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편집 2024-04-24 17:54 (수)
“우린 방관자로 너무 적당히 살지 않았나요?”
“우린 방관자로 너무 적당히 살지 않았나요?”
  • 김형훈 기자
  • 승인 2020.09.04 14:1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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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출판 한그루, ‘리본시선’ 두 번째 시집
김경훈 시인의 <운동부족> 27년만에 출간

[미디어제주 김형훈 기자] 혹시 우린, 방관자가 아닐까. 멀리서 지켜보기만 하다가 주류에 들러붙는 그런 방관자는 아닐까.

마리틴 니묄러의 시가 갑자기 떠오른다. ‘그들이 왔다’라는 시에서 뭐라고 했던가. 시 속의 주인공은 나치가 공산주의자를 잡으러 왔어도 지켜보기만, 유대인을 잡으러 왔어도 지켜보기만, 노동조합원을 잡으러 왔어도 지켜보기만, 가톨릭 신자를 잡으러 왔어도 지켜보기만 했다. 주인공 ‘나’는 공산주의자가 아니었고, 유대인도 아니었고, 노동조합원도 아니었고, 가톨릭 신자도 아니었다며 방관자로 지켜보기만 했다.

그러다 어찌 되었나. ‘그들이 왔다’ 마지막 세 줄이다.

그들은 나를 잡으러 왔다.
그런데 이제 말해 줄 사람은
아무도 남아 있지 않았다
.

<마르틴 니묄러의 시 ‘그들이 왔다’ 중에서>

‘리본시선’ 두 번째 시집이 나왔다. ‘리본시선’은 절판된 시집을 살려내는 작업이다. 도서출판 한그루와 시옷서점이 만들어내는 작업이 ‘리본시선’이다. 두 번째 ‘리본시선’은 김경훈 시인의 <운동부족>이다.

김경훈 시인은 마당극의 판에서, 시 세계의 판에서 농익은 연기를 한다. <운동부족>은 1993년 펴낸 첫 시집으로, 27년만에 ‘리본시선’으로 되살아났다. 시집 속 ‘운동부족2’를 읽어볼까.

적당히 아주 적당히
경멸하고
, 두려워하기도 하고 적당히
동정하고
, 비웃기도 하면서
피 찰찰 흐르는 고민은 항상 시간이 없고
땀 팡팡 나는 실천은 항상 딴 사람 몫이고
그리하여 마땅히 적당한 때
적당한 곳에서 적당히 꽃피는
아름다운 환상 속에서 적당히 아주

아주 적당히
<김경훈 시 ‘운동부족2’ 중에서>

운동부족이다. ‘적당히’만 외치고 사는 우리들은 늘 운동부족이다. ‘적당히’는 마치 균형을 잡는 모양새를 띠지만, ‘적당히’는 니묄러가 말했듯이 철저히 방관자로만 남는다. ‘적당히’는 정의를 외치는 것처럼 보이지만, 정의를 갉아먹는 좀이다.

<운동부족>은 적당히 살려고 하는 이들에게 좀 더 치열하게 살아보라고 권한다. 그런 권유를 마다할 이유는 없다. 27년 전인 1993년과 2020년 지금이 같지는 않겠지만 사회 부조리에 대해서는 자신 있게 말할 줄 알아야 하지 않을까. <운동부족>은 마냥 방관자로 남거나, 늘 적당히 사는 우리들에게 보내는 메시지이다.

시인 김경훈은 놀이패 한라산에서 활동했고, 제주작가회의에서 자유실천위원회 일을 맡고 있다. 첫 시집 이후 <우아한 막창>, <까마귀가 전하는 말> 등의 시집을 펴냈고, 산문집으로 <낭푼밥 공동체>, 마당극 대본집으로 <살짜기 옵서예>와 <소옥의 노래>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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