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섬 사람이 아닌 이들은 언젠가 섬을 떠난다”
“섬 사람이 아닌 이들은 언젠가 섬을 떠난다”
  • 김형훈 기자
  • 승인 2020.07.07 1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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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형훈의 책가방] <10> 르 클레지오의 ‘폭풍우’

우도에 온 이들을 통해서 바라보는 세상 이야기

섬에는 우수가 있다. 우리는 그것이 무엇 때문인지 알 수 없지만 이것이 당신들을 유혹한다. 그 우수는 바람, 어쩌면 그리고 바위, 나무 줄기, 연못의 물 그리고 바다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에 배어 있는 회녹색을 띠고 있는 색깔 때문인지도 모른다. 제주에는 다른 곳에 비해 더 강한 감정이 살아 있다. 당신은 세상의 끝에 서 있다. 마치 누군가 태평양의 끝없음과 가장 사람이 많이 사는 대륙의 초석 사이에 그리고 지구의 가장 넓게 펼쳐진 곳 사이가 바로 이곳이라고 말했던 것처럼.”
(르 클레지오의 ‘제주기행문’ 중에서)

클레지오는 지난 2008년 노벨문학상을 받았다. 그는 묘하다. 어디 사람인지 구분하기가 묘하다. 그 때문인지 2008년 노벨문학상 수상 때 보인 세간의 반응과 클레지오의 반응이 상반되게 들린다. 당시 프랑스의 니콜라 사르코지 대통령은 클레지오의 노벨문학상 수상을 두고 “나는 매우 자랑스럽다. 프랑스와 프랑스어에 대한 영광이며, 프랑스어권 나라들에게도 그렇다”고 말했다. 프랑수아 필롱 수상도 마찬가지였다. 필롱 수상은 “그 상은 프랑스 문학을 신성하게 만들었다. 프랑스 문학의 쇠퇴론을 갈채로 바꾸었다”고 했다. 아마도 클레지오가 노벨문학상을 받기까지 수십년간 순수 프랑스어로 된 문학작품으로 노벨문학상을 받은 이가 나오지 않은 때문인지도 모른다. 1985년 클로드 시몽 이후 23년만에 프랑스어 작품으로 노벨문학상을 받은 이가 바로 르 클레지오였다.

노벨문학상을 받은 클레지오도 사르코지를 비롯한 프랑스인들과 같은 심경이었을까. 그는 2008년 노벨문학상을 받은 뒤 다음처럼 말했다.

모리셔스라는 또다른 이름으로 이 상을 받게 되어 매우 행복하다. 프랑스는 문화와 언어를 위해 내가 선택한 나라이다. 그러나 내가 사랑하는 조국은 모리셔스다. 거기 가면 집에 도착했다는 느낌이 든다.”
(국제학술지 ‘시마저널’ 제12권 1호에 실린 논문에서 발췌)

클레지오의 조국(homeland)는 모리셔스였고, 그의 집(home)은 프랑스가 아니라, 역시 모리셔스였다. 르 클레지오는 ‘살아 있는 신화’로 불리는 작가이다. 세계인들에게 가장 많은 사랑을 받는 작가이기도 하다. 그는 1940년 프랑스 니스에서 태어났음에도, 정체는 모리셔스에 두고 있다. 그의 선조는 18세기 프랑스 북서부 브르타뉴에서 옮겨간 이들의 후예였고, 클레지오의 부모는 모리셔스의 전통을 따르던 이들이었다. 때문에 클레지오는 노벨문학상을 받고서도 ‘프랑스’보다는 ‘모리셔스’를 강조했나 보다.

클레지오가 모리셔스를 말한 건 자신의 정체성을 드러낸 표현이다. 과연 정체성은 무엇일까. 정체성은 언어에 배어 있기도, 공동체 문화에 있기도, 혹은 인종이라는 특이성이 정체성을 말하곤 한다. 어떤 경우는 극히 개인적인 이야기가 정체성을 만드는 요인도 된다. 살면서 가장 강력한 지배를 해온 요인이 결국은 정체성이 된다. 누군가에겐 태어나서부터 정체성을 갖지만, 누구는 살면서 자신의 정체를 깨닫는다.

우리가 ‘아이덴티티’라고 부르는 정체성은 알게 모르게 배어든다. 클레지오가 자신의 정체라고 말한 모리셔스는 인도양의 작은 섬이다. 네덜란드 식민지에서 프랑스령을 거쳐 영국의 직할 식민지가 되었다가 1968년에 영 연방 내의 입헌 군주국으로 독립했다. 별로 크지 않은 나라이다. 면적은 제주도보다 살짝 크다. 제주특별자치도가 하나의 나라라면 모리셔스와 비슷한 느낌이지 않았을까.

르 클레지오는 자신을 섬사람이라 부른다. 그는 '제주기행문'을 통해 제주사람들의 이야기를 유럽에 알리기도 했다. '제주기행문'의 일부가 4.3유적지인 터진목에 새겨 있다. 미디어제주
르 클레지오는 자신을 섬사람이라 부른다. 그는 '제주기행문'을 통해 제주사람들의 이야기를 유럽에 알리기도 했다. '제주기행문'의 일부가 4.3유적지인 터진목에 새겨 있다. 미디어제주

르 클레지오는 ‘제주기행문’이라는 글을 통해 “섬에는 우수가 있다”고 말했다. 우수는 시름, 혹은 슬픔, 아니면 근심이나 걱정 정도로 풀이가 가능하다. 하지만 모리셔스가 말한 그 우수는 시름, 슬픔, 근심, 걱정으로 풀이해서는 안된다. 클레지오는 섬 사람들이 시름에 잠겨 있거나, 슬퍼하거나 근심과 걱정으로 가득찼다는 의미에서 우수를 꺼낸 건 아니다. 사람들이 알게 모르게 섬에 끌리는 그런 현상을 클레지오는 말했다. 수천년간, 짧게는 수백년간 섬에서 일어난 일들엔 알지 못하는 슬픔이 있다. 아마도 클레지오는 그걸 ‘우수’라고 표현하지 않았을까.

클레지오가 모리셔스 사람이라면, 나는 제주도 사람이다. 클레지오가 모리셔스에 끌리는 게 무엇인지 모르지만, 나는 단박에 제주 냄새를 안다. 사실 바다내음에 취해 산다. 갯내음이 바람을 타고 코끝을 때리곤 한다. 그 냄새를 유독 잘 맡을 때가 있다. 잠시 집을 떠났다가 제주에 오면 그 향에 꽂힌다. 제주공항에 내린 비행기는 탑승교(보딩 브릿지)로 나를 안내하기도 하지만, 가끔은 탑승교가 아닌 계단으로 내려주곤 한다. 계단으로 내려오기 위해 비행기 밖으로 몸을 내밀자마자 제주공항에서 멀지 않은 북쪽 바닷가에서 실려온 갯내음은 그때 내 코 끝에 닿는다. “아! 내 고향이구나.”

섬사람은 섬사람을 이해한다. 그들의 우수를 이해하고, 공감한다. 르 클레지오는 더 그런 사람이다. 그가 바라보는 제주는 어릴 때부터 이미지화 되었다. 르 클레지오가 8살이 되던 해에 제주의 이미지를 보았다고 한다. 그의 아버지는 <내셔널 지오그래픽>을 구독하고 있었고, 거기에 담긴 제주 해녀에 매혹되었다고 한다. 클레지오가 8살이었을 때는 한국전쟁이 일어나기 바로 전이다. 어떤 작가의 시선에, 어떤 작가의 카메라에 제주해녀가 담겨서 <내셔널 지오그래픽>에 실렸는지 모르겠으나 당시 제주도는 전쟁의 땅이었다. 삶, 혹은 죽음이 넘나드는 4·3의 피비린내 가득한 땅이었다. 살아남은 여성들은 가족을 위해 물옷만 걸친채 바다로 뛰어들어야 했다. 작가의 시선이 담긴 제주해녀는 4·3이 뭔지 모르는, 먼 나라에 살던 여덟살 소년의 눈에 담겼다. 클레지오가 본 모습은 마지못해 살아야 했던 제주사람들의 모습이 아니라, 그냥 황홀경이었을 뿐이다.

클레지오는 나중에야 알았다. 제주도가 그런 섬이었다는 걸. 그래서 그는 모리셔스의 아픔처럼 제주의 아픔을 이해했으리라.

동쪽 끝에서 섬의 우수를 느낄 수 있다. 성산일출봉이다. 화산 폭발의 마지막 모습으로, 바다에 우뚝 솟은 화산 원뿔을 남긴 흔적을 가졌다. 이 바위는 나에게 세계 저편의 또다른 장소인 모리셔스의 르몽산의 바위를 연상시킨다. 풍경은 슬픈 모습이다.”
(르 클레지오의 ‘제주기행문’ 중에서)

르 클레지오는 광치기해변에서 일어난 학살사건을 알고 있다. 제주사람들의 억울한 죽음은 모리셔스 주민들의 삶과 오버랩된다. 서구 제국주의가 잉태한 노예제도는 모리셔스에도 불어닥쳤다. 저항하던 노예의 기억은 모리셔스 르몽산 바위에 남아 있고, 클레지오는 제주에서도 그걸 느꼈음은 물론이다.

어쨌거나 클레지오는 8살 때 본 해녀를 수십년만에 마주할 수 있었다. 해녀만 본 것은 아니었다. 그는 제주4·3도 보고, 제주의 신당도 만났다. 신화가 살아있는 섬이라는 것도 안다. 신화가 매 순간 제주사람들의 삶에 메아리친다고 표현할 정도이다.

제주에 대한 그의 이미지는 2014년 소설로 만들어진다. 한국을 배경으로 한 첫 소설인 <폭풍우>이다. <폭풍우>는 ‘섬 속의 섬’ 우도가 배경이다. 모든 섬이 그렇듯, 섬은 바람을 안고 산다. 바람은 친구이면서, 적이라는 존재로 변하기도 한다. <폭풍우>는 그 곳에서 물질하는 해녀의 모습도 그렸다.

<폭풍우>를 옮긴이는 ‘제주 해녀들에게 바치는 오마주’라고 했으나, 내겐 그렇게 다가오지 않는다. 해녀의 모습이 소설에 보이지만, 소설을 잘 들여다보면 작가가 보는 제주에 대한 감정을 읽을 수 있다. 해녀가 담긴 소설이지만, 해녀를 주제로 하진 않았다. 해녀를 말하기보다는 섬은 어떤 곳이어야 하며, 가치있는 섬은 더더욱 어떠해야 한다는 걸 내게 말걸고 있다. <폭풍우> 첫 쪽부터 그렇다.

아침마다 여덟 시면 관광객을 태운 여객선이 섬에 도착하고, 텅 비어 있던 섬은 사람들로 북적인다. 해변에 가득찬 관광객들은 도로나 오솔길을 따라 더러운 물처럼 줄지어 흐른다. 그러나 저녁이 되면 그들은 다시 바닷길을 비우고 뒤로 물러나며 점점 멀어진다. 그리고 사라져 버린다. 여객선은 다시 그들을 실어간다. 그러고 나면 밤이 온다.”
(르 클레지오의 ‘폭풍우’ 중에서)

클레지오가 그린 우도 풍경은 현상을 그대로 말한다. 관광객들은 자신이 필요로 한 것만 소비를 한다. 우도는 한번 보고 스쳐 지나가면 그만이다. 우도에 며칠째 눌러앉아 지내는 관광객은 많지 않다. 아침 일찍 도항선은 성산포에서 관광객을 싣는다. 사람도 있고, 차도 도항선에 실린다. 우도를 한바퀴 돌면 볼 걸 다 본 관광객들은 썰물처럼 빠져나간다. 제주를 아끼는 클레지오의 눈엔 관광객들이 어떻게 보였을까. 소설의 문구처럼 “더러운 물처럼 줄지어 흐른다”는 표현에 꽂힌다.

<폭풍우> 주인공은 둘이다. 베트남 전쟁에 종군기자로 참가했던 필립 키요와 아버지가 없는 준이라는 열세살 여자아이가 주인공이다. 둘의 나이차이는 마흔 다섯이다. 준에게 키요 아저씨는 아버지처럼 느껴진다. 절망적인 삶을 살던 키요는 준에게서 삶의 새로운 희망을 느낀다. 키요는 마지막이 되리라 생각하며 우도에 발을 디뎠으나, 준이 그에게 준 에너지는 죽음이 아닌, 삶으로 대체된다.

<폭풍우>에 등장하는 키요는 베트남 전쟁 때 일어난 성폭력 장면을 목격했지만, 그런 사회 부조리를 없애는데 소극적이었다. 키요는 소설에서 내내 그에 대한 고통을 느낀다. 현실의 클레지오는 태국에서 군 복무를 하며 어린 여성의 매춘 행위를 고발하고, 태국에서 추방되기도 했으나 소설 속 키요는 그러지 못하다.

준의 어머니는 열여덟에 딸을 키우는 존재가 되었다. 미혼모였다. 미군이 남긴 자식이 준이었다. 세례명 ‘줄리아’인 준의 엄마는 어린 딸을 데리고 우도에 정착한다. 그러곤 물질을 배운다. 준과 준의 엄마가 살려고 우도에 들어온 반면, 키요는 그 반대에 해당한다. 그러나 준도 죽음의 의식을 바다에서 치른다. 다행히도 살았다.

폭풍우는 모든 걸 앗아간다. 폭풍우가 몰아치면 모든 건 움츠린다. 폭풍우가 몰아칠 걸 아는 관광객들은 우도에 오는 걸 멈춘다. 그러다 살아난 사람들은 떠난다. 새로운 삶을 찾아서 떠난다. <폭풍우> 속 우도는 삶의 현장이라기보다는 죽음을 맞으려는 이들이 삶의 조각을 찾는 장소로서 존재한다. 우도에 사는 이들의 품에 들어가기보다는 스쳐 지나가는 관광객과 같다. 결국 우도에 남는 이들은 실제 우도에 사는 이들 뿐이다.

우리는 늘 소비하는 이들을 보고 있다. 지도에 가야 할 곳을 표시해놓고, 사진을 찍으면서 다녀온 곳을 표시하는 이들이 있다. 관광객이다. 결국은 떠난다. <폭풍우>에 등장하는 이들은 ‘제주’라는 아이덴티티를 지닌 이들이 아니다. 클레지오가 모리셔스라는 정체성에 충실하고, 글을 쓰는 나 자신은 제주도라는 정체성에 충실하지만 스쳐 지나가는 이들은 그렇지 않다. 왔다가 실컷 쓰고 떠날 뿐이다. 르 클레지오의 정체성은 노벨문학상을 받은 2008년 이후 명확해졌다고 하지 않나. 그는 공개적으로 자신의 고향을 모리셔스라고 외쳤고, 묻히고 싶은 곳을 물었더니 “쉬흐 윈느 일(Sur une île)”이라고 했단다. 프랑스어 ‘쉬흐 윈느 일’은 “섬에서…”라고 해석된다. 사람은 다들 고향에 오길 원한다. 떠돌다가도 묻힐 곳에 돌아오는 데 거기가 바로 고향이다. 내게도 섬, 제주도가 그런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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