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을 북한으로 보내야 했던 제주사람들의 조국은?”
“가족을 북한으로 보내야 했던 제주사람들의 조국은?”
  • 김형훈 기자
  • 승인 2021.01.06 16: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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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형훈의 책가방] <16> 양영희의 ‘가족의 나라’

2012 베를린영화제 국제예술영화관연맹상 수상

1959년 시작된 귀국사업으로 오빠 셋 북한행

서로 다르게 생활하는 세 오빠 운명을 그려내

[미디어제주 김형훈 기자] 돌아가신 양의헌 할머니. 살아계신다면 백세를 넘고도 남는다. 할머니를 만난 건 2005년이다. 그때가 우리 나이로 아흔이었다. 15년이 지났으니, 105세. 신축년 새해를 더하면 올해 106세가 된다. 백세를 넘게 사는 이들이 있을테지만, 할머니는 아마 더 좋은 세상에서 나를 내려보고 있을지도 모른다.

양의헌 할머니는 다큐멘터리 <해녀 양씨>로 세상에 알려졌다. <해녀 양씨>는 일본 영화감독 하라무라 마사키에 의해 2004년 세상에 나왔다. 다큐 속엔 열차를 타고 다니면서 물질을 하던 양의헌 할머니, 잠수기기를 갖추고 모구리 잠수를 하며 산소가 다해 힘들어하는 모습이 생생하게 찍혀 있다. 우리에게 양의헌 할머니는 강한 제주 해녀의 모습, 억센 바다를 마다하지 않는 제주 여성의 이미지만 부각된다. 실제 그렇긴 했다. 할머니는 “햑키로 오바상”으로 불렸다. 한번 물질을 하면 100kg을 가득 담았기에 붙여진 별명이다. 그러나 그에겐 가슴속 맺힌 한이 더 있다. 나는 그걸 보았다.

기자로서 마주했던 양의헌 할머니. 그를 직접 만나서 취재를 한 이들은 과연 몇일까. 양의헌 할머니를 취재했던 이유는 있다. 제주를 벗어나서 일하는 물질을 ‘바깥물질’이라고 부른다. 바깥물질 취재를 위해, 그것도 남의 나라인 일본에 가서 물질을 해야 했던 해녀 취재를 위해서였다. 내 기억 속 양의헌 할머니는 무릎이 아파 제대로 걷지 못하였으나, 자전거는 잘 탔다. 할머니는 <해녀 양씨>로 익히 알려졌음에도 취재 상대로 삼기는 너무 어려웠다. 할머니의 국적이 ‘조선’이라는 경계 때문이었다. 할머니를 취재하려고 여기저기를 헤집었다. “마쓰다씨의 소개로 취재를 하게 됐다”고 해서야 겨우 만날 수 있었다. 할머니가 안내를 해준 곳은 오사카 이쿠노구 모모다니에 있는 자신의 집이었다. 할머니 집에서 이야기를 나누던 기억이 또렷하다. 군사정부 시절이었다면 양의헌 할머니와의 만남이 가능했을까? 다행히도 2005년은 노무현 정부 시절이다.

할머니는 경계인이다. 남북의 틈바구니에서 살았다. 제주 출신이지만 대한민국 국적을 가지지 못했다. 남편은 조총련계 학교 설립에 노력한 인물이었고, 대한민국으로 넘어올 수 없는 경계선을 지니고 있었던 셈이다. 조총련이라는 굴레 때문이었을까. 아들은 북으로 보내졌다. 아들을 북으로 보낸 양의헌 할머니는 스무 번 넘게 북한에 있는 아들을 만나러 가곤 했다. 고향이 아닌 북한은 자주 오갔지만 정작 고향 제주엔 2002년에 올 수 있었다.

양의헌 할머니 이야기는 우리의 흔한 풍경이다. 제주도 사람이라면 그 흔한 풍경과 수많은 인연을 맺고 산다. 다큐멘터리 <가족의 나라> 감독인 양영희씨도 그런 인물이다. <가족의 나라>는 다큐멘터리 제목이며, 책 제목이다. 다큐멘터리 <가족의 나라>는 2012 베를린영화제 국제예술영화관연맹상을 받기도 했다.

나는 드라마틱한 인생들에 둘러싸여 자랐다. 나의 부모와 오빠들뿐 아니라, 오사카 이쿠노 구에서 어린 시절부터 만나온 재일조선인들, 북한에서 만난 사람들, 취재 때 만난 아시아 각국의 사람들, 서구에서 만난 사람들. 모두 내가 압도될 정도의 개인사를 갖고 살아왔다.”
(<가족의 나라> 중에서)

양영희 감독은 <가족의 나라> 후기를 통해 세상 모든 사람들은 누구나 개인사를 가지고 있음을 강조한다. 그럼에도 그는 자신의 삶과 자신을 둘러싼 이야기를 책과 다큐멘터리로 만든 걸 보면 재일동포로 불리는 이들의 삶이 얼마나 드라마틱한 지를 알만 하다.

양영희 감독은 건오, 건아, ‘겐짱’으로 불리는 건민 등 세 오빠를 뒀다. 제주 출신인 아버지는 오사카의 조총련 간부였다. 친적 집에 양자로 보내진 아버지는 동네 통조림공장에서 일을 하다가 제주를 뒤로하고 오사카로 왔다. 당시엔 제주와 오사카는 무척 가까운 관계였다. 기미가요마루(君が代丸)는 수많은 제주사람들을 일본으로 옮겨다 놓았다. 제주사람들 입에선 ‘기미가요마루’보다는 ‘군대환’이 더 익숙했다. 양영희 감독 아버지는 그렇게 군대환을 타고 1942년 일본으로 들어온다. 양영희 감독이 ‘드라마틱한’이라고 붙인 인생의 이야기는 그렇게 시작된다.

일제강점기 당시 제주사람들은 '기미가요마루', 일명 '군대환'으로 불리던 배를 타고 일본으로 가곤 했다. 사진은 제주사람들의 1929년 '목포신보'에 실린 관련 내용. 제주학아카이브
일제강점기 당시 제주사람들은 '기미가요마루', 일명 '군대환'으로 불리던 배를 타고 일본으로 가곤 했다. 사진은 제주사람들의 1929년 '목포신보'에 실린 관련 내용. ⓒ제주학아카이브

큰 오빠와 나이 차이는 열둘. 둘째 오빠와는 열 살. 막내 ‘겐짱’ 오빠랑은 여덟 살 차이였다. 막내 영희는 아버지의 귀여움을 독차지했다. 아버지는 세 명의 아들에겐 너무도 엄했으나, 영희에겐 가부장적 위엄은 눈 녹듯 사라졌다.

조총련. 그들을 북한과 동일시할 수는 없다. 시대가 만들어낸 산물이다. 한국전쟁 이후 어지러운 상황에서 조총련이 힘을 더 받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 만들어졌을 뿐이다. 우리나라가 일본과 국교를 정상화하기 이전에 일본은 북한과의 교류를 튼다. 그건 ‘귀국사업’이다. 1959년 최초의 귀국선이 니가타항을 출발한다. 만경봉호에 재일동포들이 몸을 실었다. 첫해에 북한으로 옮겨간 이들은 2717명이다. 귀국사업은 1984년까지 계속되었고, 25년에 걸쳐 9만3340명의 재일동포가 북한 땅에 정착했다. 귀국사업은 말 그대로 ‘귀국(歸國)’이어야 하는데, 고향으로 돌아가는 귀국은 아니다. 재일동포의 절대 다수인 90% 이상은 제주도를 비롯한 남한 출신이다. 그들에게 고향은 남한이지만, 고향과 아무런 상관관계도 없는 땅에 흔적을 둬야 했다. 그게 ‘귀국사업’이다.

‘귀국’이어야 하지만 ‘귀국’이 되지 못한 이유는 많다. 해방이 되자마자 남북은 분단이 되었고, 제주4·3과 한국전쟁이 연이어 터졌다. 고향으로 가야 할 이들의 상당수는 일본에 머물러야 하는 신세였다. 고향으로 돌아가는 이들이 지니고 갈 수 있는 지참금은 당시 돈으로 1000엔에 불과했다. 일본에 살면서 재산을 불린 이들을 떠날 수 없게 만들었다. 돌아간 이들은 징용 등으로 일본에 끌려올 수밖에 없는 사정을 가진 이들이었다. 양영희 감독 가족도 돌아가지 못할 신세였다. 그때 등장한 환상은 북한이었다. 대표적 우익신문인 <산케이신문>도 북한을 지상낙원으로 보도할 정도였다.

자신들의 고향인 반도에 새로운 지상낙원이 탄생할 것을. 귀국한다는 것은 그 낙원건설의 주역이 되는 것임을. 미국 괴뢰정권인 군사정권 아래 한국보다도 주석님의 자비가 넘치는 사회주의국가 북한이 더 행복하다는 것을(실제로 주석은 재일동포 자제가 귀국하면 취학과 의식주를 위한 일체 비용을 부담하겠다고 약속했다). 장래에 반도는 북에 의해 평화통일이 될 것이다. 그 선봉에 서고 싶다. 일본의 미디어도, <산케이신문>조차도 북을 지상낙원이라고 보도했다. 모두가 그런 환상에 동조했다.”
(<
가족의 나라> 중에서)

영희의 둘째, 셋째 오빠는 1971년 만경봉호에 올랐고, 큰 오빠는 이듬해 북한을 밟았다. 두 아들을 보냈는데, 큰 오빠까지 북으로 갈 줄은 몰랐다. 큰 오빠는 1972년 4월 15일 김일성 주석의 탄생 60주년 기념일에 맞춘 ‘인간 선물’이었다. 생일 선물이 인간이라니. 당시 조총련 부의장이던 김병식은 자신에게 순종하지 않던 간부들의 자녀를 표적으로 삼았다. 양영희 아버지가 표적이었고, 그 표적에 맞은 건 큰 오빠인 양건오였다. 영희는 마지막으로 남은 오빠마저 만경봉호로 보내야 했다.

나는 그때의 바다 색깔을 잊은 적이 없다. 그것은 한없이 짙은 쪽빛이었다. 그날 이후 파란색을 볼 때면 슬픈 기억을 떠올리고 마는지도 모르겠다. 지금도 파란색을 평상심을 갖고 바라볼 수 없다. 처음 방문한 어떤 집에서 커튼이나 소파 커버가 파란색이면 그 사실만으로 울음이 터질 것 같았다. 지금 내 방에는 아무리 작은 물건이라도 파란색은 일절 놓여 있지 않다.”
(<
가족의 나라> 중에서)

사람들의 사는 방식은 서로 다르다. 비관하며 사는 사람도 있고, 망각하며 살기도 한다. 그게 도를 넘으면 체념이 된다. 세 오빠가 북한으로 간 이유는 너무나 가부장적인 분위기가 한몫을 했는지도 모른다. 아무도 아버지의 말을 거역해보질 못했다. 세 오빠는 반항한 번 해보지 못하고, 절대 반항할 수도 없고 반항해서도 안되는 북한이라는 땅에 갇히게 되어버렸다.

사람의 삶이 다르듯, 세 오빠의 북한 삶도 달랐다. <가족의 나라>는 북한에서 오빠를 만나는 영희를 통해 세 오빠의 삶을 투시한다.

음악을 좋아했던 큰 오빠 건오는 항우울증을 앓다가 어느날 급사한다. 김일성 주석의 ‘인간 선물’이던 큰 오빠는 사회주의국가 건설의 최전방에 서야했으나 그러지 못했다. 클래식 음악을 듣는다는 이유로 책망당하고, 감시를 받아야 했고, 자아비판을 받았다. 몇 년후 클래식 음악 금지는 해금되었다지만 건오 오빠는 무너진지 오래였고, 그를 지탱해줄 건 없었다.

두 번째 오빠 건아. 일본에서도 인기가 많았고, 북한에서도 여전했다. 건아 오빠는 건오와 달리 행복을 찾는다. 모든 슬픔과 아픔을 던지고, 없던 것처럼 산다. 양영희 감독은 그런 건아 오빠를 향해 “행복을 찾는 선수”라고 표현한다. 아파트에서 물이 어제보다 잘 나온다며 기뻐하고, 오늘도 세끼 먹을 수 있었다며 환희한다. 작은 일이 ‘행복’이 되고, 그것으로 웃으면서 지낼 수 있다. 출세욕도 없다. 좀 더 좋은 집에서 살고 싶다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무언가를 더 바라지도 않는다. 5년 후, 10년 후의 일은 생각하지 않는다. 이유가 있다. 북한에서 그런 걸 생각하기 시작하면 미치거나 혹은 절망하기 때문이다. 모든 생각을 멈추는 방식, 즉 ‘사고 정지’가 둘째 오빠의 생활방식이다.

‘겐짱’은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다. 어쩌면 철저한 북한식 사고일지도 모르겠다. 어떤 생각을 하는지도 제대로 읽기 힘들다. 대학생 때 북으로 간 큰 오빠는 적응을 하지 못했고, 둘째 건아는 ‘작은 행복’만 찾는다. 열네 살, 중학교 3학년의 나이에 귀환자가 되어버린 겐짱은 살아님기 위한 방법을 찾았다. 그건 ‘적응’이다. 북한에서 적응은 충성 서약을 하는 인물이 되어야 하고, 철저하게 자신의 모습을 가리는 ‘포커페이스’여야 한다. ‘적응’이란, 불평불만을 하지 않는 삶이다. 그러지 않으면 자신을 지키지 못한다.

20세기는 참으로 복잡했다. 그 시대를 산 이들의 삶은 ‘기구하다’는 단어로 축약된다. ‘기구(崎嶇)’는 험하고 평탄하지 못하다는 뜻이다. 20세기는 그랬다. 양영희 감독의 표현처럼 ‘드라마틱’은 ‘기구’의 또다른 영어식 표현에 다름 아니다.

1942년 군대환에 올랐던 아버지. 1971년과 1972년 만경봉호에 올랐던 세 아들. 제주에서 일본으로, 일본에서 북한으로. 제주출신 아버지는 1942년 이후 고향 땅을 밟지 못했다. 뇌경색으로 쓰러지고 5년 후인 2009년 생을 마감했다. 제주에 있어야 할 그의 무덤은 북한 평양에 있다. 급사한 큰 오빠의 무덤도 평양에 있다. 책은 조국과 민족과 고향을 되뇌게 한다. ‘가족의 나라’는 대체 어디에 있을까. 남쪽인가, 북쪽인가, 혹은 일본인가. 그건 선택의 문제이다. 오빠를 북으로 보내야 했던 양영희 감독에겐 그러지 않겠지만. 다큐멘터리를 만들고 책을 쓸때만 하더라도 양영희 감독은 북한으로 가는 발이 묶였다. 2009년 감독 데뷔작으로 발표한 <디어 평양> 때문에 북한 입국 금지를 받았다. 지금은 어떤지 알 수 없다. 그가 가족 이야기를 쓸 수밖에 없던 이유만을 알 수 있다. 현실을 그대로 알리고 싶어서였다.

사람은 누구나 짐을 짊어지고 산다. 누구의 짐이 가장 무거운지 비교하는 것은 무의미하지만, 그 내용을 아는 것은 중요한 일이다. 왜냐하면 한 사람 한 사람이 짊어진 짐 속을 들여다봄으로써 그 인생뿐 아니라 그와 그녀가 살아온 사회와 시대가 보이고, 그 속에서 살아가는 개인의 현실이 선명히 부각되기 때문이다. 가방 깊숙이 감추어둔, 버리고 싶은 쓰레기도 눈을 크게 뜨고 바라보고 싶다. 냄새가 나거나 귀찮기도 하겠지만, 그 현실을 똑똑히 보고 싶다.”
(<
가족의 나라>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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