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나는 제주건축가다’는 제주에서 활동하는 젊은 건축가를 만나, 건축에 대한 이야기와 제주라는 땅에 대한 이야기를 전하고 있다. 기획은 모두 3개로 나눠진다. 건축가가 꼽은 땅에 대한 이야기, 건축가와 나누는 대담, 자신을 이끌어 준 건축 관련 책을 담는다. 대담은 문답식으로 싣는다.
이번에 소개할 건축가는 건축사사무소 선우선의 강봉조 대표이다. 서귀포시 성산읍 신양리 출신으로, 고향에서 진행된 개발의 현장을 몸소 느껴야 했다. 그는 땅에 대한 이야기를 ‘둘러싼 느낌’, 즉 ‘위요된 공간’으로 삼았으나 여기서는 그의 고향이기도 한 신양리를 언급하겠다. 그가 소개한 책은 버나드 루도프스키의 <건축가 없는 건축>이다.
# 신양리 – 개발이란 무엇인가
성산읍 신양리는 섭지코지를 떠올리게 만든다. 가장 강렬한 기억을 심은 건 드라마였다. ‘올인’(2003)이라는 드라마는 섭지코지를 뜨게 만들었다. 좋은 일인지, 그렇지 않은지는 사람들마다 온도차가 다르다. 지금과 같은 제주에 대한 열풍의 시기는 아니었지만, 결과적으로는 섭지코지를 개발이라는 발에 닿게 만든 하나의 사건인 건 맞다.
드라마의 영향으로 섭지코지에 발을 딛는 사람이 늘어날 때, 기획기사를 취재하기 위해 둘러본 기억이 있다. ‘제주좀녀’라는 기획 취재를 한창 하고 있을 때였다. 고성신양어촌계를 찾고, 신양리 바닷가 곳곳을 누볐다. 그때만 하더라도 지금의 풍경과는 달랐다. 드라마가 끝나고 세트장 ‘올인 하우스’가 남겨지긴 했지만, 거대자본이 섭지코지를 장악한 시기는 아니었기 때문이다. 바다의 풍광도 온전했다. 곳곳엔 물질을 하며 쉬던 불턱도 잘 드러날 때였다.
신양리는 예쁜 해변을 지녔다. 섭지코지가 동쪽으로 막아주고, 남쪽을 향해 바다는 열려 있다. 그때 취재 기록을 살펴보니 알여, 배부서진알, 머릿개, 곰들래기, 큰보름알, 방애여, 고래죽은알, 큰여, 오등애, 방두포, 새개 등의 바닷가 이름이 있다. 지금도 그렇게 불려지는지, 그렇게 불러주는지는 알 수 없다. 하도 오랜 기억이고, 그 바닷가에 대한 관심에서 너무 멀어진 탓도 있다.
남쪽으로 열린 신양리 바닷가는 뭔가에 둘러싼 느낌이다. 강봉조 선우선 대표는 어릴 때부터 둘러싼 느낌에서 살았다고 한다. 바닷가가 그랬고, 마을이 그랬고, 자신이 살았다는 감귤밭이 그랬다. 둘러싸는 느낌을 우리는 한자어를 빌어 ‘위요’라고 부르곤 한다. 위요는 뱃속의 태아부터 느낀다. 자궁에 있는 태아는 위요된 그 공간에서 아늑함과 평온함을 느낀다. 그리곤 곧 세상에 나올 준비를 한다. 아이들도 마찬가지이다. 아이들은 놀다가도 옴팡진 곳을 찾는다. 책상 밑이나, 벽장 안은 아주 특별한 그들만의 위요공간이다. 자궁의 기억을, 그 공간의 아늑했던 기억을 좀체 잊지 못하는 게 아이들이다. 그런데 어른은?
우린 섭지코지 개발을 보면서 위요가 아닌, 파괴하는 어른을 본다. 섭지코지가 동쪽 바다를 향해 열린 사실을 부인할 사람은 없다. 거기서 무슨 위요를 찾느냐며 항변할 이들도 있다. 그러나 열린 바다라고 해서 모든 걸 다 열어젖혀야 한다는 원리는 없다. 덜 자연에 배격되는, 굳이 말하자면 자연에 순응해줘야 한다. 특히 건축물이 자연을 배격하는 일은, 자연에 상처를 입히는 일이다.
안도 다다오. 노출 콘트리트의 대명사. 건축계의 노벨상으로 불리는 프리츠커상 수상자. 세계 곳곳에 그의 작품이 있고, 제주에도 있다. 섭지코지에도 있다. 섭지코지엔 2개의 작품을 내놓았다. 하나는 지니어스 로사이(지금의 유민미술관), 또 다른 하나는 글라스하우스. 섭지코지에 있는 안도의 두 작품은 다른 얼굴이다. 지니어스 로사이는 ‘땅의 혼’이라고 불리는 뜻 그대로 땅에 심었다. 지니어스 로사이를 만나는 이들마다 좋아한다. 유민미술관 이후엔 다소 상처를 입기는 했지만.
글라스하우스는 다르다. ‘땅의 혼’이 아니라 ‘땅을 거부하는 욕망’이 가득하다. 글라스하우스는 북쪽에 있는 성산일출봉을 바라보며 자신이 곧 일출봉이라고 외친다. 거대한 자연물 앞에서, 인공물인 글라스하우스가 맘껏 탐욕을 드러내고 있다.
[대담] 건축가 강봉조를 만나다
건축사사무소 선우선. 강봉조 소장이 선우선 대표이다. 그는 서귀포시 성산읍 신양리가 고향이다. 바다풍광이 아름다운 신양리는 드라마 ‘올인’으로 뜨면서 모습이 차츰 달라졌다. 급기야는 대기업 자본이 몰아치면서 예전 모습을 찾는 건 그야말로 ‘옛날 일’이 되어버렸다. 인터뷰는 선우선 사무실에서 진행됐다. 인터뷰 내내 고향에 대한 강한 애정이 묻어났다.
- 책 <건축가 없는 건축>을 꼽은 이유가 궁금하다.
읽어보라는 선배 건축가의 권유였다. 2001년인가, 2002년이었다. 그때는 무심히 읽었다. 다시 읽게 된 건 신문사에 글을 강제적으로(?) 쓸 기회가 생겨서다. 실무를 하면서 힘들었던 것도 있고, 나름 생각을 정리해야겠다고 해서 다시 그 책을 훑어보게 됐다. 건축은 서양 건축 주류로 하고 있는데, 이 책은 다른 분야도 봐야 한다고 말한다. 공감 가는 것도 있고, 생각이 더 깊어졌다.
- 라이센스를 가진 사람들이 설계를 하지만, 오래전부터 사람들은 건축행위를 해왔다. 책은 그 사람들이 자연 그대로의 상태에서 건축행위를 하고 있다고 강조하는데.
책을 보면 전문적인 전문가의 예술 이전의 것도 배울 게 많다고 한다. 허름한 집에서도 건축적 교훈을 얻을 수 있는 부분도 있다. 미학적 부분만 우선 할 게 아니라 현실에서 나오는 기능적 문제도 중요하고, 자세도 가다듬게 된다.
- 책을 보면 자연환경에 맞춰서 사람들이 사는 걸 알 수 있다. 사람들은 제주도에만 돌담이 있는 줄 알지만, 아프리카 서부 카나리아제도에도 있다. 아프리카에도 제주돌담이 있다는 건, 사람들이 자연과 대립하지 않고 건축활동을 해왔다는 걸 알려준다.
오키나와에 갔을 때 ‘오키나와현공문서관’을 들렀다. 그곳은 오키나와의 곡식창고에서 모티브를 따왔다고 했다. 책에 보이는 예전 건축물은 현재에 적용해도 나빠 보이진 않는다. 그렇게 본다면 이전 사람들도 현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건축물을 만들었다. 고급스런 건축만이 중심이 꼭 돼야 하느냐, 책은 그걸 시사하는 바가 있다.
- 애착을 지닌 땅에 대한 이야기를 건축 기획을 통해 해오고 있다. 땅을 이야기한다면.
살아온 얘기부터 해야 할 것 같다. 나고 자란 신양리는 동쪽과 남쪽으로 바다를 향해 있다. 순비기나무가 많은 모살(모래) 언덕이 마을을 감싸고 있다. 모살 언덕이 감싼 곳 안에 돌담으로 구획을 짓고, 그 안에 집을 짓고 살았다. 지형을 이용한 모살 언덕이 담이 되며, 다시 한번 집 주위를 더 쌓은 돌담은 바람 많은 환경에 대응하는 옛 어른들의 지혜였다.
바다를 보기 위해서는 사람 키 높이의 언덕을 올라야 가능했다. 평평한 곳도 있는데, 맨발로 노는 축구장이었다. 전경초소가 있는 곳은 ‘초소동산’이라고 불렀는데, 그 동산엔 평상이 있어서 어른도 놀고 아이들도 놀았다. 물질간 어머니를 기다리는 어른도 있었다. 우리는 놀다가 수영도 하곤 했다.
- 또다른 기억은?
초등학교 5학년 때인가, 6학년 때였던가. 그때쯤 누나와 형들이 도시로 나갔다. 어머니와 아버지, 나, 이렇게 살게 됐다. 마을에 살다가 감귤밭이 있는 과수원으로 이사를 했다. 마당이 감귤밭이었다. 대게 감귤밭은 바람을 막기 위해 쑥대낭(삼나무)으로 돌담을 둘렀다. 쑥대낭으로 두른 그 공간은 신작로가 있어도 소리만 들리는 혼자만의 공간이었다. 5월에는 감귤꽃 향기에 취하고, 11월이 되는 가을엔 주황색 열매가 맺히는 풍성한 마당이었다. 나무로 둘러싸인 그 공간은 하늘만 보였다. 트인 하늘을 보며 혼자 크게 노래를 부르기도 했다. 하늘만 보이는 마당은 소리를 크게 질러도 누가 뭐라고 하지 않는 나만의 공간이었다.
이런 공간적 경험 때문인지, 대학을 다닐 때 루이스 바라간, 안도 다다오, 캄포 바에자가 설계한 하늘로만 트인 마당을 갖는 주택이 좋았다.
- 그게 주택 설계에도 반영이 되나.
그런 쪽이 좋다 보니, 건축주의 요구를 반영하지 못하기도 했다. 옥상을 쓰면서도 경사지붕을 취하겠다는 게 ‘눈썹지붕’인데, 왜 그런 걸 요구할까라는 생각을 하곤 했다. 그들을 다르게 설득할 방법이 있었을텐데, 내가 좋아하는 취향으로만 향하려 했던 아집과 어리석음에 반성을 한다.
그런데 지금은 심의기준 때문에 경사지붕을 쓴다. 심의기준으로는 독창적인 조형성이 없다면 경사지붕이어야 한다. 예전엔 주변에 있는 돌과 나무, 흙, 풀이 재료였고 기술적 한계가 분명했기에 경사지붕을 써야했지만 지금은 구조적 대응 상황이 다르다.
- 3층이나 4층 건물인데도 다들 경사지붕이다.
좀 어울리진 않는다. 남원을 오갈 때 남조로를 따라 가다 보면 3층인가 4층 건물들이 보인다. 다들 경사지붕인데 비례가 좋아 보이진 않더라. 건축심의를 통과하기 위해 경사지붕을 쓰는 상황이다.
- 전체적인 디자인으로 평가를 한다면 좋겠다. 평지붕이라도 디자인 감각이 탁월하면 경사지붕을 쓰지 않아도 될텐데.
언젠가는 바뀌어야 할 부분이다.
- 건축주는 어떻게 대하나.
예전엔 내가 좋아하는 취향을 강제적으로 설득하려고 했다. 지금은 요구하는 바를 맞춰주려 한다. 그에 맞게 해줘야 한다. 내 집을 짓는 게 아니지 않는가. 건축주는 파트너인데 제 집인양, 제 작품인양 하는 건 바람직하진 않다. 그렇다고 다 들어준다는 건 아니다. 주변의 맥락과도 맞아야 하기 때문이다.
- 옛날엔 주변 재료를 활용해서 집을 짓곤 했다. 지금은 불가능하다. 무단벌채를 할 수도 없고, 재료를 훔쳐올 수도 없다.
‘건축가 없는 건축’이 지닌 함의의 밑바당엔 동네 목수가 있고, 동네 석공이 있었음을 잊으면 안된다. 옛날 사람이라도 그들의 조력없이 집을 그냥 짓기는 어렵다. 규모가 조금 있다면 그런 사람의 도움이 필요하다. 지금은 우리와 같은 사무소가 그런 역할을 해야 한다.
- 신양리 마을 이야기를 더 해 보자. 옛날과는 완전 다른 풍경이다. 섭지코지도 그렇고.
섭지코지라면 안도 다다오의 글라스하우스가 떠오른다. 예전엔 그 일대를 ‘보름알’이라고 불렀다. 선돌이 있는 쪽에 테역밭(잔디밭)이 있고, 많이 놀던 곳이면서 소풍도 가던 곳이다. 거기에 글라스하우스가 들어섰다.
글라스하우스가 다 건축되고 나서였던 것 같다. 제주시내 어느 호텔에서 관련 세미나를 열었다. 안도 다다오도 왔는데, 왜 글라스하우스를 그렇게 지었느냐고 대들려고 했다. 물어보지 못한 게 후회가 된다. 일본에서는 자신의 작품을 땅속에 담으면서 우리 동네에, 추억이 어린 땅에 볼품없이 왜 그랬냐고 물으려 했다. 왜 그랬냐며.
- 진짜 왜 그랬는지 궁금하다.
중국 상하이를 갔을 때 안도가 설계한 오페라하우스를 봤다. 그 설계 과정을 보여주는 다큐멘터리도 접했는데, 다큐 속에서 안도는 중국 현지 소장이나 직원들에게 매우 강하게 나오더라. 그런 사람이 왜 그랬는지, 자본에 굴복을 할 사람도 아닌 것 같은데.
- 안도가 고집을 꺾을 때도 있다. 본태박물관도 사실은 노출콘크리트도 다 하려고 했다. 현대가의 고집에 꺾여서 일부는 한옥 담장을 썼다고 직접 들었다.
안도는 아픈 몸을 이끌고 상하이 오페라하우스를 설계하면서도 에너지가 넘쳤다. 정말 글라스하우스는 왜 그랬는지 의문이다. 내 과거의 사진에 담긴 아름다운 그 곳의 기억을 애들에게 전해줄 수 없게 됐다.
- 섭지코지는 개발이 돼버렸다. 제주 자연을 일개 기업이 자기 걸로 만들었을 때 어떻게 되는지를 섭지코지가 보여준다.
예전에 늘 가던 길로 섭지코지를 갈 수 있겠지만 괜히 위압감을 받는다. 남의 땅이라는 것 때문이다. 이전부터 육지사람이 많이 가지고 있긴 했다. 그러나 그때는 순비기동산 사이로 해송이 있었고, 아이들이랑 칼싸움을 하며 놀던 장소였다.
도로도 문제이다. 섭지코지가 알려지면서 찾는 관광객이 늘었다. 그들에게 편의를 제공하기 위해 착한 행정이 여기저기 길을 뚫어놓았다. 우리 마을은 왕복 4차선이다. 일출봉으로 연결되는 주도로와 일주도로에서 내려와서 섭지코지로 연결되는 도로가 마을로 들어온다. 조그마한 집만 있는 동네인데, 강남대로에만 있을만한 큰 도로를 만들면 스케일의 충돌이 발생한다. 그게 우리 마을만의 문제는 아니다. 길에 보이는 건 흑돼지, 고기국수, 고등어조림, 갈치조림 등의 커다란 간판이다. 이전에 친구집이 팔려서 카페가 되었다. 크리스마스 트리에나 장식을 하는 전구가 돌담에, 옥상의 지붕에 널리곤 한다. 요란한 커피숍으로 바뀌면서 어지럽다.
- 아마도 커다란 관광단지가 곁에 있어서 그런 건 아닐까. 옛 마을 속에 들어왔더라면 그런 행위는 하지 못할텐데.
물론 시대적 요구는 바뀔 수밖에 없겠지만 너무 아쉽다. 야트막하게 이뤄진 걸 바탕삼아서 예전 기억도 이어가면 좋았을 걸.
건축가 승효상의 글귀가 떠오른다. 그 글귀는 이렇다.
‘터무늬 없는(터에 새겨진 무늬) 삶이란 땅과 무관한 유목민적 삶이다. 정주한다는 것은 땅에 삶의 흔적을 남기는 일이며, 기억을 적층하는 과정이다. 그러나 더 많은 재화를 축적하기 위해 이 집 저 집을 옮겨 다니는 도시유목민 우리에게, 땅에 남겨진 기억은 새로운 역사를 창조하기 위해 사라져야 하는 폐습이었으므로, 우리는 항상 기억상실을 강요받았으며, 과거란 그냥 지나간 것으로만 안다.’
승효상은 부동산적 물건으로 전락한 건축을 비판했고, 건축이 땅과 밀접한 관계를 맺어야 하는 중요성을 설명했다.
- 땅은 무척 중요한데, 신양리는 마을 자체가, 아니 세상이 바뀔 정도로 개발된 곳이다. 제주도는 그래도 자연 그대로인 곳이 있다. 제주도가 가진 땅의 의미를 설명해준다면.
시대적 요구에 따라갈 수밖에 없겠지만 재산적 가치로만 건축을 바라보지 말자. 유럽에 가면 그 풍경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그렇듯이 자연에 접근하는 태도에 변화가 있어야 한다.
- 요즘 제주도는 개발 이익을 바라는 사람들이 많다. 그런 풍토에 대한 느낌도 있을테다.
비자림로 확장을 두고 말이 많다. 거긴 개인적으로 사진을 찍으러 많이 돌아다닌 곳이다. 쑥대낭이 하늘로만 뻗어서, 하늘만 트인 게 너무 좋다. 다른 이들은 경운기 한 대만 지나가도 사고 때문에라도 넓혀야 한다지만, 개인적으로는 그와는 생각이 다르다.
- 경운기 이야기가 나왔으니 말인데, 제주도에 오는 관광객들은 제주도를 배워야 한다. 경운기가 있으면 어떻게 운전을 해야 하고, 관광지도에도 친절하게 여기는 경운기가 다니는 곳이라고 알려주면 안될까.
예전에 영화인지, 다큐멘터리인지 장면 하나가 떠오른다. 유럽의 어느 산자락 마을의 좁은 도로였다. 마을로 들어가는 긴 길에 차들이 늘어섰지만 사람들은 그걸 즐기고 있었다. 생각의 차이이다.
- 사람이 늘어난다고 돈을 많이 뿌리는 건 아니다. 오히려 제주에 싸게 오고 값싸게 놀다 가는 이들도 많다. 개발에 대한 생각도 바뀌어야 한다.
세월이 흘러서 계속 개발이 됐을 때, 제주도는 어떤 메리트가 있을까 생각하게 된다. 제주를 찾는 이유는 뭔가 다른 게 있기 때문이다. 주변에도 보면 돈가스 집이 넘친다.
- 트렌드를 쫓지 않고, 어떤 식으로 제주색을 낼지를 찾아야 한다. 돈가스만 해도 그렇지 않나.
강남대로에 살던 사람이 제주 와서 비슷한 도로를 보고, 그렇게 마을 안길이 뚫린다면 다를 게 뭐가 있을까. 거기서 봤던 건물이 제주에 와도 똑같이 있다면 제주라는 특색에 이끌려 올 수 있을까. 점점 우리가 가진 자산을 갉아 먹는다는 생각이다.
- 너무 보편적인 건축행위가 제주에서 이뤄진다. 그렇다면 지역성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자.
지역성은 늘 고민된다. 결론을 내지 못한 부분이다. 제주에서 태어나서 제주에서 건축을 하든, 제주에서 태어나 육지에서 건축을 하든 똑같이 지역성을 고민한다. 시대에 걸맞지 않다면 잊어야 한다. 경사지붕이 그렇듯이.
이젠 시대와 맞지 않은 건 잊고, 받아들일 건 받아들여야 한다. 변용이 가능한 것은 곰곰이 생각해서 풀어내야 한다. 자신의 경험을 토대로 녹아내려고 노력하는 것도 중요하다.
땅은 혼자만 있는 건 아니다. 주변 땅과 맺어지고 이뤄진다. 주변 환경을 고려하면 그 자체로도 지역성을 담게 된다. 옛날 올레를 꼭 담아야 지역성이 되는 게 아니듯이, 공간 구성 요소 등은 자신이 고민해서 풀어야 한다.
제주도 땅은 평지도 있고, 오르락내리락 하는 지형도 있다. <건축가 없는 건축>의 표지는 예전 남수각 모습이랑 흡사하다. 예전 어른들은 지형에 맞춰서 작업을 해왔다. 그래서 그 풍경이 이뤄진 것처럼.
- 어떤 건축을 할 때가 어려운가.
주택이 쉬우면서 어렵다. 상가는 다중들이 사용 가능하도록 융통성 있게 계획을 하면 된다. 주택은 가족의 특수한 여건을 보고, 가족들이 한평생 그 집을 사는 건 아니기에 어떻게 변용할지 상상해야 한다. 주택은 재밌으면서 어렵다.
- 인상적인 건축주가 있나.
수산 출신으로 크게 사업을 하는 건축주가 있었다. 고집이 센 어르신이었는데도, 의도대로 다 받아주더라. 제주석을 들쭉날쭉 붙이는 작업인데 들어줬다. 덕분에 어르신의 딸 건물도 하게 됐다. 한 건축주에서 2건의 수주가 생긴 셈이다.
- 제주도를 지역적으로 동서남북, 바닷가나 중산간으로 나눴을 때 건축행위가 쉽거나 어려운 곳도 있을텐데.
한경면 고산리 일대가 어렵지 않을까. 거기는 평평하다. 굴곡이 많은 땅이면 해답을 찾기가 쉬울텐데, 평지라면 고민이 더 될 것같다.
- 건축가들이 사회적으로 해야 할 역할로는 뭐가 있을까.
건축을 알리는 작업인데, 우선은 사무실에서 그런 활동을 하고 있다. 건축주가 사무실에 오면 그들과 생각을 나누면서 우리의 생각을 전달한다. 건축주도 ‘이런 거구나’ 깨닫게 된다. 우리가 중요하게 여기는 부분이 있다면 설득을 하게 된다. 그런 게 우리의 역할이다. 우리가 건축주를 만날 때 돈으로만 보지 않고, 우리가 지닌 생각을 애정을 다해 보여주고, 건축주가 그걸 알면 협조를 해주게 마련이다. 이처럼 우리 본업에 충실한 게 우리의 역할이다.
- 건축주 세대별로 요구사항이 다르곤 한다. 나이가 든 건축주와 젊은 건축주의 입장이 다르다. 만일 60대 이상의 어르신이 2층 주택을, 30대 부부가 골방 하나만 설계를 해달라고 한다면.
30대는 아기를 낳으면 확장을 고민하고, 60대는 2층까지 필요 있을까, 그 얘기 아닌가. 그런데 60대 어른이 평소엔 1층만 사용하고, 위층은 애들이 명절에 내려올 때 사용한다면 그건 수용해줘야 한다. 젊은 사람이 애 낳고 장래를 봐서는 크게 해야겠지만 가진 돈이 없다면 그 형편에 맞춰야 한다. 나중에 짓게 되면 그 관계를 보도록 해준다. 돈이 없는데 규모를 더 크게 하라고 할 순 없다.
- 존경하는 건축가는 누구인가.
마리오 보타는 디테일이 대단하다. 알바로 시자도 떠오른다. 대학교 때 모양만 생각하다가 욕을 먹은 기억이 있다. 그때 평면에 신경을 쓰라는 지적을 받았다. 외형의 가치보다 내부의 평면과 단면으로 인해 발생하는 공간의 느낌을 강조받곤 했다. 그때 ‘곡선은 아무나 쓰는 건 아니’라는 말을 들었다. 알바로 시자의 곡선은 끌리게 하는 뭔가가 있다. 파주에 있는 ‘미메시스’는 아주 이질적으로 보이고, 평면으로는 느낌이 날 것 같지 않은데, 끌리게 만든다.
겉모습으로 승부를 걸려고 하는 게 아니라 안을 위해서 어떤 노력을 했느냐가 궁금하다. 그 느낌을 위해서 대체 어떤 고민을 하는지, 평면에서 보는 느낌과 사진으로 보는 느낌이 다르다. 알바로 시자의 ‘산타마리아 성당’을 보면서 그런 느낌을 받곤 한다.
- 다른 나라의 건축물을 보면서 느끼는 점도 있을 것 같다.
중국 쓰촨성 건축가인 리우 지아쿤의 작품을 보러 갔을 때였다. 지아쿤의 작품이 아닌, 다른 작품을 보면서 반성을 했다. 중국의 건물은 제주시내에서 보는 그런 상가 건물과 비슷했다. 국제주의 양식이 그렇듯, 거의 비슷한 건축물을 만났다. 제주도에서 설계하는 내가 중국 건축가들이랑 똑같이 하고 있었다는 반성을 하는 계기가 됐다.
- 사무소 이름인 ‘선우선’에 담긴 의미는 무엇인가.
건축의 외관은 부차적인 것이다. 건축의 존재 가치는 평면과 단면으로 조직된 공간이라 생각한다. 건축은 그 안이든 밖이든 관계를 맺고 살아가는 사람과 자연, 도시 등에 대한 건축가의 애정이 중요하다는 의미이다.
<건축가 없는 건축>, 버나드 루도프스키 지음
이 책은 1964년 11월 9일부터 이듬해 2월 7일까지 미국 뉴욕에 있는 현대미술관(MoMA)에서 열린 전시회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책이다. 건축가이면서 비평가였던 루도프스키는 단순한 건물로서 건축을 바라보지 않고, 인류문명의 한 축으로 건축을 바라봤다.
<건축가 없는 건축>은 우리나라에 두 개의 버전으로 번역되었다. 이 책이 우리나라에 처음 소개된 건 1979년이다. 광장건축을 이끌던 건축가 김원, 그가 도서출판 광장을 등록하고 책의 판권을 가져왔다. 그러다 절판된 이 책은 2000년대 들어서 다른 도서출판에 의해 나온다. 광장 때 <건축가 없는 건축>은 ‘계보에 오르지 않은 건축물들의 짧은 소개’라는 부제를 달았고, 2000년대에 나온 책의 부제는 ‘토속건축의 짧은 소개’이다. ‘논 페더그리드(non-pedigreed)’를 도서출판 광장은 원문 그대로, 다른 책은 ‘토속’이라는 말로 대신했다. 어느 번역이 옳고 그르다는 없다. ‘계보가 없다’는 건 정통이 아니라는 뜻이 되며, ‘토속’은 지역색을 강하게 표출하고 있다는 느낌이 좀 더 강하다고나 할까.
<건축가 없는 건축>은 건축 교육을 전혀 받지 않은 이들이 만들어내는 건축물을 소개하고 있다. 건축 계보랄 게 없는 이들은 정말 아무런 교육을 받지 않았을까. 그러진 않다. 선사시대라고 하더라도 그의 아버지, 아버지의 아버지…. 수많은 조상들이 땅을 파는 기술, 지붕을 덮는 기술, 도구를 만드는 기술을 전수해왔다. 다만 그들은 ‘건축가’라는 라이센스가 없었고, 정규 건축수업을 받지 않았을 뿐이다.
문명은 생겼다가 사라지곤 한다. 하지만 사라진 문명의 모든 게 없어지진 않는다. 문명을 이루던 ‘껍데기나 다름없는 이름’ 혹은 문명을 이끌던 주인공이 바뀌었을 뿐이다. 문명이 인간을 위해 만들어둔 문화는 이어지고 또 이어진다. 특히 숱한 문화는 그들의 환경에 맞게 만들어졌다는 점이다. 건축 역시 그렇다. 책에 다음과 같은 문장이 있다.
“전문가의 예술이 되기 이전의 건축에서도 배울 점이 많다. 교육받지 않은 건축가들은 그들이 만든 건축물을 자연환경에 조화시키는데 경외할만한 재능을 보여준다. 그들은 현대의 건축가들과 달리, 자연을 정복하려 하지 않고 기후의 변덕과 지형의 도전을 기꺼이 받아들이고 있다. 우리들은 평탄하고 특색없는 땅(지형에 어떤 결함이 있으면 불도저로 쉽게 밀어버린다)을 가장 좋아하는 반면, 보다 정교한 사람들은 험준한 땅에 매료된다.”
루도프스키의 이 문장은 교육받지 않은 건축가들은 비록 ‘전문가’라는 타이틀은 지니지 않았지만 자연환경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거대자본으로 밀어붙이는 지금의 우리와 달리, 자연을 ‘정복’ 대상으로 삼지 않고 ‘순응’하며 살아갈 친구로 봤다.
도시는 늘 확산을 꿈꾼다. 도시를 지배하는 자들의 욕망이 분출됐을 때 그런 현상이 나타나곤 한다. 예전엔 사람이 사는 곳은 한정적이었고, 어디를 가나 도시와 도시를 구분하는 억제장치는 있었다. 억제장치는 해자일 수도, 성벽일 수도, 제방일 수도 있다. 현대는 그런 장애가 필요없다. 무조건 확장이 답이다. 루도프스키는 그런 도시의 생성도 불만족인 모양이다. 그는 그걸 ‘건축적 습진’으로 불렀다. 습진은 치료를 받아야 하지만, 현대를 사는 우리들은 확장에 확장을 거듭하며 건축적 욕망을 발산하고 있다.
루도프스키는 건축가에만 의존하는 경향도 지적한다. 건축가는 필요하지만, 사업과 자신의 명성만 쌓으려는 건축가에 기대다 보면 생활예술이 될 수 없음을 루도프스키는 비판한다. 건축가에겐 그리 좋은 이야기는 아닐테지만, 전문적 건축가의 손이 닿지 않은 날 것 그대로의 토속 건축에도 관심을 기울여보자는 얘기로 들린다.
날 것 그대로의 옛 건축은 하찮다는 편견도 벗어던져야 한다. ‘원시적’이라는 단어를 붙이는 건 ‘건축가 없는 건축’에 대한 모독일 수도 있다. 오래 전에 이뤄졌던 건축행위는 그 당대를 살던 사람들의 공통된 문화유산으로, 그들 구성원의 자발적이면서도 생존 지향적인 행위였다. 거기에 덧붙인다면 ‘공동체적인 예술’이었다.
책은 156개의 사진을 담았고, 각각의 사진에 대한 설명을 붙였다. 혈거생활도 있고, 옮겨다니는 유목민 텐트도 있다. 갈대로 엮은 지붕을 쓴 건물도 보이고, 살아있는 나무를 지붕삼은 집도 있다. 우리의 눈에는 하찮게 보이지만, 그들 눈에는 가장 쉬우면서 자연을 정복하지 않고서도 자연과 함께 생존하는 방식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