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편집 2024-04-19 14:18 (금)
"길 하나가 사라진다는 건, 그 안에 깃든 시간과의 이별이야"
"길 하나가 사라진다는 건, 그 안에 깃든 시간과의 이별이야"
  • 김은애 기자
  • 승인 2020.09.27 11:3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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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제주> 시민강좌 - 제주시 원도심, 영화로 말 걸다, 제1~2강

영화 '로마의 휴일'로 보는 원도심 이야기
"과거-현재-미래를 잇는 길 의미 알아야"
서귀포시 도시우회도로로 사라질 소나무 숲을 올려다봤다. ⓒ미디어제주
서귀포시 도시우회도가 생기면 사라지게 될 소나무 숲. ⓒ미디어제주

[미디어제주 김은애 기자] 내가 지금 바라보는 이 풍경이, 언젠가 사라질 풍경임을 알고 있다면. 풍경을 바라보는 이의 마음 한구석에는 뭔지 모를 아쉬움과 서글픔이 깃들 것같다.

이렇게 되면 풍경을 보는 이의 마음에 변화가 생긴다. 이제부터라도 이 풍경을 두 눈에, 마음 속에 꼭 담아두려 애쓰게 되는 것이다. 혹자는 사진을 찍어 기록으로 남겨둘 수도 있다.

하지만 우리는 눈 앞의 풍경이 언제까지 남을 수 있을지 알 수 없다. 풍경들은 우리가 미처 이를 깨닫기 전에 사라졌고, 사라지고 있고, 사라질 것이다.

“있었던 것은 늘 있어왔고, 있는 것도 늘 있어왔으며, 앞으로 있을 것도 늘 있어왔다.” –루이스 이저도어 칸(Louis Isadore Kahn)

전통 건축에서 얻은 영감을 창의적인 현대 건축으로 승화시킨 현대 건축가 ‘루이스 이저도어 칸’이 남긴 말이다.

루이스 칸은 모더니즘 건축 최후의 거장으로 평가받는 세계적인 건축가다.

그런 그가 남인 이 말. 무엇을 의미하는 걸까.

“루이스 칸의 이 말은 미래와 과거, 현재를 잇는 공간의 개념을 의미합니다. 특히 공간 중에서도 ‘지켜야 할 가치가 있는’ 공간을 뜻하는데요. 지킬 가치가 있는 어떤 공간을 우리가 잘 보전해서, 미래 세대에 그대로 물려줄 수 있다면, 이 '공간'은 과거와 현재, 미래를 잇는 매개체가 될 수 있습니다. 늘 그 자리에 있어온 공간이지만, 그렇기에 가치있는 공간이라고 할 수 있는 거죠.”

국내외 원도심의 모습을 영화로 살피고, 제주 원도심 도시재생의 길을 모색해보는 ‘2020 제주시 원도심 시민강좌 – 제주시 원도심, 영화로 말 걸다’의 첫 번째 시간. 첫 강연자로 나선 <미디어제주> 김형훈 편집국장의 말이다.

“유럽을 가면, 자신이 사는 공간에 대한 자부심이 매우 강한 사람들을 만날 수 있습니다. 8세기 시인 ‘베디’는 이런 말을 했어요. ‘콜로세움이 서 있을 동안 로마는 무너지지 않으리. 콜로세움이 무너지는 날 로마도 멸망하리. 로마가 멸망하는 날 세상도 서 있지 않으리’. 자신이 사는 공간에 대한 애착을 표현한 시라고 볼 수 있죠.”

과거와 현재, 미래를 잇는 공간의 연속성. 그리고 그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가지는 공간에 대한 애착. 

김 국장은 지금 우리에게 부족한 것이 이것이라며, 제주의 현실을 꼬집었다.

9월 26일 제주시 고씨주택에서 열린 <미디어제주> 시민강좌. 첫 강연자로 김형훈 편집국장이 나섰다.

“’길은 풍경의 저장창고이다. 할아버지가 보았던 풍경을 아버지가 바라보고, 나도 같이 동일한 풍경을 본다는 것은, 나 또한 길의 역사에 편입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말하는 건축가’로 유명한 정기용 건축가께서 하신 말씀이에요. 서귀포 기적의 도서관을 설계하신 분이죠. 제가 생각해보니 저의 아버지와 생각을 같이하는 길은 제주도에 거의 없는 것 같아요. 거의 개발되고. 이 제주에 아버지와 함께했던 길은 얼마 남지 않았네요.”

그는 할아버지-아버지-아들, 혹은 할머니-어머니-딸 등 3세대가 기억을 공유할 수 있을 ‘원형의 모습이 남은 길’이 점점 사라지고 있는 점이 안타깝다고 말했다.

“그런데 유럽은 다릅니다. 길이 그대로 남아있죠. 그 이유는 ‘생각의 차이’에서 옵니다.”

그는 우리가 생각하는 ‘전통’의 계승과 서양에서 말하는 ‘전통’의 계승에 차이가 있다며, 설명을 이었다.

“원래 ‘전통’은 우리가 만든 말이 아니에요. 일본에서 주장하는 전통의 개념이 한국에 그대로 넘어온 건데요. 우리는 ‘전통’을 흔히 ‘옛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과거와 현재가 단절된 채, ‘옛것’만을 따로 보는 시각인 거죠. 반면, 서양에서 말하는 ‘전통’이란, ‘집단 속에서 전해져 온 것을 다시 본다’는 의미를 가집니다. 앞서 루이스 칸이 언급한 공간의 연속성과 이어지는 개념이죠. 과거는 곧 현재이고, 그 전의 과거도 현재이고, 또 미래가 될 수 있다는 뜻인데요. 이러한 관점으로 ‘전통적인 공간’을 바라본다면 어떨까요. ‘이 공간은 미래 후손이 살아갈 공간’이라는 시각으로 말이에요.”

9월 26일 제주시 고씨주택에서 열린 <미디어제주> 시민강좌 현장. 6명의 시민이 참석해 자리를 지켰다.

이날 강연이 열린 곳은 제주시 원도심에 위치한 ‘고씨주택’. 탐라문화광장이 생기며 허물어질 뻔한 이 공간은 시민들의 힘으로 되살아나 ‘제주사랑방’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제주사랑방에 들어서면, 시민 누구에게나 개방된 공간인 ‘제주책방’도 만날 수 있다. 지금은 코로나19로 잠정 휴관에 들어갔지만, 작년까지만 해도 관광객들에게 나름 ‘사진 명소’로 입소문 난 곳이기도 하다.

고씨주택의 안거리인 '제주사랑방'. 미디어제주
고씨주택의 안거리인 '제주사랑방'. 미디어제주

그리고 ‘2020 제주시 원도심 시민강좌’가 이곳 ‘고씨주택(현 ‘제주사랑방’)’에서 진행된 까닭은 여기에 있다. 오늘날 시민의 힘으로 생명을 얻은 이 공간에서, 원도심의 미래를 생각해보며 과거와 오늘, 그리고 내일을 잇는 공간의 개념을 깨달아 보자는 취지다.

“지금 우리 사회는 어떤가요. 옛날 것은 옛날 것. 현재는 현재의 것. 이렇게 구분해 바라보고, 과거의 공간을 쉽게 허물고, 다시 짓고 하거든요. 관덕정을 예로 들어 보죠. 관덕정은 지금 우리와 단절된, 별개의 공간이 되었습니다. 관덕정을 복원할 때, 전부 새로 짓는 것이 아니라 일부만 만들고, 주춧돌과 같은 건물의 흔적들만 보여줘도 되는데. 모두 새것으로 만들다 보니 단절된 느낌이 강하죠. 옛날 것과 오늘날의 것을 잇는 것이 바로 이 ‘주춧돌’인데 말이죠.”

이와 관련, 최근에는 사적 제380호 제주목 관아를 시민들에게 개방해 원도심 활성화를 이루자는 내용의 청원이 도의회에 전달되기도 했다.

이에 대해 도의회 문화관광체육위원회는 지난 21일 열린 제387회 제3차 임시회에서 “제주목 관아의 적절한 보전 및 충분한 보호장치와 더불어 지역주민, 인근 상권 연계한 프로그램 발굴 등 원도심 활성화 통한 지역경제 활성화 방안을 모색할 수 있도록 문화재청과 적극적인 대책 마련이 필요해 보인다”는 내용의 종합검토의견을 도지사에게 이송하기로 의결했다.

이같은 결정에 따라, 제주목 관아 활성화와 관련해서는 문화재청의 협조, 그리고 이를 위한 제주도의 노력과 의지가 중요한 화두로 떠오를 것으로 보인다.

제2강, 오드리 햅번 주연의 '로마의 휴일'을 감상하는 시간이 이어졌다.

강연이 끝이 나자, 이어진 영화 감상 시간. 원도심과 관련된 영화를 함께 감상하며, 이야기를 나눠보는 시간이다.

함께 본 영화는 ‘로마의 휴일’. 오드리 햅번 주연의 사랑스러운 로맨스 영화지만, 이날만큼은 영화 속 배우가 아닌, ‘원도심’인 로마 곳곳의 모습에 좀더 집중해본다.

제주의 어느 길 풍경같은 사진. 사실은 제주가 아니다. 카나리아제도 '란사로테섬'의 풍경이다. 이곳은 제주처럼 계절풍이 센 곳으로, 제주와 같은 돌담(밭담)이 발달해 있다.

“도시를 생각할 땐, 기억이 중첩되어야 합니다. 기억이 중첩되려면, 세대가 걸어온 ‘길’이 있어야 하겠고요. ‘길’을 중심으로 새로운 기억이 만들어질 수 있도록. ‘길’을 지키고, 보전해야 제대로 된 도시가 될 수 있습니다.”

도시가 개발되고, 새 건물이 들어서면, 옛길은 허물어진다.

제주의 기억을 잇는, 남은 ‘길’들이 미래 세대까지 전해질 수 있기를 바라며. 오는 10월 10일 토요일에는 제주대학교 건축학부 김태일 교수가 영화 ‘계춘할망’을 통해 보는 원도심 이야기를 이어간다.

참여를 원하는 이는 강의 시작 하루 전날까지 <미디어제주>로 전화(064-725-3456)하면 된다. 수강료는 무료, 코로나19로 인한 사회적 거리두기로 인해 선착순 10명까지 지원을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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