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탐욕으로 제주도가 망가지길 바라진 않아”
“인간의 탐욕으로 제주도가 망가지길 바라진 않아”
  • 김형훈
  • 승인 2020.06.30 1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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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형훈의 책가방] <9> 정홍규의 ‘에밀 타케의 선물’

왕벚나무 자생지 발견 등 식물학자 타케 신부 조명
“쓰고 버리는 사회는 인간과 자연과 단절 보여줘”

어릴 때의 개인적인 기억부터 불러내야겠다. 고향은 제주시 화북동이지만 학창시절 대부분은 이른바 ‘육지’에서 보내야 했다. 때문에 고향 제주에서 어릴 때 친구를 만날 일도 없고, 초등학교와 중학교 동창도 역시 없다. 간혹 초·중학교 때 친구들이 연락을 오지만 그것도 뜸하다. 나이가 드니 연락을 오던 아이들의 소식도 하나 둘 끊긴다. 그렇다고 섭섭하거나 그러진 않다. 세월이 흐르니 어쩔 수 없는 노릇이다. 이젠 논어 ‘학이편’을 음미하며 세상을 살아야겠다. 그럴 나이도 됐다. “친구가 멀리서 찾아오니 이 또한 즐겁지 아니한가.” 언젠가 찾아올 친구를 기다리며, 이렇게 위안을 하면서 말이다.

제주 토박이임에도 어릴 때 고향에 대한 기억은 아주 단편적이다. 어릴 때의 기억은 육지생활이 남긴 게 더 많아서인가보다. 중학교 때까지의 기억은 경상남도 진해에 머물러 있다. 진해는 지금 통합 창원시에 속한 하나의 구(區)가 되어 있다. 사람들은 진해를 군사도시로 기억한다. 사회 교과의 ‘사회과부도’를 익힌 이들이라면 진해는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방사상 도로망’이라는 사실쯤은 알고 있다. 그런데 그보다 더 유명한 게 있다. 바로 벚꽃이다. 매년 군항제가 열리는 도시가 바로 진해이다.

봄철이면 하얀 꽃망울에 취하고, 하얀 눈이 쉴새 없이 내리는 그 모습에 반한다. 진해와 이웃한 도시는 마산인데, 봄철의 두 도시는 풍경이 다르다. 마산에서 진해로 넘어오는 터널을 하나 넘으면 서로 다른 모습을 쉽게 확인할 수 있었다. ‘마진굴’이라는 이름의 터널을 벗어나서 진해에 다다르면 온통 하얗다. 그러고 보니 그 모습을 본지 너무 오래되긴 했다.

제주시 봉개동 왕벚나무 자생지에 있는 세그루 나무 가운데 1번목. 천연기념물 제159호이다. 미디어제주
제주시 봉개동 왕벚나무 자생지에 있는 세그루 나무 가운데 1번목. 천연기념물 제159호이다. ⓒ미디어제주

그때는 잘 모르며 벚꽃에 취했는데, 지금 생각하니 그게 낭만이다. 매번 보는 그 눈꽃이 그리도 특별한 줄은 몰랐다. 중학교 1학년 때인지, 2학년 때인지 잘 기억은 나지 않지만 젊은 남녀가 내게 물었다. “여기 호텔이 어디 있어요?” 1978년 봄철 아니면, 1979년 봄이었다. “호텔요?” 내게 익숙한 단어는 아니었다. 진해에 호텔이 있으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는데, 신혼부부가 교복 입은 아이에게 건넨 단어는 ‘호텔’이었다. 그때를 회상해보면, 신혼부부를 안내한답시고 호텔이 아니라 장급 여관을 어찌어찌 설명했던 것 같다. 신혼부부는 60대가 되었겠지.

하얀 눈을 맞는 일은 즐겁다. 하얀 눈이 다 내리고 나면 벚나무는 열매를 준다. 버찌라는 열매이다. 새콤하고, 달콤한 그 열매를 따 먹던 시절도 추억으로 변환돼 있다. 사실 버찌를 따 먹은 건 초등학교 때까지였던 것 같다. 중학교 때 버찌를 먹던 기억이 없어서다. 나름 컸다고 버찌를 따 먹지 않은 건지, 너무 열심히(?) 공부를 해서 버찌에 눈길을 주지 않은 것인지는 모르겠다. 솔직히 말하면 그 뒤로 지금 글을 쓸 때까지 버찌에 대한 기억을 잊고 있었다. 글을 쓰면서 버찌를 소환했다는 사실이 야속하긴 하다. 이쯤에서 갑자기 의문이 든다. 고향 제주에서 만나는 벚나무는 숱한데, 나무에 달린 버찌를 왜 보지 못했을까. 너무 무심했나?

벚나무는 미운털이 수없이 박힌 나무이다. ‘사쿠라’라며 종종 비난의 대상이 되곤 했다. 왕벚나무 자생지가 제주도임에도 말이다. 일본에는 벚나무 자생지가 없음에도, 벚나무는 죄다 일본의 상징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많다. 제주도가 왕벚나무의 유일한 자생지고 알려진 이후 전남 해남에서도 자생지가 발견되지만, 그럼에도 우린 벚나무를 사기꾼에 빗대 말하는 ‘사쿠라’ 취급을 해왔다.

제주도의 왕벚나무 자생지를 알린 사람은 프랑스인 에밀 타케 신부였다. 타케 신부는 1908년 한라산 해발 600m 지점에서 왕벚나무를 발견했다. 그때 발견한 왕벚나무 표본은 1912년 독일 베를린대학 쾨네 교수에게 보내졌고, 쾨네 교수는 제주도가 왕벚나무 자생지임을 최초로 밝혔다. 1932년엔 일본인 학자 고이즈미 겐이치 박사가 한라산에 올랐다. 고이즈미 박사는 왕벚나무 원산지가 제주도임을 재확인해줬다. 관련 기사는 일본어로 발간되던 <부산일보> 1932년 5월 8일자에 실려 있다.

타케 신부가 발견하고, 일본인 학자도 왕벚나무 원산지를 재확인해줬지만, 우리는 벚나무를 살갑게 대해주지 않았다. 해방 이후 수없이 많은 벚나무가 잘려 나갔다. 일본 제국주의가 심어놓은 나무라며 친일을 한 이들보다 더 가혹한 대접을 받았다. 나무가 잘려 나간다는 건 죽음이다. 친일행각을 한 이들은 죽지 않고 떳떳하게 살아가는데 나무는 무슨 죄가 있다고 죽음까지 불사해야 했을까. 언론도 후하지는 않았다. 우리나라 언론이 왕벚나무 원산지를 제주도라고 밝힌 건 1962년이 되어서다. 그해 <동아일보> 4월 17일자 4면 톱 기사는 “벚꽃은 우리꽃, 한라산이 원산지”라는 제목을 달았다.

왕벚나무 자생지를 찾아낸 에밀 타케 신부에 대한 이야기는 아는 사람만 안다. 기자도 그에 대해서는 잘 모른다. <에밀 타케의 선물>이라는 책을 통해 비로소 그를 알게 됐다. 지난해 발간된 이 책은 정홍규 신부의 작품이다. 정홍규 신부는 환경운동가이면서 생태교육가로도 활동하고 있다. 책을 읽어보면 생명을 귀하게 여기는 정홍규 신부의 말소리가 그대로 들린다. 신부가 쓴 책이기에 종교에 대한 이야기가 가득할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 에밀 타케 신부를 통해 20세기 초반 제주를 이야기하고 있고, 제주의 생태환경이 얼마나 가치 있는지를 말하고 있다.

앞서 개인적인 이야기와 맞물린 벚나무는 에밀 타케 신부과 뗄 수 없다. 타케 신부는 왕벚나무 외에도 제주에 처음으로 들여온 온주밀감과도 인연이 있으며, 서양에서 트리로 인기가 높은 한라산의 구상나무를 발견한 인물이기도 하다.

파리외방전교회 소속이던 타케 신부는 1898년 조선에 발을 딛는다. 대구 남산동에 묻힐 때까지 55년을 대한민국 땅에서 살았다. 제주 생활은 13년이었고, 섬에서의 그는 선교사이면서 식물학자였다. 그가 생을 마감한 대구에서는 교육자 신분으로 31년을 지냈다.

서귀포시 면형의 집에 있는 홍로성당 터. 미디어제주
서귀포시 면형의 집에 있는 홍로성당 터. ⓒ미디어제주

제주에 발령을 받은 건 1902년 4월 20일이다. 서귀포 하논본당 제3대 주임신부로 제주에 내려오게 됐다. 그가 제주에 온 시점은 천주교에 대한 분위기가 썩 좋지 않을 때였다. 이재수의 난으로 불리는 신축교안이 그가 부임하기 1년 전에 제주에서 발생한 터였다. 이재수의 난은 급속한 교세 확장에만 힘쓴 전임 신부들의 욕망의 결과이기도 했다. 하나의 종교가 지역에 뿌리를 내리려면 지역의 분위기를 존중해줘야 하는데, 당시 천주교는 그러지 못했다. 천주교의 교세 확장은 제주도의 풍습과 충돌할 수밖에 없었다. 정홍규 신부는 <에밀 타케의 선물>이라는 책에서 “유럽적인 신앙 관습을 이식하지 말라는 교황청의 지시에도 불구하고 파리외방전교회는 이를 제대로 이행하지 않았다”고 당시 교세 확장의 문제점을 지적했다.

에밀 타케 신부는 그런 시기에 발을 디뎠다. 그는 하논성당에 부임하자 서홍동의 홍로로 성당을 옮긴다. 어쩌면 신축교안으로 만신창이가 된 천주교를 새롭게 만들어보려는 구상이었는지도 모른다. 현재 홍로성당은 터만 남아 있으며, 지금은 면형의 집이 자리를 잡고 있다.

정홍규 신부의 책을 들여다보면 에밀 타케는 제주 식물학의 효시로 기록된다. 그는 식물과는 전혀 관계가 없었으나 제주에서만큼은 식물학자였다. 그에게 영감을 준 이는 일본에서 활동하던 포리 신부였다. 포리 신부는 네 차례 조선을 방문했고, 두 차례는 타케 신부와 만난 것으로 나온다. 단순한 며칠이 아니라, 포리 신부는 수개월을 제주에 머물며 타케 신부와 함께했다. 포리 신부가 그때 한반도에서 채집한 식물 대부분은 일본으로 건너갔고, 채집품은 유럽의 전문가들에 팔려 선교활동 자금으로 활용됐다고 한다. 포리 신부는 1911년엔 타케 신부에게서 왕벚나무를 받은 답례로 온주밀감 14그루를 보내기도 했다. 이때 보내온 온주밀감은 제주도 감귤산업의 종잣돈이 됐음은 물론이다.

일본에서 활동하던 포리 신부는 포교활동보다는 식물 연구에 더 치중했다. 타케 신부는 달랐다. 제주에서 지낸 13년의 생활 외에는 식물관의 연관성을 찾을 수 없다. 그는 제주에서 활동하며 7000점 이상의 한국 식물을 채집했는데, 그에게 식물 채집은 선교자금 확보라는 목적도 컸다.

타케 신부는 마산과 진주에서 첫 선교를 할 때에도 제주도 하논에서 사목활동을 시작했을 때도 선교자금이 너무 부족했다. 타케 신부는 선교자금을 확보하는 방법으로 식물 채집을 시작했다가 점점 그 가치를 배우게 되었다고 생각된다. 포리 신부는 식물 채집이 전부였지만 타케 신부에게 식물 채집은 시한부였다. 타케 신부는 제주도를 떠나면서 식물 채집도 손을 놓았다.”
(‘에밀 타케의 선물’ 중에서)

타케 신부가 일본에 있던 포리 신부로 받은 온주밀감 묘목 중 유일하게 살아남았던 나무 한 그루도 지난해 고사했다. 지금은 면형의 집 성당 내부에 보관돼 있다. 미디어제주
타케 신부가 일본에 있던 포리 신부로 받은 온주밀감 묘목 중 유일하게 살아남았던 나무 한 그루도 지난해 고사했다. 지금은 면형의 집 성당 내부에 보관돼 있다. ⓒ미디어제주

타케 신부는 식물과의 인연 때문에 제주도에 온 게 아니었고, 당시 상황이 그를 식물학자로 활동하게 만들었을 뿐이었다. 때문에 왕벚나무의 가치도 알게 되었고, 온주밀감도 선물을 받은 것 아닌가.

책은 타케 신부의 활동을 말하지만, 정홍규 신부는 제주의 진면목과 가치를 누누이 설명한다. 그에게 제주는 파괴대상이 아니라, 잘 지켜야 하는 보물이다.

사람들이 제주도에 오는 이유는 제주도 돼지고기를 먹기 위해서가 아니라 바로 두가지, 생태와 영생 때문이다. 합치면 생태영생이다. 종교에서는 생태와 신앙을 따로 두고서 영적인 공백을 방치하고 있다. 생태계 파괴의 근본 원인은 우리 자신과 하느님 사이에 있는 세 겹의 관계의 장애 때문이다. 지금 우리가 만들어내는 내외적인 불모지, 즉 쓰고 버리는 쓰레기 사회는 인간과 자연이 얼마나 하느님과 단절되었는지를 보여준다. 우리 지구의 지속 불가능한 상황은 근본적으로는 인간과 자연의 심각한 단절 때문이다.”
(‘에밀 타케의 선물’ 중에서)

제주도는 소중하다. 그렇게 말만 떠든다. 잘 보호해서 후세에 넘겨주자는 말만 무성하다. 대신에 우리는 자연을 마구 쓰기에만 혈안이 돼 있다. 자연을 소비하는 인간들이다. 정홍규 신부는 그런 우리들을 행해 자본의 축적만 생각하는 ‘생태 문맹자’라고 비판한다. 자연을 인간 중심으로 바라보기 때문에 생태 위기가 오고 있다고 진단한다. 덧붙여 그는 인간 탐욕으로 제주도가 망가질 위기라고 말한다. 그런 날은 상상만으로도 끔찍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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