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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 건축 답사 - 남프랑스
해외 건축 답사 - 남프랑스
  • 미디어제주
  • 승인 2020.08.04 12: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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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건축 [2020년 3월호]이슈
현군출 ㈜토펙종합건축사사무소

제주특별자치도건축사회가 2019 대한민국건축사대회 기간에 맞추어 대회 참관 및 해외 및 국내 건축 답사를 진행하였다. 건축 답사는 매년 많은 회원들이 참여하여 회원간의 친목을 도모하면서 국내 및 해외의 다양한 건축을 체험하는 기회를 갖는 프로그램이다. 2019년 건축 답사에서 국내팀은 서울을 중심으로 진행하였고, 해외팀은 남프랑스, 베트남, 호주를 선정하여, 전통 건축, 현대 건축 그리고 도시, 재생 프로젝트 등 다양한 답사 프로그램을 기획하여 진행하였다.

 

대부분 해외여행을 초인적인 걸음으로 답사하는 스타일인 내가 협회에서 떠나는 남프랑스 프로그램 기획을 하게 되었다. 주제를 갖지 않고 떠나는 여행을 통해 상상과 현실을 비교해가며 보는 즐거움을 줄 수 있을지 않을까 생각했지만 결국 공유할 수 있는 한 부분은 있어야겠다는 생각에 르 꼬르뷔제(Le Corbusier)의 르 토르네 수도원(Abbay du Thoronet), 라 투레트 수도원(Couvent Sainte-Marie de La Tourette), 유니테 다비타시옹(Unite D'HabItation)을 프로그램에 넣기로 했다.

오전 11시 인천 출발, 프랑크푸르트(Frankfurt) 경유, 프랑스 니스(Nice) 공항에 저녁 6시 경에 도착하고 숙소에 들어오니 저녁 9시였다. 하루가 채 지나기 전 동아시아 끝에서 서유럽까지 날아왔으니 참 편한 세상이다. 시차적응 없이 푹 자고 일어나 아침 ‘프롬나드 데 장글레(Promenade des Anglais)’를 걸었다. 해가 뜨기 전 니스의 자갈 해변도 운치가 있었고, 스쳐 지나가는 프랑스 사람들과의 아침인사도 정겹다. ‘프롬나드 데 장글레’는 '영국인 산책로'라고 불린다.

뜬금없이 웬 영국인 산책로인가 했는데 1820년 영국인 성직자 루이스 웨이(Lewis Way)가 폭 2m에 불과했던 길을 아름답게 잘 다듬어 만들었다고 하여 ‘영국인 산책로(프롬나드 데 장글레)’라 이름이 붙여졌다고 한다. 그 당시에도 니스는 유럽 사람들에게 아름다운 휴양지였다고 한다. 본격적인 여행의 시작은 니스 오페라 극장, 니스 시청, 샬레야 새벽시장,ㅍ구도시의 골목길 그리고 마세나 광장(Place Massena)으로 이어졌다.

니스 오페라 극장은 가르니에(Charles Garnier) 작품이다. 이번 여행에서 목적하지는 않았지만 개인적으로 파리의 오페라 가르니에(Opera Garnier) 답사 계획을 하고 있었는데, 니스 그리고 모나코에서 몬테카를로 카지노(Monte Carlo Casino)를 뜻하지 않게 볼 수 있었다. 오히려 계획에 넣었던 파리의 오페라 가르니에는 볼 수 없었으니 여행이란 것은 뜻대로 되지 않는 것이 매력인가 보다. 니스 시청을 가이드가 설명하면서 흥미로운 사실을 알게 되었다. 프랑스에서는 호텔이 숙박하는 호텔이 아니라고 한다. (실제 호텔이라 하지 않고 H는 묵음으로 오텔하고 발음을 한다) 호텔의 어원은 여행자들을 위한 숙소라는 뜻의 hospitale에서 유래했으며 이는 나중에 병자를 치료하기 위한 장소로 변용되어 hospital→ hostel(여인숙) → hotel로 변화하게 되었다고 한다. 따라서 병원(hospital)과 어원이 같다. 영어가 아닌 프랑스어에서는 이 어원 때문에 ‘hotel’은 숙박시설이란 뜻 외에도 ‘저택’,'관저'라는 뜻이 있다. 그래서 ‘hotel de ville’은 영어로 번역하면 ‘Hotel of City’(도시의 호텔)이 아니라 ‘City Hall’(시청)이 된다. 이 때문에 프랑스 여행 중 시청을 호텔로 오해하고 방이 있냐고 들어가면 안 된다고 한다.

마세나 광장(Place Massena)에는 아폴로 동상이 우뚝 서 있는 태양의 분수가 있다. ‘마세나’라는 이름은 나폴레옹 황제의 전성기 시절, 프랑스 군대의 군사 지휘관이었던 니스 출신 앙드레 마세나(Andre Massena) 장군의 이름에서 딴 것이라고 한다. 아폴로가 태양의 신이어서 아마 태양의 분수라고 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마세나 광장에는 스페인 조각가 하우메 플렌사(Jaume Plensa)의 ‘니스에서의 대화’라는 7개의 하얀색 조각상이 있다. 밤에는 조명에 의하여 형형색색으로 변하고 낮에는 하얀색의 조각상으로 광장을 장식하고 있는데 7개로 이루어져 있는 조형물들은 각각 아시아, 유럽, 북아메리카, 남아메리카, 아프리카, 오세아니아, 그리고 남극 대륙을 포함한 7대륙을 의미한다고 한다. 하우메 플렌사의 작품이 제주 본태미술관에도 있는데 작가는 공공예술에서 대표적인 작가로 미술관 내부가 아니라 사람들과 가까운 공공장소에 설치가 되어 일반인과 작품의 소통이 자연스럽게 일어날 수 있도록 새로운 공공 미술의 개념을 확고하게 만들어낸 작가이다.

이제 ‘색채의 마술사’인 ‘샤갈(Marc Zakharovich Chagall)(1887~1985) 미술관’으로 간다. 샤갈 미술관에서 그림에 대한 설명을 들으며 감상한 것이 이번 여행에서 값진 소득이었다. 물론 그림을 반드시 설명을 듣고 보는 것만이 제대로된 미술 감상법이라 생각하지는 않지만 샤갈 미술관에서 만큼은 설명하시는 분의 역량에 의하여 그림을 이해하는데 얼마나 중요한 가를 새삼 느낄 수 있도록 적절한 깊이의 설명, 작품 선택, 감상 시간 등이 있었다.

미술관이 만들어진 배경이 재미있었다. 샤갈이 생 폴 드방스(Saint-Paul de Vence)에 머물던 노년시절 칼베르 노트르담성당을 장식할 창세기 이야기를 담은 그림을 그렸으나 관할교구 주교가 아가서(구약의 스물두째권)를 모티브로 한 작품들이 선정적이라는 이유로 거부당하게 된다. 이를 안타깝게 여긴 당시 문화부장관 앙드레 말로(Andre-Georges Malraux)가 작품을 걸 수 있는 미술관을 짓자고 제안하여 미술관 건립이 진행되었다 한다. 최초에는 1966년부터 인생의 마지막 20년을 보낸 생 폴 드방스에 미술관을 짓기를 희망했으나 건립이 진행되지 않았고, 결국 니스시에서 토지를 제공하여 니스에 짓게 되었는데 그림들은 니스를 벗어나지 못하는 것을 전제로 기부했다고 한다. 선정적이어서 퇴짜를 맞았던 작품들이 이제는 니스 관광의 한 축을 맡고 있지 않나 싶었다.(자산 가치는 얼마일까?)

다음은 근처에 있는 ‘마티스(Henri(-Emile-Benoit) Matisse)(1869~1954) 미술관’을 찾았다. 앙리 마티스는 ‘야수파 운동의 지도자’이자 ‘색채의 마법사’로 통할 만큼 혁신적이고 독창적인 감각으로 색을 사용한 20세기 초 야수파 운동을 주도하여 파블로 피카소를 비롯한 유럽화가들에게 커다란 영향을 준 화가이다. 말년에 수술 이후 휠체어에 의지하게 되면서 정상적인 작품 활동이 어려워지자 안락의자나 침대에 누워 붓 대신 가위를 들고 색종이 작품을 만들었다. 미술관에서는 마티스의 작품들과 영화와 관련된 기획전시를 진행 중이었다.

1950년대 활동하던 최고의 여배우 그레스 켈리와 레이니 3세의 러브 스토리가 있는 ‘모나코(Monaco)’로 간다. 니스에서 모나코까지 해안 길은 아름다운 지중해, 해안 절벽, 그리고 자연과 건축이 완벽하게 조화를 이룬 절경을 이루고 있어 가는 길이 지루하지 않다. 모나코 경계는 긴 쪽이 3km, 짧은 쪽이 500m 정도로 세계에서 두 번째 사이즈의 인구 4만 정도의 작은 국가이다. 1861년 프랑스로부터 독립된 주권을 인정받았으나 공위를 이어갈 왕자가 없으면 프랑스에 합병된다는 이상한 조약을 맺고 있는데, 현재까지는 알베르 2세 국왕이 있어 독립국의 지위를 갖고 있다고 한다.

모나코에서는 그레이스 켈리와 레니에 3세의 결혼식이 열렸고 지금은 두사람이 잠들어 있는 모나코 대성당(Cathedrale Monaco), 유럽 최고의 해양 박물관, 생 마르탱 공원, 모나코 대공의 궁전, 가르니에의 몬테 칼를로 카지노를 둘러 보았는데 깐느와 모나코 도시는 남프랑스의 일정에서 마치 의무적으로 둘러보아야 하는 정도로 생각해서 인지 별다른 감흥없이 답사를 마쳤던 것 같다.

둘째날은 ‘생 폴 드 방스(Saint-Paul-de-Vence)’ 그리고 ‘르 토르네 수도원’ 일정으로 아침부터 설레임에 들떠 있었다. 생 폴드방스 마을 입구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서 차에서 내려 걷다가 샤갈의 생 폴드 방스의 모습을 그린 포인트에서 마을을 보는데 건축이 산봉우리를 만들어 놓았다. 마을은 성곽 안에 빼곡하게 들어차 있어 안의 모습이 더더욱 궁금했다. 중세 예술인 마을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골목을 걷고 있는데 소담스럽고 예쁘다. 생 폴 드 방스는 프렌치 리베리아에서 가장 역사가 긴 마을 중에 하나라고 한다.

이곳에 20년간 살았던 샤갈 그리고 많은 유명한 예술인들이 이곳을 사랑했다고 한다. 프랑수아 1세 때 건축한 도시는 방어용 성벽이 잘 보존되어 있고 자갈을 깔아 놓은 길과 마을 중심의 분수가 더더욱 마을을 사랑하게 만드는 것 같았다.

그런데 마을 가게 대부분이 열지 않았고 우리 일행을 제외하고는 셀 수 있을 정도의 관광객들만이 마을을 서성거리고 있었다. 가이드 설명에 의하면 비수기라서 많은 가게들이 문을 열지 않는다고 한다. 역시 마을은 활기가 넘치고 시끌벅적해야 하는데 그냥 예쁘고 아기자기한 모습에 ‘생 폴 드 방스’는 아름답기는 하지만 마을이라기보다 영화세트장 같은 느낌이 들어 아쉬움이 많이 남았다.

성안 마을을 둘러보는데 30~40분이면 돌아볼 정도의 소담한 마을이다. ‘폴롱 예배당(La Chapelle Folon)’은 내부 수리 관계로 볼 수 없었지만 가게마다 전시되어 있는 고가의 작품들을 창문 너머로 들여다보는 재미로 아쉬움을 달랬다. 샤갈이 묻혀있는 ‘생 폴 드 방스 공동묘지’를 찾았다. 샤갈 미술관을 보고 온 뒤라 더더욱 샤갈이 묘를 보고 싶었다. 샤갈의 사랑했던 아내 벨라에 대한 애틋한 이야기를 들었는데 묘지에는 두 번째 아내 바바와 그의 동생만이 묻혀 있다고 했다.(묘지에 벨라 이름은 없었다)

‘생 폴 드 방스’에는 유명한 건물이 하나 있다 지금은 ‘라 콜롱브 도르(La Colombe d'Or)’라는 호텔이 있는데 우리말로 ‘황금 비둘기’라고 한다. 원래 여인숙이었을 때 머물렀던 화가들이 숙박비를 대신하여 그림을 주고 갔다고 하는데 그 작품들이 전시되어 있다고 한다. 역시 비수기라 문이 닫혀있다. 이곳에서 프랑스의 국민적인 배우 이브 몽땅(Yves Montand)과 여배우 시몬느 시뇨레(Simone Signoret)의 성대한 결혼식이 열렸었다고 한다.

‘르 토르네 수도원(Abbay du Thoronet)’을 간다. 바람은 수도원에서 여유롭게 답사할 수 있는 시간을 갖고 싶었다. 그런데 도착한 시간이 문 닫기 한 시간 전이였다. 단체 사진을 찍기 무섭게 ‘진실의 건축’(르코르뷔제가 쿠튀리에 신부의 권유에 보았던 르 토르네 수도원에 감동을 받고 그의 전속 사진가에 의뢰하여 만든 르 토르네 수도원 사진집)과 ‘묵상’에서 보았던 글과 사진을 기억해 가며 수도원을 잰 걸음으로 돌아보았다. 일행에 뒤처져 공간을 음미하며 건축을 가슴에 담아 넣고자 하였지만 아무래도 시간적인 여유가 없어 집중하기가 쉽지 않았다. 다시 르 토르네 수도원을 찾아야겠다는 체념을 했지만 그래도 못내 아쉬워 일행이 떠난 수도원을 다시 한 번 마음을 가다듬어가면서 둘러보았다. 그날 그렇게 르 토르네 수도원의 일정을 마무리 하였다. (돌아와서 ‘묵상’ 책을 다시 꺼내 들고 그날의 아쉬움을 달랬다)

프랑스에서 가장 긴 역사 도시이면서 최대 항구도시 ‘마르세유(Marseille)’. 식사 장소로 가면서 ‘노만 포스터경(Sir Norman Foster)의 파빌리온’을 뜻밖에 만났다. 노만 포스터는 구항구에 과거와 현재가 교차하는 도시의 그늘을 만들어 놓았다. 스페인 바로셀로나 엔카츠 시장(Encants Market)의 지붕과 유사하게 천장을 거울(아마 스테인레스 스틸)로 만든 파빌리온이다. 아침이 되면 거울을 통해 활기찬 시장 모습이 천장에 반사되어 생동감 있게 보이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새벽 눈을 뜨자마자 항구로 나갔는데 예상과는 달리 한산하다.

비가 오는 항구는 오히려 적막했다. 아침부터 비가 내린다. 적막한 시장이 더욱 쓸쓸하게 보인다. ‘참 좋으신 어머니’라는 ‘노틀담 드 가르드 성당(Basilique Notre-Dame-de-la-

Garde)’으로 향했다. 마르세유가 한 눈에 내려다보이는 161m 석회암 언덕에 세워진 로마 가톨릭 성당이다. 1864년 로마 비잔틴 양식으로 지어졌다. 종탑 위에 황금색 성모 마리아상이 있는데 지역의 수호성인이라고 한다. 원래 언덕에는 작은 성당이 있었는데 바다를 항해하는 선박들에 등대역할을 하였고, 성당으로 인하여 안전한 항해를 할 수 있었던 가족들이 감사의 기도를 드렸다고 한다. 성당 측면에는 총탄 자욱이 그대로 남아 있는데 이는 전쟁에 대한 기억을 보여줌으로, 평화에 대한 교훈을 주려고 그대로 남겨 두었다고 한다.

성당을 내려와 ‘유니테 다비타시옹(Unite D'HabItation)’으로 향했다. 1947~1952년 동안 지었으며 300여 주거공간과 호텔, 상가, 탁아소, 수영장 등이 갖추어진 르 꼬르뷔제가 만든 공동주택이다. 1층과 호텔 로비층만 개방되어 특별하게 건축을 자세히 둘러보기는 어려웠지만 70년 가까이 된 건축이라고 믿기 어려울 정도로 잘 이용되고 있는 것 같았다. 왜 거장이라고 하는지는 작업을 보면 이내 느낄 수 있다.

이제 ‘반 고흐(Vincent van Gogh)’의 도시 ‘아를(Arles)’로 이동한다. 고흐가 아를에 도착해서 묵었던 하숙집을 시작으로 ‘밤의 카페테라스(Cafe Terrace, Place du Forum)’ 그리고 ‘에스파스 반 고흐’, ‘랑글로와 다리’까지 고흐 자취를 따라 아를을 걸었다. 고흐의 자취를 찾아가는 중간 중간에 고대 로마 원형극장, 고대극장 그리고 로마네스크 양식의 생 트로핌 성당(Eglise Saint-Trophime)을 보았다.

생 트로핌 성당은 아를에 기독교를 전파한 초대 주교이자 수호성인인 성 트로핌을 위해 세워진 성당이다. 성당 입구에는 최후의 심판 장면이 흥미를 끌며 아를의 주교인 성 오노레의 유해가 담긴 석관이 보관되어있다. 고흐가 그 유명한 ‘해바라기’ 그림을 이 성당에서 그렸다고 한다.

아직은 공사 중인 프랑크 게리의 폰타시온 빈센트 반 고호 아를이 준공을 앞두고 아를의 도시에 우뚝 서 있다. 마지막으로 ‘아를 고고학 박물관’은 고대 유적 도시인 아를의 고대 유물을 전시하는 박물관으로, 삼각형의 평면을 완벽하게 소화한 ‘앙리 시리아니(Henri Ciriani)’의 건축은 내부 공간의 구성이 흥미로웠다. 전시되어 있는 유물과 공간이 조화롭게 구성되어 있고, 공간이 낭비가 보이지 않고 전체가 한눈에 들어오면서도 전시물을 보는데 전혀 방해를 받지 않게 설계된 건축이었다. 외벽은 청색 에나멜이 입혀진 유리로 마감되어있다.

‘레보 드 프로방스(Les Baux de Provence)’ 역시 프랑스 사람들이 사랑하는 도시 중 하나라고 한다. 생 폴드 방스가 산위에 마을을 얹었다면, 레보 드 프로방스는 돌산을 파서 도시를 만들었다고 표현해도 될 지 모르겠다. 11세기 이 지역을 지배했던 ‘보(Baux)’ 가문에서 외부의 침략을 막고자 요새를 지었다고 한다. 보(baux)가의 성채는 프랑스 왕정에 종교적인 문제로 대항을 하자 루이 13세가 군대를 보내 폐허로 만들었다고 한다. 성채 자체가 산을 깎아서 만든 도시이기에 다시 세울 수 없어 파괴된 모습 그대로 남아있는데 오히려 이러한 모습에 많은 관광객들이 찾아 온다하니 새롭게 고치는 것만이 좋은 것은 아닌 것 같다.

‘빛의 채석장’은 바로 근처에 있었지만 다음날 다시 찾았다. 카리에르 드 뤼미에르(Carrieres de Lumieres)는 ‘빛의 아틀리에’라는 뜻이 있다고 한다. 원래 채석장으로 사용하다 철과 콘크리트가 보편화되면서 점차 석회암 수요가 줄어 폐쇄되었고, 아무도 찾지 않는 잊혀진 장소가 되었는데 영화감독 장 콕도(Jean Cocteau)가 이곳에서 ‘오르페우스의 유언’을 촬영하면서 사람들의 관심을 불러일으키고, 1977년 설치 미술가 죠셉 스보보다(Joseph svoboda)가 오디

오-비디오 쇼를 진행함으로써 다시 주목을 받게 되었다. 2011년부터 예술관리단체에서 채석장 관리를 맡게 되면서 본격적으로 빛과 영상을 통한 전시장으로 2012년 문을 열게 되었다고 한다. 내부로 들어서면서 10m 높이의 내부 벽, 바닥, 천장을 빔 프로젝트에 의하여 투사된 고흐의 작품들과 꿈의 일본이라는 작품이 40여분 진행되었다. 요철이 있는 벽과 천장 그리고 바닥이 오히려 그림을 더욱 생동감 있게 보이게 함으로써 고흐의 작품과 절묘하게 맞아 떨어지지 않았나 생각했다.

‘아비뇽(Avignon)’에는 교황청을 빼 놓을 수 없다. 베네딕트 12세와 클레멍 6세 두 교황이 1335년 시작 20년이 채 되기 전에 완공한 교황청이 있다. 유럽전체에서 가장 큰 고딕양식의 궁전이라고 한다. 클레멍 6세 교황이 글을 쓰던 사슴의 방 등 20개의 방과 지오바네타의 프레스코화를 볼 수 있고 교황의 개인실도 관람이 가능하였다.

론강의 ‘생 베네제 다리(Pont Saint-Benezet)’. 아비뇽은 이 다리 건설로 크게 발전되었다고 하는데 베네제와 그의 제자들에 의해 지어질 당시 22개의 아치 다리였으나 1660년 대홍수로 붕괴되어 현재는 4개의 아치만 남아 있다. 다리에는 기도를 드릴 수 있는 장소가 있는데, 다리 공사할 때 공사의 난이도가 높아 목숨을 걸고 작업을 하여야 해서 무사 안녕을 기원하고자 예배 장소를 만들었다고 한다.

‘리옹(Lyon)’은 중부 오베르뉴 지방 퓌드듬 주에 있는 도시이며, 론강과 손강 사이에 있는 좁은 반도에 걸쳐있는 도시로 ‘라 투레트 수도원’을 답사하기 위해 코스에 넣었다. 라투레트 수도원은 이번이 두 번째 방문이다. 15년 전 롱샹 성당과 함께 라 투레트 수도원을 방문한 적이 있었다. 깊은 인상을 받았던 기억이 있어 코스에 넣었고 같이 간 일행들에게도 그 때 내가 받았던 깊은 감동을 받았으면 했다. 승효상 선생의 ‘묵상’ 책의 내용을 인용하여 라 투레트 수도원에 대한 소개를 하겠다.

르 꼬르뷔제가 롱샹성당을 설계하여 한창 짓고 있던 1953, 알랭 쿠튀리(alain couturier 1897~1954)에 신부로부터 라 투레트 수도원 설계를 부탁받게 된다. -중략-

1948년 이 둘은 마르세유 근처 라 생트 봄의 동굴 성당을 설계하기로 되었는데, 수도회 위원회와 관료들에 의해 일이 무산되면서 르 코르뷔제는 상처를 받게 된다. 1950년 신부가 다시 르 꼬르뷔제를 찾아 롱샹성당을 부탁하는데 2년 상처받은 기억에 자신은 가톨릭 신자가 아니니 가톨릭을 믿는 건축가를 찾아가라고 했다고 한다.

라 투레트 수도원.
라 투레트 수도원.

신부는 나는 건축가를 찾고 있지 신자를 찾고 있지 않다는 신부의 말에 결국 최고의 건축인 롱샹 성당을 설계하게 되었고, 이 두 사람은 현대 건축사의 대단한 족적을 남기게 되었다. 그리고 다시 1952년 10월 리옹 근처에 수도원을 짓는다는 소식을 들은 쿠튀리에 신부는 리옹의 수도회 감독에게 편지를 보내 건축가 교체를 강력하게 요청했다.

설계가 끝이 났고 정부 허가까지 다 받은 상황이었지만 완강하게 요구하는 신부의 요구에 1953년 수도회 회의가 열리게 되고, 그 회의에 출두하여 신자는 아니지만 재능있는 건축가를 뽑을 것을 주장하고 투표를 통해 르 꼬르뷔제가 설계를 맡게 되는 세기적인 결정이 내려지게 된다. 그런데 기존 설계를 완성한 건축가 모리스 노바리나는 15년전 쿠튀리에 신부와 협력 아시 성당을 지은바 있고 성당 건축이 성공적이라는 평을 들었는데도 쿠튀리에 신부는 르 꼬르뷔제를 고집한 것이다. -중략-

1953년에 계획안이 제출되었고 수도회의 신부들은 계획안이 르 토르네 수도원과 비슷함을 은근하게 비꼬왔다고 한다. 라 투레트 수도원을 설계할 때 참조하라는 르 토르네 수도원은 시토회 수도원으로 두 수도회의 성격이 달라 건축적인 구성도 상이하여 그렇게 마땅하게 생각하지 않았던 듯하다. 하지만 강력한 쿠튀리에 신부의 지원에 힘입어 긴 설득 과정이 필요하였으나 3년이 지난 19569월에 공사가 시작되었고 예산, 까다로운 디테일, 늘어가는 공사 기간 등 악전고투 끝에 19601019일 성대한 헌당식을 가지게 된다. - 승효상, 묵상

니스, 모나코, 생폴드방스, 마르세이유, 아를, 아비뇽에서 보낸 5일간의 남프랑스는 정말 꿈을 꾸듯이 지나갔다. 그리고 2일 리옹, 그리고 파리에서 정신없이 하루를 보내고 여행을 마쳤다. 만족스럽지 못한 프로그램과 계획과 다르게 진행된 일정에도 항상 즐겁게 여행을 함께했던 선배, 후배 건축사분들에게 고마움을 전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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