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편집 2024-03-29 14:21 (금)
4.3행불인 등 335명 '전원 무죄'... "빨갱이 굴레 벗어나, 평안 찾길"
4.3행불인 등 335명 '전원 무죄'... "빨갱이 굴레 벗어나, 평안 찾길"
  • 김은애 기자
  • 승인 2021.03.16 21:36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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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지법 제2형사부, 4.3행불인 등 335명 대한 재심 진행
검찰 구형·재판부 선고 모두 '무죄'... "죄 입증할 증거 없다"

[미디어제주 김은애 기자]

“가해자를 용서하지 않으면 어떻게 살 수 있겠습니까. 앞으로 살날이라도 마음 편하게 살랍니다. 기자님, 그렇게 써주세요.”

제주 4.3 당시 억울하게 아버지를 잃은 고학형(78, 남)씨가 상기된 얼굴로 재판장을 나서며, 기자에게 한 말이다.

그는 자신의 아버지를 '죄인'으로 만든 이들을 용서하겠노라 고백했다. 오늘(16일) 아버지가 '무죄' 선고를 받아 명예를 회복했으니, 더이상 여한이 없다면서.

 

2021년 3월 16일, 4.3행방불명인 수형인 등 335명 대상 재심 열려
검사 구형 모두 '무죄'... 재판부도 '전원 무죄' 선고

2021년 3월 16일, 오전 10시부터 오후 6시 21분경까지 진행된 제주4.3행불인 등 335명에 대한 재심 결과, 모두에게 '무죄'가 선고됐다.

2021년 3월 16일, 오전 10시부터 오후 6시 21분경까지. 대한민국 역사에 길이 남을 릴레이 재판이 진행됐다. 제주4.3 당시 국가 공권력에 의해 영문도 모른 채 죽임을 당하거나 죄인이 된 이들. 4.3행방불명인 331명과 생존수형인 2명 등 피고인 335명에 대한 재심이 일시에 진행된 것이다.

다만, 피고인 대부분이 이미 고인이 된 사건이기에. 재심청구인은 피고인의 유족이 됐고, 피고인 석은 변호인 외에 공석인 모습이었다. 유족의 최종 진술 기회도 있었다.

결론은 검사의 구형과 재판부 판결 모두 ‘무죄’.

제주지방법원 제2형사부(재판장 장찬수)는 “알다시피 형사재판에서 공소가 제기된 범죄의 구성요건을 이루는 사실은 검사에게 입증 책임이 있다”면서 “그런데 검사는 이 사건 공소사실을 입증하기 위해 제출한 증거가 없다”라는 점을 무죄의 근거로 삼았다. 범죄 사실을 입증할 증거가 없기 때문에, 형사소송법 제325조에 따라 피고인 모두에게 무죄를 선고한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재판부는 “오늘 이 판결의 선고로 피고인들과 그 유족들에게 덧씌워진 굴레가 벗겨지고, 나아가 이미 고인이 된 피고인들은 저승에서라도 이제 오른쪽 왼쪽을 따지지 않고 낭푼에 담은 지슬밥에 마농지 뿐인 밥상이라도 그리운 사람과 마음 편하게 둘러앉아 나누는 날이 되기를, 그리고 살아남은 우리들은 이러한 일이 두 번 다시 일어나지 않도록 다짐하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라고 덧붙였다.

 

각 사건 선고 후, 유족 측 진술 이어져
김인근 씨, "일가족 8명 한날한시에 잡혀가... 생사도 몰라"

눈물을 훔치는 유족들.

사실 이날 릴레이 재판에 앞서, 피고인들에 대한 '무죄' 선고는 이미 예상되는 측면이 컸다.

이전 제주4.3 생존수형인들에 대한 재심에서 재판부가 '무죄'를 선고해왔기에. 그 내용이 거의 동일하다 볼 수 있는 이번 재심에서도 '무죄'가 선고되지 않을까 예상된 것이다.

하지만 막상 유족 당사자는 재판 내내 초조한 모습이었다. 혹여 '유죄' 판결이 나서 가족의 명예를 되찾을 수 없게 되는 건 아닌지. 재판 내내 노심초사, 눈시울을 붉히는 어르신의 모습은 매 재판마다 동일한 풍경이었다.

눈물을 훔치는 유족 어르신.

특히 이날 재판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백발이 성성한 유족들의 최종 진술이다.

마지막 재판에서 진술한 김인근(87, 여)씨는 제주4.3으로 여덟 식구를 한날한시에 잃었다. 그가 13살 때 일이다.

“제가 13살 때. 온 가족 여덟 식구가 차에 실려 가고, 저만 혼자 도망쳐 살았습니다. 당시 차에는 4살짜리, 2살짜리 조카도 타고 있었습니다. 이 애들이 무슨 죄가 있어서 전부 잡혀 고문당하다가 (차에) 실려 간 걸까요. 저는 차에서 뛰어내려 혼자 살았습니다. 부모는 그때 다 돌아가셨는데, 저 혼자 사니까 (지금도) 죄인이 된 심정으로 살고 있습니다. 판사님, 부모 형제들 한을 조금이나마 다 풀어주십시오.” -유족 김인근 씨.

이날 연세가 지긋한 유족 어르신 중 일부는 ‘무죄’가 선고된 사실을 미처 알아채지 못하고, 재판부에 눈물어린 호소를 계속하곤 했다. 김인근 씨도 그랬다.

“그렇게 부모님과 일가친척들. 8명 식구가 다 돌아가시니까, 저는 15살쯤 되니까 도저히 살 수가 없었습니다. 부모, 형제가 무슨 죄로, 어떻게 돌아가셨는지도 모르고 살았습니다. 그래서 저도 아버지한테 가려고, 한두 번 바닷가에 간 적도 있습니다.” -유족 김인근 씨.

13살 나이에 기댈 곳 하나 없이 혼자가 된 김 씨. 너무 힘이 들 땐, 우두커니 바다를 바라보며 극단적인 선택을 고민하기도 했단다.

김 씨는 그래도 버텼다. 그렇게 살아오니 오늘이 됐다. 이유도 없이 씌워진 ‘빨갱이’라는 이름. 이제는 '빨갱이'의 굴레에서 벗어나 그의 가족 모두 ‘억울하게 학살당한 양민’으로 기록될 것이다.

재판이 다 끝난 뒤. 김 씨에게 잠시 인터뷰를 청하자, 그가 말했다. 

“우리 부모님은 열심히 농사지은 죄밖에 없습니다. 그 죄로 끌려갔습니다. 저는 연좌제 때문에 살기 너무 힘들었습니다. 선고가 어떻게 날지 모르겠지만, 우리 가족은 아무 죄가 없어요.” -유족 김인근 씨

그는 재판이 끝난 뒤에도, ‘무죄’ 선고 사실을 모르는 듯했다. 그런 그에게 지금의 가족들이 다가와 말한다. 그토록 바라던 가족의 명예가 회복되었다, “무죄”가 선고되었다고.

그제야 그는 활짝 웃는 얼굴로 법원 문을 나섰다.

 

변호인 측, "국가 공권력에 의한, 양민 학살 판례될 것"
"335명 전원 무죄, 가장 기본적인 인권 회복의 발로"

2021년 3월 16일 재심 재판이 진행 중인 모습.

이날 재판의 끝을 앞두고, 변호인 측이 잠시 감회를 고백하는 시간도 있었다.

문성윤 변호사는 “변호인이 4.3 사건을 처음 접한 계기는 초등학교 입학 무렵”이라고 회상했다.

그가 외할아버지댁으로 제사를 하러 갔던 날, 옆집과 뒷집 모두 제사를 지내는 기이한 풍경을 목격했다는 것이다.

“단순한 어린 마음에 제사는 촌에서 대강 다 같이 모여서 하는 것이 아닌가, 이런 막연한 생각을 가졌습니다. 어머니께 여쭤봐도 자세히 이야기해주시지 않아 변호사가 되어서야 알았죠. 같은 날 제사의 의미를요.” -문성윤 변호사

문 변호사는 이번 재심에서 ‘무죄’가 선고된 사실을 두고, “가장 기본적인 인권 회복의 발로”라고 표현했다.

끝으로 그는 이번 재판 결과가 “국가 공권력에 의한, 양민 학살에 대한 판례가 될 것으로 생각한다”면서 재판부에 발언 당시 앞둔 3건 재심에 모두 무죄를 선고해달라 요청했다. 재판부는 '무죄'를 선고했다.

한편, 제주지방법원은 이날 선고와 관련, “제주4.3사건특별법 개정안의 통과로 앞으로는 유족의 개별 재심청구보다는 검찰의 직권재심청구 등으로 남은 피고인들에 대한 재심 절차가 진행될 것”이라고 밝히고 있다. 이에 앞으로 있을 제주4.3 수형인에 대한 재심 절차는 보다 수월해질 것으로 예상된다.

 

제주4.3희생자유족회, "앞으로 해결할 과제 더 많아"
군사재판으로 죄인 낙인 수형인, 명부상으로만 2530명

2021년 3월 16일 제주4.3행불인 등 335명에 대한 재심 결과, 전원 무죄가 선고되자, 제주4.3희생자유족회 측이 만세를 외치며 환호하고 있다.

이날 재판이 끝난 직후, 제주지방법원 후문 앞에서 제주4.3희생자유족회(이하 ‘유족’)의 기자회견이 진행되기도 했다.

유족 측은 “오늘 현명하고 정의로운 판결을 내린 장찬수 판사, 재판부에 감사의 말씀을 전한다”면서 “오늘의 판결을 통해 불시에 행방불명된 부모형제의 빈자리로 인하여 정신적, 물질적 어려움과 함께 연좌제의 고통에서 살아오신 유족 여러분들이 그동안의 한을 다소나마 씻어 버릴 수 있기를 기대한다”라는 소감을 밝혔다.

그러면서 유족 측은 제주4.3 당시 진행된 두 차례 군사재판에 대해 “졸속적인 재판”이라 평하며, “4.3행방불명 수형인들이 근원적으로 국가공권력의 불법적인 폭압에 의한 억울한 희생을 당했음은 부인할 수 없는 명백한 사실”인 점을 강조하기도 했다.

이에 유족 측은 “군사재판을 통해 죄인의 낙인이 찍힌 희생자가 수형인 명부상으로 2530명”이라며, “그들 중 일부가 오늘에서야 명예회복의 기틀을 마련했지만, 아직도 억울한 희생자가 더 많다”라는 사실을 알렸다. 앞으로 해결해나가야 할 과제가 더 많다는 점을 상기시키는 발언이다.

끝으로 유족 측은 “제주4.3희생자유족회에서는 앞으로 군사재판과 일반재판 희생자의 명예회복을 위해 추가 소송을 준비하고, 적극적으로 대응하여 단 한 명의 희생자도 소외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할 것”이라며, 국가에 책임감 있는 자세로 성실하게 화답할 것을 정중하게 당부한다 일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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ㅇㅇㅇ 2021-03-18 20:29:14
좋은 기사입니다. 잘 읽고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