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과 죽음 넘나드는 장면이 드라마로 펼쳐져
18세기 선비들의 세계관도 들여다볼 수 있어
청산도에서 일어난 연애담도 읽을거리로 충분
바람은 두 얼굴을 지녔다. 어떤 때는 지킬 박사를 닮았고, 어떤 때는 영락없는 하이드의 모습이다. 그래도 좋다. 싫든 좋든 제주도는 바람을 안고 살아야 한다. 그게 제주도 사람들의 삶이다.
바람의 섬 제주도는 계절별로 다른 바람이 분다. 특히 겨울철 부는 북서계절풍은 혹독하기 이를 데 없다. 한라산을 기준으로, 남쪽에 사는 산남 사람들은 북서풍의 위력을 잘 모를테지만, 한라산 북쪽에 사는 사람들은 겨울철만 되면 찾아오는 그 바람을 어느 누구보다 잘 안다. 강한 북서풍은 짠 기운을 잔뜩 머금고 있고, 얼굴을 찢어지라 때린다. 겨울바다를 본 육지 사람들은 낭만적이다며 바다를 서성거리지만, 산북 사람들은 집안 곳곳으로 파고드는 북서풍을 어떻게 하면 막을지에 대한 고민뿐이다. 겨울철의 낭만? 북서풍을 수십년간 맞은 사람에겐 그런 낭만이 없다. 모르지, 심란할 때면 겨울바다를 찾을 수도.
조선시대를 살았던 제주 사람들도 북서풍에 대한 고민을 했을텐데, 당시엔 어떻게 거센 바람을 견뎠을지 자못 궁금하다. 21세기를 사는 사람들은 기상뉴스를 보면서 날씨가 예보와 조금만 달라도 불평을 하며 살고 있는데, 기상뉴스도 없던 그 시절의 삶은 과연 어땠을까. 그들에겐 우리가 지니지 못한 감각이 있지 않았을까. 먼 바다를 보면서 날씨를 감 잡거나, 한라산을 보면서 날씨를 예측했으리라. 뱃사람들은 “산목을 치면 날씨가 안 좋아진다”는 말을 하곤 했다. 여기서 산은 한라산이다. 구름띠가 한라산을 두르고 있고, 누군가의 목을 치듯 한라산의 정상만 남긴 그 모습을 본 뱃사람들은, 다음날 일어날 날씨를 예측하곤 했다. 그게 전부 맞을리는 없겠지만, 옛 사람들은 하늘의 구름과 한라산과 바람으로 날씨를 들여다봤다.
겨울철 손님인 북서계절풍은 종종 사람들의 발목을 잡는다. 겨울철에 제주도 본섬에서 추자도를 들어갈 경우에 풍랑주의보가 떨어져 며칠을 옴짝달싹하지 못하는 경우도 생긴다. 요즘도 이러한데, 옛날엔 대체 어땠을까. 그럼에도 옛 기록엔 북서풍을 피해서 제주도를 떠나곤 했다. 간혹 생사를 확인하지 못할 때도 있다. 바다에 수장되거나, 어딘가에 표류해서 새로운 삶을 사는 사람도 있었다. 수구초심이라고, 온갖 역경을 견디며 고향에 돌아오는 사람도 있다. 조선시대를 산 사람들은 기록을 잘 남겼다. 표류를 하더라도 그 과정을 남겨두곤 했다. 대표적으로 최부의 <표해록>이 있다. 최부 <표해록>은 일본판으로 나올 정도로 인기를 끌었다. 여기서는 최부의 <표해록>이 아닌, 제주사람의 표류 기록을 담은 장한철의 <표해록> 속으로 들어가본다. 최부의 <표해록>이 정부의 지시로 지어졌다면, 장한철의 <표해록>은 순전히 저자의 의지로 기록되었기에 더 재미가 난다. 이제부터 여기에 쓴 <표해록>은 장한철의 작품을 말한다.
장한철은 경인년(1770년, 영조 46년) 12월 25일 제주를 떠난다. 출발 지점은 조천포구였다. 양력으로 환산하면 1771년 1월말이나 2월초가 된다. 출발은 순조로웠지만 차츰 음침한 기운이 몰려온다. 장한철을 포함해서 배에 탄 이들은 모두 29명이다. 노잡이가 9명이고, 제주 상인 9명과 육지 상인 2명 등 상업활동 때문에 이 배를 탄 사람은 11명이다. 장한철은 과거를 보러 배를 탔고, 장한철의 친구인 김서일도 시험을 보러 배에 올랐다. 선장은 80회 넘게 제주와 육지 바다를 오고 간 자칭 ‘베테랑’ 이창성이었다. 제주도와 육지부 사이의 겨울바다는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다. 베테랑이라도 찬 겨울바다를 이기긴 쉽지 않다. 출항 당일 저녁이 되면서 날씨는 달라졌다. 그제야 이창성은 불길한 징조를 말한다.
“오늘 날씨는 비바람이 불 징조입니다. 신기루가 뜨고 고래가 나오는 것도 역시 모두 비바람이 불 조짐인 것입니다. 바라건대 배 안의 사람들은 혹 마음을 놓지 말아야 합니다.”
<장한철의 ‘표해록’ 중에서>
물을 퍼내는 지시는 장한철이 내렸다. 80회 이상의 경력을 지녔다는 선장은 말뿐이었다. 겨우 목숨을 건진 그들은 더이상 할 게 없었다. 노도 없고, 돛도 사라졌다. 해류에 모든 걸 맡겨야 했다. 제주 출발 4일째, 그들이 닿은 곳은 류큐국(지금의 오키나와) 일대의 작은 섬인 호산도였다. 며칠 뒤엔 아랫도리를 가리지 않은 왜구를 만나기도 했다.
<표해록>은 조선이 ‘은둔의 나라’였을까에 의문을 남기게 한다. 공부를 하는 선비들이라면 해외에 대한 기본적인 정보는 알고 있었다. 장한철이랑 과거시험을 보러 나섰던 김서일은 뱃멀미로 고생을 했다. 첫날 큰 파도에 고생을 하고, 조금 정신을 차리자 장한철을 원망하듯 이야기를 건네는데, 거기에 ‘종려선’이라는 표현이 등장한다.
“그대는 늘 스스로 말하기를 ‘남자로 이 섬에 태어남은 가마솥 안에 있는 물고기와 다를 바 없다. 어찌 40리 길이나 되는 서양 사람의 큰 종려선을 타고 사해를 두루 돌아다니면서 하늘과 땅 사이의 장관을 구경하지 않으리오’라고 하면서 평상시 소원이 이와 같은데, 나뭇잎처럼 조그만 배를 타고 1만리 푸른 물결 위에 떠 있으니 흥취가 어떠한가? 뜻한 소원이 풀렸는가?”
<장한철의 ‘표해록’ 중에서>
시험이냐, 죽음이냐. 김서일에겐 시험을 보러 가는 일보다 살아서 돌아가는 게 더 앞섰다. 그래서 잘난 장한철을 향해 ‘종려선’까지 들먹이며 후회막급을 드러냈다. 김서일의 말투로 짐작 가능한 건, 당대 지식인들은 외국에 대한 꽤 많은 정보를 알고 있었다는 점이다. <표해록> 곳곳은 다른 나라 사람들과의 만남이 잘 기록돼 있다. 왜구와의 만남은 물론, 상선을 타고 다니며 활동하던 명나라 유민들의 이야기도 담고 있다. 상선을 탄 명나라 유민은 지금의 베트남에 해당되는 안남에서 활동을 하고 있었고, 장한철 일행은 그들의 도움을 받아 호산도를 탈출할 수 있었다. 그러나 베트남 사람들은 제주도에 대한 좋지 못한 감정을 지니고 있었다. 1609년 제주목사와 판관 일행이 베트남 사람들을 죽인 사건이 있었는데, 베트남 사람에겐 아픈 기억이었던 모양이다. 상선엔 명나라 유민은 물론, 베트남 사람들도 타고 있었는데 호산도에서 구해준 이들이 제주도 사람인 걸 알고 죽여야 한다는 논쟁이 벌어진 터였다. 호산도에서 제주도로 향하던 장한철 일행은 상선에서 내릴 수밖에 없었다. 장한철 일행의 배는 상선에 묶여 이동됐는지, <표해록>에 따르면 “표류했던 우리 배에 급히 태워서 배 밖으로 내보냈다”고 나온다.
제주에서 류큐국의 호산도로, 호산도에서 왜구와의 만남, 명나라 상선의 도움, 다시 망망대해로…. 그런 과정을 거쳐 다시 제주도로 올 줄 알았는데 더 큰 화를 당한다. 장한철 일행의 배는 첫날 이후 노와 돛 없이 움직였다. 상선과 이별한 그날은 1771년 음력 1월 6일이다. 북서풍이 매섭게 불었고, 하늘은 눈과 비를 동반했다. 자연과의 사투를 벌인 끝에 8명만 살아남았다. 21명은 죽었고, 살아난 사람이 밟은 땅은 청산도였다.
<표해록>이 빛을 발하는 장면은 아마 청산도 부분이 아닐까. 그래서인지 <표해록>은 야담집에 많이 수록돼 있다. 우리 귀에 익은 <청구야담>에 들어 있고, <동야휘집>에도 등장한다. 청산도에 나오는 이야기는 연애담이다.
장한철은 청산도에 표류되기 전에 꿈을 꾸는데 “비몽사몽간에 어느 아름다운 여인이 하얀 옷을 입고서 나에게 밥을 가져다 주었다”고 나온다. 청산도에서 벌어질 일을 예고하고 있다. 청산도 생활 사흘째인 1월 9일, 장한철은 어느 아낙을 만난다. 스물이지만 과부로 산지 몇 해 된다는 여인이었다. 장한철은 애써 꿈속에서 만난 그 여인이라면서 둘의 만남을 정당화시키고 있다.
섬에 사는 여성들은 혼자가 되는, ‘여다의 섬’은 흔했다. 남편이 뱃일을 하거나, 뱃일이 아니더라도 배를 타고 육지로 나섰다가 바다에 수장되는 경우가 많았다. 청산도도 다를 바 없다. 20세 여인의 어머니는 육지에서 청산도로 시집을 온 경우였다. 결혼해서 남편이 죽었는데, 자신의 딸 역시 그런 삶을 이어가게 생겼다. 어쩌면 장한철에 기대어 딸을 청산도에서 탈출시킬 절호의 기회이기도 했다. 장한철과 스무살 여성의 대화를 들어보자.
“만약 그대를 태워 돌아간다면 그대가 어머니를 버릴 리 없을 것이고, 나를 여기 머물며 살게 한다면 내가 고향을 그리워할 걱정이 있을 것이니, 이를 어찌하겠소. 내가 일찍 과거에 합격해 남쪽 지방에서 관리생활을 시작한다면, 만남도 가히 기약할 수 있구려.”
“어찌 가히 이 섬 안에서 늙을 수 있겠습니까. 낭군이 저를 버리지 않는다면, 가히 남풍이 불 때를 말미암아 좋은 소식을 듣게 은혜를 베푸소서. 저는 5년을 기한으로 기다리겠습니다.”
어촌의 닭이 울어 동쪽 하늘이 밝아오고 있었다. 손을 잡고 서로 이별할 때, 목이 메어 능히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장한철의 ‘표해록’ 중에서>
청산도를 나온 일행은 장한철을 제외하곤 모두 제주로 떠났다. 제주를 나선지 20일 만이다. 그 사이에 여러 나라 사람들을 만나고, 죽을 고비를 넘겼다. 장한철은 왜 가지 않았을까? 청산도 여인을 만나러? 그건 아니다. 장한철은 하지 못한 게 있었다. 바로 과거시험이다. 서울로 향했고, 음력 3월 3일 회시를 봤으나 낙방이었다. 시험에 떨어지고 고향 제주를 밟은 건 음력 5월이다. 제주에 와보니 그를 제외하고 살아난 7명 가운데 4명은 이미 죽어 있었다.
장한철은 과거시험에 대한 욕심을 버리지 않았다. 제주에 도착한지 4년 후인 1775년 다시 별시를 통해 급제를 한다. 급제 이후 그는 대부분 육지에서 벼슬을 한다. 그의 나이 44세 때 대정현감으로 내려오기도 했으나, 다시 육지로 올라간다. 현재 장한철의 직계 후손들은 북한 땅인 강원도에 산다고 한다. 그런데 한가지 궁금한 게 있다. 과연 청산도 여성을 다시 만났을까.
이 글에 <표해록>에 담긴 내용을 다 담진 못했다. 제주도의 다양한 이야기가 <표해록>에 있다. 그와 더불어 삶을 살아가는 태도를 <표해록>을 통해 만날 수 있다. 장한철은 과거를 같이 보러 갔던 김서일이 말했듯이 다양한 경험에 목말라 있었다. 다양한 경험을 하려면 고통도 알아야 한다. 힘들다고 포기하면 모든 게 무너진다. 선장이 제 역할을 하지 못하자 장한철이 진두지휘한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다. <표해록>의 마지막 부분에 배를 함께 탄 일행을 찾아보고 조문을 하는 장면이 있다. 장한철이 조문객과 나눈 이야기로 끝을 맺을까 한다.
“무릇 품성을 즐기면서 기르는 사람은 싹이 나와 자라는 것과 같으나, 걱정을 해서 마음을 손상시키는 사람은 나무가 좀먹어 꺾어지는 것과 같습니다. 무릇 지금 사람들은 고생스런 경험을 하려 하지 않습니다. 수레 바퀴가 험준한 태항산(중국 산시성과 허난성 경계에 있음)을 올라가며 부러진 뒤에야 비로소 장안의 아홉갈래길이 평탄함을 깨닫게 됩니다. 거친 여량에서 배가 침몰된 뒤에야 비로소 오호(중국 양쯔강 남쪽에 있는 동정호)가 편안하고 잔잔함을 알게 됩니다.”
<장한철의 ‘표해록’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