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와 만주 배경으로 일본제국주의 잔학성 폭로
역사적 사실 바탕으로 아픔 장면 세세하게 그려내
“사신(史臣)은 논한다. 충신은 두 임금을 섬기지 않고 열녀는 두 남편을 섬기지 않으니, 이는 절의가 국가에 관계되고 우주의 기둥이 되기 때문이다. 사로잡혀 갔던 부녀들은, 비록 그녀들의 본심은 아니었다고 하더라도 변을 만나 죽지 않았으니, 절의를 잃지 않았다고 할 수 있겠는가. 이미 절개를 잃었으면 남편의 집과는 의리가 이미 끊어진 것이니, 억지로 다시 합하게 해서 사대부의 가풍을 더럽힐 수는 절대로 없는 것이다.”
(인조실록 36권, 인조 16년 3월 11일 갑술 2번째 기사)
병자호란이 일어난 건 1636년(인조 14)이다. 앞서 기록은 병자호란 2년 뒤의 내용이다. 기사는 ‘환향녀(還鄕女)’에 대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내용에서 보듯 청나라에 강제로 끌려갔다가 돌아왔으나 그들은 환대받지 못했다. 오히려 ‘화냥녀’라는 취급을 받은 사람들이 당시 살아 돌아온 조선 여성들이다. <조선왕조실록>을 들여다보면 ‘환향녀’라는 단어는 없다. 대신 ‘사로잡혔던 여성’이라는 뜻의 ‘피로부녀(被擄婦女)’나 ‘피로지녀(被擄之女)’로 나온다. 당시 사대부의 논쟁거리는 환향녀와의 이혼이었다. 청나라에서 돌아온, 이른바 사대부가 보기엔 ‘몸을 더럽힌 여성’을 며느리로 받아들일 수 없다는 게 그들의 논리였고, 며느리와의 이혼을 시켜달라는 청원이 자주 조정에 올라왔다. 사대부 이혼은 임금의 허락이 있어야 했기에 더더욱 그랬다.
좌의정 최명길은 달랐다. 임진왜란 때 선조가 지시한 사례를 들며, 이혼불가를 외쳤다. 그러나 최명길의 의견은 소수였고, 오히려 사대부의 공격대상이 되었다. 사대부들은 최명길을 향해 “비뚤어진 견해를 가지고 망령되게 군다”라거나 “나라의 풍속을 무너뜨리고, 삼한을 들어 오랑캐로 만든 자가 최명길이다”고 비하할 정도였다.
17세기 사대부의 논리는 지금이라고 달라진 게 있을까 싶다. 일제강점기 때 일어난 일본군 성노예였던 ‘위안부’를 보면 그렇다. 일제는 전쟁을 효율적으로 수행한다는 명목으로 위안소를 설치한다. 1932년 중국 상하이를 시작으로, 점령지를 확대할수록 위안소는 늘었다. 우리가 쓰는 위안부라는 용어는 적절하지는 않지만 당시 일제가 공식적으로 사용했다는 점에서 역사적 용어로 정착되고 있다. 영어로는 강제적으로 끌려갔다는 의미를 담아내 ‘일본군 성노예’로 쓰고 있다. 여기서는 위안부로 통일해서 쓴다.
한국계 미국인 여성작가 매리 린 브락트가 지난 2018년 쓴 소설이 있다. <하얀국화>라는 제목의 책으로, 저자는 그해 영국 가디언지가 선정한 10명의 작가에 선정되기도 했다. 브락트는 소설의 배경을 제주해녀로 그리고 있으며, 거기에 위안부를 등장시켰다. 브락트는 우리가 바라보는 정의가 진정한 정의인지를 묻는다. 남성의 시각에서 바라본 정의는 정의가 아닐 수도 있음을 강하게 전달한다. 피해자는 여성인데, 비난을 받는 현실에 분개한다. 그가 <하얀국화>라는 소설을 쓴 이유이다.
그렇다면 우리 사회는 위안부의 진실을 알려고 노력해왔을까. 그러지 않았다. 1991년 김학순 할머니가 “내가 일본군 위안부다”라고 할 때까지, 과연 우리는 뭘 했을까. 정의기억연대가 30년 넘게 수요집회를 해오고 있는데, 과연 우리는 뭘 하고 있는가.
잘못된 과거는 바로잡아야 하는 게 원칙이다. 사실 위안부 문제는 오래 전부터 제기되어왔다. 우리가 관심을 두지 않았을 뿐이다. 박경식은 1965년 일본에서 펴낸 <朝鮮人强制連行の記錄(조선인 강제연행 기록)>에서 조선인 위안부는 30만명 추정된다고 썼다. 김일면은 1972년 일본에서 발간된 잡지 <現代の眼(현대의 눈)>을 통해 “조선인 위안부 14만3000명이 죽었다”고 주장했다.
위안부가 드러나지 않은 이유는 있다. 수많은 사람들이 끌려가고, 간신히 돌아오곤 했겠지만 피해 여성들에겐 ‘드러내고 싶지 않은 역사’였다. 마치 ‘화냥년’처럼…. 그동안 미온적인 정부의 태도도 한몫했다. 더욱이 가해자이면서 전제주의적 인권폭력을 자행했던 일본 정부는 여전히 역사적 사실을 은폐하기에 급급하다. 위안부 존재 자체를 부정하며 역사를 왜곡하는 우리나라 사람들도 있지 않은가.
성노예 피해를 입은 여성의 심정은 누가 알까. 어떤 경우엔 글이나 말보다 시각화된 자료가 모든 걸 말하곤 한다. 일본시민단체인 ‘여성들의 전쟁과 평화 자료관(WAP, women's active museum on war and peace)’이 만든 지도가 있다. 전쟁에 혈안이 된 군국주의 일본의 만행을 한눈에 확인 가능하다. 그들이 만든 지도는 24개 나라 곳곳에 위안소를 만든 흔적을 담고 있다. 위안소가 있던 지역을 표시한 수많은 빨간점을 보는 순간 경악하게 된다.
“17세 가을이었어. 일본군 트럭에 실려간 곳은 일본군 병영위안소였지. 2층짜리 집인데 보초가 서 있었어. 거절했지만 총부리에 맞고, 발길질을 당하고, 가죽띠에 맞고, 가죽이 벗겨져 어쩔 수 없이 응해야 했어. 밤낮으로 쉬지 않고 상대를 했지. 식사는 1일 2회로, 보리와 쌀밥에 미역국. 방 밖으로 나가는 것은 용변을 볼 때 뿐이고, 거기에도 보초가 붙었어. 이듬해 봄 며칠째 의식이 몽롱해져 군의관 검진 후 들것에 실려 골짜기에 버려졌지. 있는 힘을 다해 계속 기어서 민가에 당도했어.”
(WAP ‘일본군 위안부 지도’ 자료 중, 중국 지린성에 있던 위안소 생활을 했던 황선옥 할머니의 구술)
강제로 끌려가거나 혹은 공장 여공으로 일할 수 있다는 말에 속았다. 위안부가 될 줄은 몰랐다. 그들은 죽는 경우도 허다했다. 구사일생으로 살아 돌아오더라도 자기학대, 우울증, 정신분열증, 혐오감, 대인기피 등의 피해 증상이 따라다녔다. 무슨 죄가 있다고.
소설 <하얀국화>는 두 소녀의 이야기가 교차된다. 하나와 아미이다. 해녀의 딸인 두 소녀는 자매이다. 소설에서 하나는 1943년 16세 소녀에 머물러 있고, 아미는 2011년 76세 할머니로 나온다. 자매이지만 배경은 다르다. 1943년 하나는 위안부로 끌려가고, 아미는 수요집회를 떠도며 언니를 만날 수 있으리라 기대한다.
1943년 여름 어느날 오후. 바닷가에 등장한 일본 군인. 하나는 아홉 살 난 동생을 지켜야 한다는 신념 뿐이다. 날숨을 뱉으며 바다 위로 몸을 내밀 때 하나의 눈에 들어온 건 일본 군인이다. 혹시나 동생 아미가 일본 군인에게 붙잡혀 가지는 않을까라는 걱정에 휩싸인다. 다행히 동생을 숨겼으나 자신은 그러지 못했다. 강제로 끌려가 배를 타고, 겁탈을 당하고, 트럭을 타고, 기차를 타고…. 끌려가면서 죽임을 당하는 어린 동생들을 본다. 결국은 만주에 있는 위안소로 강제 배치된다.
2011년 아미는 이전까지 언니 하나의 이야기를 가족들에게 뱉어본 일이 없다. 그는 4·3을 겪으며 아버지의 죽음을 눈앞에서 봤다. 어린 나이에 제주사람들을 토벌하러 온 서북청년단원에게 강제로 시집을 가야 했다. 그의 어머니는 살릴 수 있다고 봤는데, 어머니도 죽는다. 빨갱이라고 명단에 올린 사위 때문에. 아니, 그의 남편이 된 서청 때문에.
아미는 자신을 살리려고 했던 언니를 기억한다. 어느날 만난 수요집회는 서울로 올라갈 때마다 들르는 곳이 되었다. 언니를 찾기 위해서였다.
“그날 바위 아래 숨어서 그놈들이 나 대신 언니를 데려가게 내버려 뒀어. 언니는 나를 살리려고 자길 희생한 거야. 난 지켜보기만 했고. 그래서 너희들한테 이야기할 수 없었지. 누구한테도. 내가 겁쟁이였던 게 얼마나 부끄러웠는지.” (‘하얀국화’ 중에서)
아미는 오랜 기간 비밀을 혼자 지켰다. 그날 물가에서 침묵을 지킨 탓에 언니가 강제로 성노예가 되고 말았다는 사실을 아미는 믿고 싶지 않았서였다. 처음에는 죄책감에 사실을 말할 수 없었다. 그러나 비밀을 마냥 감출 수는 없었다. 고백했다. 아들과 딸에게. 수요집회에 왜 가느냐는 아들·딸에게 이유를 설명해야 했다. 수십년간 닫혔던 무거운 입은 고백이 되어 열렸다.
아미의 시점인 2011년 겨울은 1000번째 수요집회가 열린 해이기도 하다. 2011년 12월 14일 그날, 평화의 소녀상이 세워졌다. 소설 <하얀국화>는 역사적 사실 속으로 들어간다. 소설 속 아미는 1000번째 수요집회 당일 평화의 소녀상을 만난다. 소녀상을 본 아미는 청동에 새겨진 그 얼굴이 언니인 아미임을 직감한다. 너무 닮았다. 충격을 받고 쓰러진 아미는 다시 소녀상을 만나러 가야 했다. 아미는 아픈 몸을 이끌고 소녀상을 만나러 간다. 1000번째 만났던 그 소녀를 다시 만나기 위해 휠체어에 의지를 해서라도 봐야 했다.
“마침내 소녀상에 다다른 아미는 옆에 있는 빈 의자에 풀썩 주저앉는다. 잔뜩 부풀어 오른 가슴을 천천히 편안하게 달래며 숨을 고른다. 그리고 청동으로 만든 소녀의 손을 붙잡는다. 차갑다. 손을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주름진 제 손의 온기로 소녀의 손을 덥힌다. 둘은 말없이 앉아만 있다. 아미는 소녀상의 옆 모습을 흘끔흘끔 쳐다본다. 어린 시절 기억 속의 그 얼굴이 맞다. 하나 언니가 맞다.” (‘하얀국화’ 중에서)
아미는 마침내 하나 언니를 만났다. 차가운 청동상이지만 진짜 언니다. 소설은 그 이유를 설명한다. 비록 청동상이지만, 하나 언니를 만난 아미는 언니를 잊은 적이 없다고 말한다. 속으로 그렇게 말한다. 긴 세월동안 잊은 척 했지만 잊은 적이 없다고 말한다. 가슴 속으로 울며 말한다. 청동 소녀상은 아미의 이야기를 들었을까. 가슴 속의 그 말을. 두 자매는 1943년 더운 여름에 강제로 헤어졌다. 세월은 야속하리만큼 68년을 거쳐, 2011년 겨울에야 자매의 손을 잡게 해주었다. 눈물이 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