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편집 2024-04-25 17:37 (목)
물매
물매
  • 김형훈
  • 승인 2020.09.10 14:0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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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건축 [2020년 4월호] 칼럼
강영봉 사단법인 제주어연구소 이사장

모든 사물은 배경을 갖는다. 그 배경은 사물에 따라 자연적인 것, 인문적인 것 그리고 사회적인 것이 있다. 경우에 따라서는 이 모두가 배경이 될 수도 있다. 사진 찍을 때를 생각해 보라. 그냥 선 자리에서 찍기도 하지만 자리를 옮겨 찍거나 자세를 달리하여 찍기도 한다. 경치가 좋은 곳이나 자세를 달리하여 찍는 것 그게 바로 사진의 배경이 되는 것이다.

‘삼국유사’에 실려 전하는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라는 이야기를 더 보자. 경문왕이 임금이 되고 난 뒤 귀가 갑자기 당나귀 귀처럼 자랐다. 모두들 이 사실을 알지 못했으나 왕관을 만든 한 사람만은 알고 있었다. 그는 평생토록 다른 사람에게 말하지 않다가 죽을 때가 되어 도림사 대숲에 가서 “우리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다.”하고 외쳤다. 그후 바람이 불면 대숲에서 “우리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다.”라는 소리가 났다. 왕은 그 소리가 싫어 대나무를 모두 베어버리고 산수유를 심었는데 바람이 불면 “우리 임금님 귀는 길다.”라는 소리가 났다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들의 관심은 대숲에서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라는 소리(말)가 산수유나무 숲에서는 “임금님 귀는 길다.”라 하는 소리(말)로 바뀐 데 있다. 곧 ‘당나귀 귀’는 대숲을 배경으로, ‘귀가 길다’는 산수유나무 숲을 그 배경으로 하고 있는 것이다.

사람들은 제주 초가를 이야기할 때 완만한 지붕물매를 그 특징으로 내세운다. 그렇다고 한다면 제주 초가의 물매 배경은 무엇일까. 사실, 초가를 기록한 황헌만 등(1991)의 ‘초가’나 윤원태(1999)의 ‘한국의 전통 초가’의 책장 한 장 한 장 넘기며 초가 사진을 보고 있노라면, 제주 초가와 육지 초가의 물매가 확연하게 다름을 느끼게 된다. 육지의 경우는 물매가 싸고, 좌우 측면이 기와집의 합각벽처럼 삼각형을 이루어 지붕이 뾰족하고 각이 생기는 것을 볼 수 있다. 육지 초가 지붕은 서까래를 용마루 위로 하여 손깍지 끼듯 X형으로 얹고서 산자를 엮어서 깔고 이엉을 덮기 때문이다. 옆에서 보면 지붕이 ∧형이 보이는 것은 그래서다.

반면 제주 초가는 전후좌우 어느 쪽으로 봐도 오로지 곡선만 있을 뿐이다. 지붕물매 또한 급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너무 둔하지도 않다. 제주 초가인 경우 ‘서리(서까래)’를 ‘상모르(용마루)’ 높이로 해서 걸치기 때문에 지붕물매가 뜬 편이다. 또 ‘서리’ 위에 ‘서슬(산자)’을 얹고 ‘고데(알매)’로 물매를 잡아 지붕을 ∩형으로 완만하게 만들기 때문에 어느 방향에서 바람이 불어와도 완만한 곡선을 타고 넘어갈 수 있게끔 유선형을 이루고 있다. 이렇게 지붕물매를 완만한 유선형을 이루게 한 것은 바람이라는 자연적 배경과 더불어 밋밋하거나 민틋하거나 봉긋봉긋한 ‘오름’에서 얻은 산물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다. ‘오름’은 제주 사람들에게는 모든 것이나 마찬가지다. 오름자락에 밭과 목장, 무덤이 자리한다. 밭에서 농사 짓고, 목장에서 마소를 쳤다. 목숨이 다하면 오름 자락에 가 묻힌다. 오름이야말로 살아서는 생활의 근거지요, 죽어서는 주검의 고향이기에 ‘오름’을 떠나서 삶과 죽음을 생각할 수 없다. 이 오름에 각이나 직선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다. 있다면 영혼의집인 장방형의 무덤이 있을 뿐이다.

‘따라비오름’을 보라. 성읍2리‘구렁팟’에서 한참을 가다 보면 좌우로 길게 누운 오름을 만나게 된다. 큰키나무라고는 없는, 윤곽선이 뚜렷한 오름이다. 분명‘굼부리(분화구)’는 세쌍둥인데 어느 것 하나 나무를 키우지 않아 그저 밋밋한 능선으로 되어있을 뿐이다. 이런 능선은 ‘따라비오름’만이 아니다. 이제는 나무가 자라 곡선의 능선을 가리고 있지만 예전에는 아주 또렷하게 보이는 밋밋하고 봉긋한 능선이다. 이 오름의 능선을 닮은 게 지붕물매인 것이다.

이 물매에 대해 제주 사람들은, “물매가 뜨민 발쎄가 좋아. 지붕 우틔서 걷기가 좋덴 허는 말이주. 물매가 쎄민 못 걸어.”, “물매까지믄 거 비 셀아.”라 한다. “지붕 물매가 뜨면 발씨가 좋아. 지붕 위에서 걷기가 좋다고 하는 말이지. 지붕 물매가 싸면 못 걸어.”, “지붕 물매 꺼지면 거 비 새어.”하는 뜻이다. 물매가 뜨면 지붕 위에서 걸어다니기 좋고, 물매가 싸면 걸어 다니기가 어렵다는 말이다. ‘발쎄(발씨)’는 ‘발을 놀려 무엇을 하는 재주’라는 뜻이다(솜씨는 ‘손씨’에서 온 어휘로, 손을 놀려 무엇을 만들거나 어떤 일을 하는 재주를 말함). 지붕 위에 올라가 ‘새(띠)’를 펴서 지붕을 덮거나 ‘집줄’을 조절해 주기 위하여 지붕 위를 걸어다니는 게 ‘발쎄’다.

또 물매가 떠서 지붕이 꺼지면 지붕을 덮은 ‘새’가 빨리 썩는다. 물매가 뜨면 걸어 다니기는 편할지 모르지만 꺼지는 데가 생기고, 그리로 빗물이 스며들기 때문이다. 따라서 물매는 너무 싸도 안 좋은 것이고, 너무 떠도 안 좋은 것이다.

‘물매 싸다’와 ‘물매 뜨다’의 사이. 그 중간은 어디쯤일까. 치우치지 아니하고, 기울어지지 아니하고, 지나치지 아니하고, 모자라지 아니하는 것. 그건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제주 초가의 물매에서 중용의 가치를 배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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