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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에 의한 건축이 아닌 가슴으로의 건축을 하자”
“머리에 의한 건축이 아닌 가슴으로의 건축을 하자”
  • 김형훈 기자
  • 승인 2020.11.05 22:0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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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제주건축가다] <9> 건축가 홍광택

 

기획 나는 제주건축가다는 제주에서 활동하는 젊은 건축가를 만나, 건축에 대한 이야기와 제주라는 땅에 대한 이야기를 전하고 있다. 기획은 모두 3개로 나눠진다. 건축가가 꼽은 땅에 대한 이야기, 건축가와 나누는 대담, 자신을 이끌어 준 건축 관련 책을 담는다. 대담은 문답식으로 싣는다.

이번에 소개할 건축가는 홍건축의 홍광택 대표이다. 제주에서 줄곧 건축을 하고 있다. 사무소를 연지 10년이며, 활동도 활발하다. 그는 자신의 고향인 애월읍 하귀리 가문동을 애착하는 땅으로 꼽았다. 소개한 책은 <삶의 건축과 패러다임 건축>이다.

 

# 가문동 – 해안도로 개발 이전의 모습을 아시나요

변한다. 모든 것은 변한다. 모든 것은 변하게 마련이다. 있는 그대로, 그걸 한자로 푼다면 ‘자연(自然)’일텐데 자연 그대로 존재하는 건 세상 어디에도 없다. 늘 변하게 마련이며, 변하지 않게 보이는 것들 역시 변하는 과정에 있다.

제주도. 그 가치를 모르는 이들은 없다. 있는 그대로이면 좋으련만, 변하는 세상의 흐름을 거스르지 못한다. 변화는 막을 수 없기에, 어떻게 변하는 게 더 좋은지를 고민해야 하는 시점이다. 마구잡이 개발일까, 아니면 기존에 있는 것을 존중하는 개발이어야 할까. 당연히 답은 후자이다. 제주도 사람들은 전자를 택한 이들과 늘 싸움을 하며 지금의 제주를 지켜왔다.

해안가 마을. 제주다운 상징 중 하나이다. 제주는 사면이 바다이며, 거센 바람을 맞는 첫 관문이 바로 바닷가에 있는 마을이다. 한라산을 중심으로 했을 때, 남쪽보다는 북쪽에 있는 사람들이 그 바람의 기운을 잘 이해한다. 겨울철 모진 북서계절풍을 맞아본 사람은 그 바람의 기운을 이해한다. 제주도의 풍토를 잘 이해하려면, 특히나 한라산 북쪽에 사는 ’산북‘의 풍토를 알고 싶으면 겨울철을 지내봐야 한다. 마냥 여름철 바다가 좋아서 땅을 사고, 집을 지으면 패착이다.

애월읍 하귀리 가문동 포구. 미디어제주
애월읍 하귀리 가문동 포구. ⓒ미디어제주

제주시 애월읍 하귀리 가문동. 건축가 홍광택의 고향이다. 가문동은 오랜 역사를 지닌 땅이다. 몽골군이 터를 잡고 말을 훈련시켰다는 넓은 땅도 있다. 그렇다면 몽골군이 들어오기 이전엔 삼별초의 항전도 있지 않았을까. 어쨌거나 이 땅은 움푹 꺼져 있고, 서쪽의 언덕이 보호막을 형성한다. 때문에 거센 북서풍도 제주도 북쪽의 다른 땅보다는 덜하다.

가문동은 그야말로 포근한 느낌을 주는 땅이지만 개발이라는 파고는 쉽게 넘질 못한다. 제주도를 한바퀴 도는 일주도로를 따라 서쪽으로 향하다 보면 동지역을 지나 애월읍을 만난다. 애월읍을 알리는 지역은 하귀리이며, 가문동은 애월 해안도로의 시작점이기도 하다.

해안도로는 풍광을 안겨주지만, 있는 것의 파괴라는 행위도 뒤따랐다. 가문동에서 시작되는 애월 해안도로가 만들어진 1990년대 풍광과 지금의 풍광은 전혀 다르다. 처음 개설될 때 애월 해안도로는 자연에 빠지는 멋을 줬다면, 지금의 해안도로는 카페 거리를 연상시킨다. 1990년대를 기억하는 이들에겐 지금의 해안도로는 낯설다. 제주시 동지역 해안도로나 애월 해안도로다 다를 건 없다. 지역 이름만 다를 뿐이며, 건물과 건물이 이어진 해안도로의 풍광은 매 한가지이다.

어떻게 변해야 할까. 개발은 되어야 하지만, 우린 개발 이후를 모른다. 그러기에 개발 이후를 생각하며 개발을 진행해야 한다. <오래된 미래>의 저자인 헬레나 노르베리 호지가 책에서 한 말을 옮겨본다.

“개발이 진행되는 동안에는 사람들이 현재 그들에게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개괄적으로 파악하지 않거나 파악할 수 없다는 것이다. 현대화라는 것은 겉으로 볼 때 문화에 대한 위협으로 느껴지지 않는다. 개발이 불러오는 파괴적 영향이란 시간이 흐른 뒤 그간의 과정을 돌이켜 보아야만 명확하게 알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시간이 흘렀다. 애월 해안도로가 만들어진지 20년이 넘는 시간이 흘렀다. 그 시간동안 얼마나 많은 게 변했나. 예쁘게 변했다고는 말할 수 없다. 다만 1990년대를 기억하고 있는 그 사람들에겐.

 

[인터뷰] 홍건축의 홍광택 대표

 

건축가가 꼽은 땅 이야기도 담는데, 땅 이야기부터 먼저 해보자.

해안과 중산간은 매우 중요한 요소이다. 제주시 애월읍 하귀리 출신이라 그 이야기를 해보겠다. 애월해안도로를 진입하는 가문동이 고향이다. 많이 망가져서 마음은 아프다. 멀리 도두동이 보이고 해안도로보다 낮고, 또한 높은 지형도 있다. 수산유원지를 포함하면 폭은 더 넓다. 어릴 때의 추억과 과거 모습이 생각난다. 공공건축가로서 서부 지역을 맡아 공간을 만지고 싶다.

 

어떻게 건축가의 길을 걷게 됐나.

적성에 맞는 직업이다. 할아버지가 목수였다. 고교 때 집을 짓는데 삼촌이 시공을 했다. 그때 도면이랑 청사진도 들여다봤다. 기초가 올라가는 모습을 보면서 건축이 재밌는 분야임을 느꼈다.

 

활동량도 많고, 일도 많은데 비결이라도 있나.

내년 1월이면 만 10년이다. 10년을 돌아보는 시간을 가질까 한다. 졸업 후 IMF를 맞았다. 대학 4학년 때 시공경험을 채워야 할 것 같아서 1학기가 끝날 때 현장 기사처럼 연립주택 공사 현장을 오갔다. 거기서 실제 도면과 현장을 배웠다. 일용직으로 일하는 것과 건설사 소속 현장 기사처럼 들어가서 일을 하는 것은 차이가 난다.

 

건축사사무소가 아니라 왜 시공 현장이었나.

설계사무소에 가게 되면 시공사를 가지 못할 수도 있다는 생각을 했다. 학교에서 배운 게 실생활에 어떻게 적용되는지 보고 싶었다.

 

개인적으로 영향을 많이 준 건축가는 누구인가.

담건축의 김상언 소장이다. 도면을 예쁘게 그리는 분이다. 내가 생각한 설계사무소였다. 도면에 표현하는 걸 업그레이드 할 수 있었다. 중간에 육지에서도 올라오라는 유혹도 있었지만 가질 않았다. 김상언 소장은 성품도 워낙 뛰어나다.

사무소 4년차에 사무실을 합치게 되었다. 세 사무소가 하나로 합쳐졌다. 그러다 보니 영향을 끼친 건축가는 더 많아졌다.

우리 세대는 로컬에서 큰 건축가들이다. 우린 육지에서 유학해서 제주도로 유턴한 건축가들의 모습을 보고, 그들이 지역에 대한 고민을 하던 걸 배웠다.

 

삶이 담긴 건축을 추구하려 한다는 홍광택 대표. 그에겐 창고건물을 의뢰하며 하얀봉투에 얼마되지 않은 돈을 넣은 할머니의 모습이 늘 가슴을 파고든다고 했다. 조진희
삶이 담긴 건축을 추구하려 한다는 홍광택 대표. 그에겐 창고건물을 의뢰하며 하얀봉투에 얼마되지 않은 돈을 넣은 할머니의 모습이 늘 가슴을 파고든다고 했다. ⓒ조진희

추천한 책은 현재 부산대에 있는 이동언 교수의 <삶의 건축과 패러다임 건축>을 선정했다. 이동건 교수가 폐간된 <이상건축>에 썼던 비평을 모은 글인데, 비평이라서인지 술술 넘어가질 않는다.

이 책을 접한 건 현장실무를 하던 20007월이다. 당시 책을 많이 읽었는데, 제목이 마음에 들었다. 내용은 어찌 보면 주관적일 수 있는데, 사회에 어떤 변화를 일으켜야 한다는 생각을 담고 있다. 건축을 할 때 패러다임보다는 삶에 대한 부분 강조하는데, 그래서 건축을 한다. 맥락주의보다는 삶에 대한, 인간과 관련된, 공간과 관련된 것이기에 중요하다고 말하고 있다.

맥락주의를 비판하고, 머리에 의한 건축이 아니라 가슴으로의 건축을 하라고 하는데, 마음에 드는 문구가 있다.

(49쪽을 펼치며) 이 문구가 너무 마음에 든다. “고대로부터 현재까지 서구 건축이나 건축이론은 머리에 의한 건축(패러다임의 건축)에 의해 지배되어 왔으며, 가슴으로의 건축(삶의 건축)은 백안시되어 왔다는 점이다.”

먹고 살고 경제적 부분도 중요하지만 따뜻한 건축을 해야 한다. 건축가가 가슴으로 느끼지 못하고 머리로만 하게 된다면 건축주들은 어떨까. 클라이언트를 배제한 상태에서 제주에만 너무 어울리는 디자인, 건축가가 추구하는 패러다임에 대한 디자인만 고수하면 막상 그 집에 들어가서 살 건축주는 어떻게 생각할까. 결국은 클라이언트가 동의를 해줘야 한다.

 

건축주의 생각을 구현하는 게 삶의 건축인가.

농산물 창고를 짓겠다고 찾아온 할머니가 있다. 블록구조로 2000만원으로 짓겠다고 했다. 또다른 건축주가 있는데 20억원으로 200평짜리 단독주택을 짓겠다고 해서 맡긴 사람이 있다. 두 사례는 비용을 지불하는 방식도 다르다. 200평 단독주택을 짓겠다는 사람은 돈다발을 들고 오고, 할머니는 설계의뢰를 한다면서 들어올 때부터 미안해 했다. 창고가 준공될 날까지 돈 얘기는 꺼내지 않았다. 할머니는 하얀 봉투에 든 돈을 내놓지 못하고 얼마 안된다고 말했다. 할머니의 돈은 어떤 설계비에 못지않게 큰 돈이다. 건축의 보람은 거기서 느끼고 싶다. 할머니 얘기를 하니 울컥해진다.

 

제주에 등장하는 건축물을 보면 육지랑 다를 게 없다.

내부공간이나 외관을 두고, 패러다임을 얘기하는 건축물이 너무 많다. 너무 많이 생겼다. 그걸 한동안 잘한다 잘한다 했다. 그래서 서울, 판교, 분당에 있는 집이 제주에 생기게 됐다. 제주도가 가진 좋은 풍경이 있어 좋은 건축인지, 다른 지역에 옮겨도 좋은 건축인지 평가를 해봐야 한다. 제주의 풍경이 백그라운드가 있어서 그 건축물에 상을 준다고 그러면 이건 곰곰이 생각해봐야 한다.

 

지역성 얘기를 해보자. 제주에 맞는 건축이라든지, 제주에 맞는 건축활동은 뭘까. 어떤 게 지역성일까.

건물이 자리매김했을 때 해당 지역에 영향을 준다. 그래서 배치계획과 대지계획이 중요하다. 지형을 거스르지 않고, 적어도 비도시지역은 제주의 지형과 제주의 경관에 어울려야 제주에 맞는 건축이 아닐까.

 

연동과 화북 바닷가를 비교한다면 두 지역은 다르다. 지역성은 주변과 잘 어울리는 게 맞다.

안도 다다오에 대해선 지금은 과감하게 얘기를 할 수 있다. 섭지코지의 글라스하우스나 마리오보타의 건축물은 제주도에 있어서는 안되는 건물이었다.

 

섭지코지에 있는 안도의 두 건축물은 다르다. 개인적으로도 글라스하우스를 보면서 대체 안도는 어떤 생각으로 그걸 설계했는지 의문이다. 안도의 욕심으로 섭지코지에 성산일출봉을 세웠다고 느낀다.

건축물이 자리매김해서 앉게 되면 그 지역과 어울리는 풍광을 형성해야 한다.

 

공공건축물은 심의를 다 거쳐서 만든다. 그러나 건축가의 의도와는 달라지곤 한다. 소암기념관도 물이 찰랑찰랑했는데, 이젠 물도 사라졌다. 공공건축물은 건축가 의도를 잘 구현해야 할까, 바뀌어야 할까.

행정과 도민은 밀접한 관계에 있다. 행정은 세금으로 건축물을 짓고, 그 건물을 도민들이 쓴다. 건축물을 쓸 도민들의 불만이 없어야 한다. 이때 건축가의 역량이 중요하다. 변화가 될 수 있는 건축물을 생각해야 한다. 정해진 예산이 있으면 최대한 그에 맞춰 역량을 발휘해야 한다.

사후관리도 그렇다. 삶이 녹아들면 건축물도 변형되고, 어떻게 숨을 쉴지 감안해서 예측가능한 디자인을 해야 한다. 도민이나 시민 등 불특정 다수가 들어와서 공간을 쓰는데, 안좋은 기억을 미쳤다면 개선해야 하고, 변화가 필요한 건축물이 된다. 공용건축물은 숨을 쉬어야 한다. 주택처럼.

 

미래를 반영할 공용 건축물이 필요하다는 이야기로 정리할 수 있겠다. 지금까지 작품 가운데 공들인 게 있다면.

공용 건물로 남원읍사무소가 있다. 건축에 대한 보람을 느끼게 해준 건 앞서 얘기한 할머니의 창고 건물이다. 봉투 얘기만 하면 짠 해진다.

 

- 바로 그게 삶의 건축아닌가.

(책을 펴며). 8쪽에 바람직한 건축을 하기 위해서 우리는 먼저 복잡다단한 삶을 직관적으로, 가슴으로 체험하여 이를 건축적 아이디어로 전환시켜야 한다고 나온다.

건축가들은 직접 체험뿐 아니라 다양한 경험을 쌓아야 한다. 어떤 프로젝트를 수행하면서 배치에 중점을 뒀는지, 내부 공간 어디를 중요하게 여기는지, 그런 부분에 대해 나름 타당성을 가지고 건축을 하려 한다.

 

책을 보면 삶의 복합성을 만질 수 있는 건축적 사유가 선행되지 않은채 단순히 경험논리만으로 무장한 건축은 불가능한 시대가 다가올지 모른다.”는 문구가 있다. 앞으로의 건축 흐름이 그렇게 될 수도 있지 않을까.

지금 벌써 그런 논문도 나오고 있다. 코로나19 시대가 되면서 외부가 내부가 되는, 주거생활에 변화가 생길 수밖에 없다. 삶의 패러다임이 변하면 주거 평면도 변화될 수밖에 없다. 단독주택을 설계할 때 사적영역, 공적영역, 세미 프리이빗, 세미 퍼블릭, 침실·거실·욕실, 이렇게 구분하던 것들이 초연결 시대가 되면 외부랑 스마트 화상회의를 하면서 내 거실이 화면에 찍혀서 전송되기 때문에 퍼블릭한 공간이 되어버린다.

 

건축가의 역할을 정리해 본다면.

제주가 가진 것에 대한, 지속가능한 건축을 이야기하곤 한다. 그걸 얘기하는 그룹이 있고, 얘기를 하지 않는 그룹도 있다. 그런 얘기를 하지 않았다고 해서 건축을 못하는 건 아니다. 여러 종류의 리그가 있는데, 좀 더 이런 얘기를 하면서 지역성을 파고 들며 건축적 이야기를 하는 그룹이 있고, 창고와 같은 불법건축 양성화, 이런 걸 해결하는 것도 건축의 모습이다. 법적인 제도를 해소하는 것도 건축가의 능력이다. 외관형태 풍경을 형성해 나가는 것도 건축가의 역할이다. 결국은 자기가 생각하는 건축을 하고, 색깔을 내게 된다.

 

제주도라는 곳의 땅의 가치를 얘기해보자.

제주에 살고 있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부터 해야겠다. 요즘 제주인이 있을테고, 탐라인도 있다. 오래전부터 살고 있는 제주인, 주민등록상 거주지를 갖는 제주도민도 있다. 그렇다면 누가 제주도를 판단하고, 누가 변화를 일으키고, 제주의 가치를 누가 판단할 것인가.

제주는 대한민국이 가진 부속 섬이다. 특별자치도로서 대한민국 국민이 동의를 해줘야 하는지, 좁혀서 제주특별도민이면 되는 것인가. 제주도는 조선시대에 200년간 출국금지령을 당했다. 그런 아픔을 겪은 조상을 가지고 있는 제주도민들이 판단할 것인가. 그 점에서 차이가 있지 않을까.

 

제주인보다 개인적으로는 범위가 넓어야 하지 않을까.

제주의 가치를 얘기할 때는 미래지향적이어야 한다. 제주도라고 하면 한라산이다. 한라산을 우리는 중산간, 산간, 해안가, 이렇게 부르고 있다. 해안가에 사는 사람, 중산간에 사는 사람들의 삶은 다양하다. 이처럼 다양한 가치가 있는데 우리는 수평선 위로 도출된 한라산의 모습만 본다. 땅속으로 들어가면 땅속의 가치가 있고, 지하수도 있다. 어떤 건 보존을 해야 하고, 어떤 건 보전을 해야 할지 판단을 해야 한다. 점점 제주인의 성격은 약해질 것이다. 지켜야 할 것은 지키는 게 맞는데 아직은 이 부분에 대한 역량이 모자라다.

 

자연을 활용할 수 있는가의 문제이다. 애들이 놀면서 나무를 타기도 하고 그 나무가 부러지곤 한다. 놀기 위한 행위인데, 나무에겐 그래서는 안된다는 이들이 있다. 그게 맞나? 자연은 망가뜨리는 게 아니라, 자연을 잘 활용하는 게 건강한 사람이 되고, 미래가치를 지킬 줄 안다. 제주 자연도 활용하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

누가 그러더라. 건축가가 어떻게 환경을 얘기할 수 있느냐고. 건축가는 결국은 개발을 하는 사람이다. 훼손을 할 수밖에 없는 직업이다. 그래서 건축물이 자리매김했을 때의 배치가 중요하다. 시간이 어느정도 흘렀을 때 자연치유적 현상이 일어나서 그 건축물이 자연경관을 이뤄낼 수 있는 건축물이 되느냐에 달려 있다.

 

<삶의 건축과 패러다임 건축>, 이동언 지음

 

책은 더 이상 나오지 않는다. 절판됐다. 저자 이동언은 현재 부산대 건축학과 교수로 재직중이다. 책은 이동언 교수가 동명정보대 건축학과 교수로 있으면서 <월간 이상건축>에 연재한 글을 묶어서 내놓았다.

건축 비평은 쉽지 않다. 쓰는 일도 어렵거니와, 글을 읽는 이들 역시 어려운 분야가 건축 비평이다. 이동언 교수는 당시 40대의 패기를 무기로 건축에 대한 이야기를 과감하게 풀어갔다. 르 꼬르뷔지에도 비판 대상이 되고, 승효상도 비판 대상에 올랐다. 다만 루이스 칸의 건축은 아낌없는 찬사를 보낸다. 왜 그럴까. 답은 ‘인간’과 ‘삶’에 있다.

모더니즘. 참 듣기 좋은 말이다. 뭔가 달라 보이고, 멋있게 들린다. 하지만 모더니즘은 ‘삶의 회복’을 하지 못하고 ‘기계적 기능주의’로 오역되고 말았다. 때문에 건축가들은 기술화, 경제화, 산업화를 모더니즘으로 해석하는 오류를 범했다. 건축은 인간이 우선인데, 모더니즘에서 삶을 제대로 드러내지 못한 게 문제였다. 이처럼 개념적 성격의 패러다임 건축을 하지 말아야 한다고 저자는 강조한다.

저자는 패러다임 건축은 머리로만 하는 건축이며, 이를 벗어나서 사물의 본질을 찾자고 한다. 그것이 바로 맥락주의로 통한다. 더 나아가서는 ‘머리’로 하는 패러다임 건축을 벗어던지고, ‘가슴’으로 말하는 삶의 건축을 지향할 것을 주문한다.

“건축의 어휘어휘마다 삶의 질이 배어 있을 때 우리는 이러한 건축을 삶의 건축이라고 부르며, 삶의 질은 보지 못한 채 피상적인 현상을 관찰하여 사물의 국면들의 피상적 선택관계를 통해 건축을 구축할 때 이러한 건축을 패러다임의 건축이라 부른다.”

그렇다면 삶의 건축은 제대로 구현이 되고 있을까. 저자는 그렇지 않다고 판단한다. 저자는 삶의 건축을 추구하는 건축가보다 기술과 경제, 권력이라는 거대한 괴물 앞에서 손을 비벼대는 건축가들을 진짜라고 부른다며 한탄한다.

기능주의적 건축인 국제주의도 마찬가지로 저자의 비판대상이다. 기능주의적 건축은 사물 자체에만 초점을 두기 때문이다. 국제주의나 기능주의나 과거를 이해한 바탕에서 세워져야 인간적이면서 인간의 삶을 담는 건축이 될텐데, 그러지 못하다.

“과거-현재-미래를 지역으로 묶는 혼이 활성화될 때라야 비로소 적극적인 의미로서의 건축역사가 재활성화된다. 그래야 비로소 창조적 건축과 예술이 된다.”

저자는 우리나라 건축이 정체된 이유 중 하나로 ‘고정된 사고’에 있다고 한다. ‘탑은 높아야 한다’, ‘A=B’라는 식의 도식이 문제라고 한다. 건축에서 제대로 된 진실을 발견하는 건 이처럼 고정된 인지가 아니라, 어떤 관계를 통해 변하는 걸 찾는 데 있다.

저자는 루이스 칸이 설계한 ‘솔크연구소’를 향해 다음과 같은 평가를 내렸다.

“건축은 어떠한 사인(sign)인가? 단순한 지시적 사인인가? 개념적 사인인가? 관계의 사인인가. 일상 속의 침묵의 사인인 ‘관계의 관계’의 사인인가. 루이스 칸이 그의 건물을 통해 진정으로 추구하고자 했던 것은 결코 고정적 진리도, 개념적 진리도 관계적 진리도 아니었다. 그가 진정으로 원했던 것은 일상성 속에 존재하는 침묵의 언어였다. 이 침묵의 언어는 머리의 굴림으로 이뤄지는 것이 아니라 가슴의 열림으로 드러나는 삶속의 언어이다.”

하나 더 곱씹어 볼 것은 건축계의 풍토에 대한 물음이다. 건축은 예술의 한 장르임을 자처하지만 건축계는 ‘일상성의 침묵’이 만연하다. 문제가 있으면 문제를 털어놓아야 할텐데, 체제에 순응하며 살아간다. 1990년대 건축계는 그랬다. 이런 ‘일상성의 침묵’은 21세기인 2020년에도 계속되고 있지는 않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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