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의 광장 - 관덕정 광장의 새로운 모색
제주의 광장 - 관덕정 광장의 새로운 모색
  • 미디어제주
  • 승인 2020.06.08 11: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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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건축 [2020년 1월호] 건축연구
강명숙 제주특별자치도건축사회 연구위원회 위원/건축사사무소 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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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글은 제주건축연구회 공공공간을 연구하는 팀에서 광장에 대한 두 번째 이야기를 하려한다. 광장에 대한 첫 번째 이야기는 ‘광장의 유래’라는 제목으로 광장의 유래와 광장이라는 장소적 의미를 논하였고 그것을 통해 광장은 공공의 기억을 갖고 있는 상징성 공간으로 귀결되며 과연 제주에서는 어떤 공간이 제주민들에게 상징성을 지닌 광장으로서 기억되고 있을까?

필자는 관덕정 광장을 주목하였고 과거와 현재의 관덕정 광장을 연구하여 광장으로서의 필연성과 제주민들의 광장으로 거듭나기 위한 새로운 모색을 하는데 중점을 두고 이 글을 써내려 갔다.

01. 관덕정이면 충분했고

“그가 관덕정의 정확한 유래를 알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저 ‘관덕정’이면 충분했고, 공자묘같은 그 건물이 옛날 세종때 홍화각(弘化閣) 주인인 제주목사가 ‘상무정신(尙武精神)’을 함양하기 위해 세운 연무장이고, 또한 큰문 앞의 돌바닥에 ‘죄인’'을 무릎 꿇려 재판 같은 것도 하고, 위정자에 의한 잔학과 살육이 그 앞에서 벌어진 조선시대의 유물이라는 것도 노인과는 아무 관계가 없었다. 다만 노인의 관심을 끈 것은, 아직도 성내에, 그러니까 제주도 전역에 관덕정만큼 큰 건물이 없으며 또한 관덕정은 ‘옛날’을 전해주는 유일한 건물이라는 바로 그 점이었다”. (김석범의 소설 ‘까마귀의 죽음’ 중에서)

필자도 관덕정을 처음 접했을 때 김석범의 소설 ‘관덕정’에 나오는 노인과 같은 시점이었다. 관덕정의 유래와 장소성은 차치하더라도 관덕정이 내뿜는 위용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카타르시스를 느낄만큼 충분했다. 전면 5칸, 측면 4칸집을 덮기 위해 팔작지붕 처마가 거대해졌고새부리 모양의 뻗쳐 나온 공포 두 개가 15척의 긴처마를 떠받치고 있다. 그리고 사방으로 탁트인 개방형 누전 건축물로서 늘 대중을 향해 열려 있다. 관덕정은 규모나 역사적으로 제주에서 가장 크고 가장 오래된 목조건물이며 생성시부터 호남제일정이라 불릴만큼 조선시대이래 제주를 상징하는 건축물이다. 현재 관덕정이 제주의 원도심에 살아숨쉬는 것만으로도 필자는 시공을 초월한 보물 앞에 서있는 듯하다.

02. 관덕정을 중심으로 한 관덕정 광장

그런 위용을 지닌 관덕정 앞에는 관덕정을 중심으로 관덕정 광장이라 불리는 제주의 광장공간이 있다. 지금의 관덕정과 목관아가 연접한 도로는 과거 구한말까지도 제주도 최고의 광장으로 활용되었다. 물리적인 공간으로서 관덕정 광장은 목관아 내부가 아닌 외부에 형성된 곳으로 목관아와 평행하게 배치되어 관과 평등한 민초들의 공적인 공간이었다. 이는 서울의 경복궁과 광화문 광장의 수직적인 배치와 비교되기도 한다.

관덕정을 중심으로 북쪽에는 제주목사가 근무하던 상아가 남쪽에는 제주판관이 근무하던 이아가 있었고 서쪽에는 동향인 덕정이 있다. 동쪽만 유일하게 트인 형상으로 동쪽을 향하는 공간이 바로 관덕정 광장이다. 관덕정 앞의 큰 광장은 고려말 이후 계속된 왜구의 침입을 막아내기 위해 전도민이 군사화해야하는 현실에서 무예를 실험하는 장소로 출발했지만 조선시대 제주 목관아의 중심으로서 제주도의 정치·역사·문화·교통의 중심지였다. 1813년 제주가 독립국임을 선언하며 일으킨 양제해의 변과 1901년 천주교의 교세확장과 폐단, 정부의 조세 수탈 등의 원인이 되어 일어난 이재수의 난, 이후 1947년 3월 1일 4.3사건의 도화선이 된 3.1절 기념식과 발포사건이 일어난 장소로 시대역사의 장이며 변혁을 꿈꾸던 사람들의 비감이 서려있는 곳이다. 또한 1905년 최초의 오일장이 열린 시장공간으로 각 농촌 농산물의 집결지이고 육지에서 들어온 물건을 구매하기 위해 제주 각지에서 인파들이 몰려 북적이는 곳이기도 했다. 그리고 한해 농사의 시작을 알리는 굿인 입춧굿놀이가 열리는 신명진 마당의 장으로 활용되었다.

03. 지금의 관덕정 광장

관덕정 광장은 일제강점기 이후 신작로 도로로 전용되었고 1924년 도로를 내기 위해 15척이던 관덕정 곡선 처마를 2척이나 잘라내 관덕정 외관이 손상되기도 했다. 그 이후 관덕정을 지나는 길은 자동차의 원활한 소통을 위해 폭이 넓혀지고 1980년대 관덕정 앞에 분수대가 설치되어 분수대를 중심으로 차량이 통행하는 그야말로 로터리로 전락하게 된다. 근래에 와서는 관덕정과 목관아 복원사업과 맞물려 현재의 도로를 유지한채 북쪽 구석에 직각삼각형 형태의 자투리 공간으로 광장이 새로이 조성되어 관덕정 광장의 명맥을 간간이 유지하고 있다. 다시 말해 500년 역사 관덕정 중심의 위요된 공간은 사라진지 오래이고 제주민들의 희로애락의 장인 광장이 단순히 차량중심의 공간으로 변질되었다. 이러한 변화는 제주사람들의 중요한 공적공간이자 생활공간이였던 관덕정 광장이 퇴색됨을 의미한다.

04. 관덕정 광장의 새로운 모색 - 관덕정으로 충분한

제주도 속담 가운데 “관덕정 설탕도 먹어본 사람이 먹는다”라는 말이 있다. 먹을 줄 아는 사람이 먹는다는 뜻이기도 하지만 제주민에게 관덕정 설탕의 의미는 무엇일까? 관덕정 설탕을 사기 위해 모이던 곳이 관덕정 광장이었고 그 달콤한 관덕정 설탕을 팔던 장소와 기억에 대한 향수가 짙게 배인 속담이 아닐까 한다. 누구나 관덕정을 찾고 쾌적하게 머무르며 자주적으로 달콤함을 쫒았던, 때론 슬픈 역사의 장이지만 흔쾌히 모여 자연스럽게 놀이를 즐기던 곳. 모두에게 일상화된 공간이 관덕정 광장이었을 것이다. 서로 다른 배경을 가진 사람들의 공통의 추억이 있었던 곳이 지금은 현대의 바쁜 일상에 쫓겨 단순히 차량 통행의 공간으로 전락하고 한켠으로 밀려나 있는 모습은 참으로 아쉬운 일이다.

영국 런던에서 가장 큰 광장인 트레펠가 광장도 4면이 모두 도로로 에워싸여 있었으며 광장은 교통체증으로 완전히 차단된 상태로 시민들이 광장에 진입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트레펠가 광장은 과감히 한 쪽 차도를 없앰으로써 광장의 공간을 보행자 공간 위주로 다시 재탄생시켰으며 지금은 다양한 문화행사를 개최하고 공공편의시설과 충분한 녹지를 갖추어 도시속 시민 광장으로 거듭났다. 또한 차량 중심의 도로보다는 일반 보행자 위주 공간의 도로로서 교통체계를 달리 설계하여 보행자의 권리와 운전자의 권리가 균형을 이루게끔 하여 보행자와 차량이 공존하는 도로시스템을 구축한 곳도 있다. 런던의 켄싱턴앤드첼시 로열보로의 820m에 이르는 엑시비션거리 직선도로가 그러하다. 이 거리는 거추장스럽고 고압적이고 쓸데없는 설치물과 안전시설이 없는 클러터프리(clutter-free) 거리로 보행자 10여명이 어깨를 나란히한 채 산책하듯 걷는 게 가능한 거리로 탈바꿈되었다. 차량으로 인한 광장공간의 단절은 앞서 예를 든 경우와 같이 보행자 위주의 시스템으로 충분히 극복할 수 있다. 하지만 관덕정 광장은 보행자 위주의 시스템으로 공간개선함은 물론 물리적 공간이 뒷받침되어야 한다. 북쪽 상아와 남쪽의 이아로 둘러싸인 위요된 관덕정 본연의 공간이 되살아나야 한다. 북적이고 쉼이 있으며 이벤트가 있는 공간이 마련되어야 한다. 오랜만에 광장에 나오면 친구도 만날 수 있고 커피 한 잔 할 수 있는 공간이 되어야 한다.

여기서 필자는 과거로부터 받은 보물같은 선물 ‘관덕정’이면 충분한 광장의 새로운 스페이스를 모색할 수 있다고 본다. 15척 처마의 위용을 자랑하는 사방이 열린 개방형 정자는 관덕정을 중심으로 사방이 광장이 될 수 있는 점을 주목한다. 공간은 변해도 꿋꿋이 500년 세월을 버텨온 관덕정은 변하지 않듯 그 영원함에 기대어 제주민의 새로운 광장스페이스를 모색한다면 퇴색되어버린 광장을 되살릴 방법이 있지 않을까 한다.

지금까지의 관덕정 광장이 관덕정 정면인 동향으로 열린공간이었다면 관덕정을 중심으로 서쪽으로도 눈을 돌릴 수 있다고 본다. 서쪽에는 현재 공용주차장이 조성되어 있고 광장으로서 역할을 할 수 있는 유휴공간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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