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편집 2024-04-23 18:27 (화)
아름답고 행복한 가을 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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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미디어제주
  • 승인 2020.11.05 14: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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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양연화! 김순관작품전을 보고
글쓴이 : 김진철 (경영컨설턴트, 강사)
김진철.
김진철.

추위를 재촉하는 가을비가 내린다. 일요일 아침 새벽같이 일어나 광주에서 목포로 버스를 타고, 다시 목포에서 배를 타고 제주로 향했다. 지난 밤늦게 잠을 잔 터라 몸은 나른하다.
오늘 김순관 선생님의 작품전에 가는 길이다. 11월 6일 전시회를 마감한다고 하니 마음이 조급해져 부지런히 서둘러 길을 떠났다.

사실 그림에는 문외한인 내가 이리 새벽부터 서두르는지 나의 행동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다만 선생님과 만남에 더욱 설레었고, 굳이 말하자면 작품전의 제목이 화양연화라는 막연한 기대, 그리고 제목이 갖는 화려함을 현장에서 느껴보고자 하는 기대로 출발했다.

화양연화(花樣年華)는 ‘인생에서 가장 아름답고 행복한 시간’을 의미한단다.
나는 화려하고 행복한 순간들이 어떻게 그려졌을까 잔뜩 기대하고 전시장에 도착했다.
그런데 웬걸? 완전 반전이다.
작품 속의 군상들은 기뻐 뛰고, 가슴 벅찬 장면들과는 거리가 멀다.
밝은 미소도 없고, 기쁜 표정들도 아니다. 담담한 모습들이다.
색채는 화려하지도 않고, 오히려 어둡고 차분히 가라앉았다.
더구나 전시장은 지하이고, 조명들만 작품들을 비추고, 다른 빛들은 흐리다.
음침하기까지 하다.
뭐지? 그러나 이대로 물러설 내가 아니다. 찬찬히 그림들이 눈에 들어오고 새로운 발견이 시작되었다.

가족들의 어느 때 사진, 선생님이 제자의 어깨를 감싸고, 어린 아이를 안고 있는 엄마의 모습,
애절한 염원을 담고 성황당이든 큰 바위든 몸을 낮추고 기도하는 아낙의 모습.

노동 인력시장에 일찍 나와 하루 힘든 노동을 하고 그 대가로 일당을 손에 들고 기쁘게 돈을 세는 사람들의 모습, 시장 바닥에 좌판을 벌이고 하나라도 팔아보려는 수년을 그리 살았을 아줌마들, 아침 지친 모습으로 차에 앉아 서로 부대낌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스마트폰에 열중하고, 혹은 멍하게 바닥을 내려다보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

보나벤투라의 세례명으로 세례받는 엄숙한 순간, 유명한 고승이라도 어쩔 수 없이 가야 하는 저승길에 만장을 들고 다비장으로 가는 행렬.

화폭은 크고, 인물들도 마치 바위들처럼 크다. 작품 속에는 그저 일상에서 김순관 선생이 만났을 제주사람, 가족, 시장사람들, 특별한 사건이라고 말할 수도 없는 상황들과 그들의 이야기가 있었다. 김순관 선생의 화양연화 이야기들은 이런 사건들과 사람들이 담담하게 전개되고 있었다.

이것이 화양연화라니.

그런데 갑자기 전광석화처럼 내 머리를 무엇인가 때리고 지나간다. 나에게 갑자기 “장군” 하는 것 같았다. “멍군” 대안이 없다.

한참 장고 끝에 새로운 생각이 일었다.
나도 이런 모습의 군상중의 하나이고, 아름답지도, 행복하지도 않게 잊혀져간 일상의 삶이 그런 것이 아니었구나 하는 자각이 마치 죽비를 맞은 것처럼 정신이 번쩍 들었다.
내 삶의 모습들도 얼마나 소중하고 귀한지를 자각하기 시작했다.
사람의 몸을 받기가 어렵다고 한다(人身難得), 그러니 잘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지난 삶을 되돌아보면서 괴로움만 많았다(去日苦多)고만 했다.

화양연화의 자리에 문득 지금, 이 자리에서 나도 그런대로 잘 살았고, 많은 순간들이 아름다웠고, 행복했던 자신을 발견할 수 있었다.
김순관 선생은 화양연화를 통해 삶은 헛되지 않고 어쩌면 너무 아름답고 행복한 순간들의 연속이고, 아름다움이란 그리 요란하고 수다스럽지 않고, 꼭 밝은 빛깔이 아니어도 되고, 그렇게 살아온, 그리고 살아갈 사람들에게 주는 희망을 말하고자 했던 것이다.

김순관 선생이 좋아서 갔는데, 결국 선생님을 더 많이 알게 한 하루, 나의 화양연화의 이야기다. 가을 늦은 자락에 추위를 재촉하는 쌀쌀한 날에 새벽, 버스 타고, 배 타고 와서 한방 때림에 정신 차리게 한 화양연화를 보여주신 김순관 선생께 감사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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