다 기밀성도 좋고 내구성 면에도 실속이 있게 되었다.

평면의 간잡이도 전통과 일본식이 섞였다. 온돌시설이 있는 것은 기술과 새로운 장치는 신공법을 수용하고 생활습속은 풍토의 것을 지키고 있는 일제강점기 중·후기 주거형식을 보여주고 있다. 내부는 격자살 한지문으로 가볍게 간을 가르고 내벽은 산자 흙벽에 회바름을 노출하였거나 벽지 도배마감이다. 천장도 모두 산자흙바탕에 회바름하였다.

대문은 평대문으로 본채의 구조와 재료가 같으나 서까래는 제재된 각목을 쓰고 있고 처마돌림으로 마구리를 막았다. 변소는 수거식으로 집 뒤 도로변에 따로 있다. 토속과 일본식이 섞였으나 전통의 기본 조영기법을 간직한 절충형 주거형식으로 일제강점기 중·후기(1930~1940년) 이 지역에 집단적으로 건설되었던 집들 중에 하나인 듯하다. 전통시기에서 벗어나 제주시가 최초 계획형 도시확장 형식을 추정할 수 있겠다. 반듯한 대지분할 조성이나 단동의 남향배치형식, 건축구조와 장마루와 왜식기와 그리고 몰탈 뿌리기 등 재료와 공법이 두루 새롭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딥페이크등(영상‧음향‧이미지)을 이용한 선거운동 및 후보자 등에 대한 허위사실공표‧비방은 공직선거법에 위반되므로 유의하시기 바랍니다.(삭제 또는 고발될 수 있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